"노동운동은 내 삶을 관통하는 숙제"지하조직 활동가서 제도권 노동운동 이론가로

사노맹 출신 은수미씨 서울대서 박사학위 받아
"노동운동은 내 삶을 관통하는 숙제"
지하조직 활동가서 제도권 노동운동 이론가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 겸 정책실장 조명혜(가명). 1989년 박노해 백태웅씨 등과 함께 사노맹을 결성, 암약하다 92년 검거돼 신문 헤드 라인을 시커멓게 장식했던 지하 조직 활동가였던 그가 10여년 만에 제도권 노동 운동 이론가로 돌아 왔다. 은수미(41ㆍ여)가 그의 본명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82학번인 그는 6년간 옥고를 치르고 97년 만기 출소 후 복학했다. 그리고 석ㆍ박사 과정 6년 만에 ‘한국 노동 운동의 정치 세력화 유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내달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은씨는 84년 시위를 하다 제적된 뒤 서울 구로 공단에서 미싱사 보조로 노동 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그에게 있어 ‘노동 운동’이란 탁상공론의 소재가 아니었다. 구로 공단에서, 길거리에서, 지하에서, 감옥에서 그의 청춘을 관통했던, 그리고 여전히 관류하고 있는 질문이다. 그 자신이 바로 한국 노동운동사의 현장 증언자다. 그의 논문이 어느 연구자의 그것보다 생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의 논문은 80, 90년대 노동 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던 모험적 노동 운동가가 이 시대에 부치는 자기 비판의 편지이기도 하다.

기자를 대면한 은 씨의 첫 마디는 “왜 제가 취재 대상이 되죠?”였다. 최근 언론의 관심이 사뭇 쑥스럽다는 표정이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도 수줍음 타는 몸짓과 해맑은 얼굴을 한 그에게서 과거 ‘조 실장’(사노맹 내에서 호칭)으로 불렸던 지하 활동가로서의 ‘단단한’ 이미지를 오버랩 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이것저것 행적을 묻는 기자에게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수년간 천착했던 학문과 칼날 같았던 인생 여정이 이리저리 뒤섞인다. 또한 고문과 옥살이, 독방 후유증으로 이어진 젊은 날의 고통을 밥처럼 삼켜버린 그의 개인사는 듣는 이에게도 저릿한 통증으로 다가온다.

은 씨는 창고를 개조해 만든 창문도 없는 강릉교도소 독방에서, 재래식 변소에다 삼복 더위에는 40도를 웃도는 독방에서, 24시간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는 독방에서 4년 6개월을 버텨냈다. 그는 수감 중 걸린 결핵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장과 목까지 균이 퍼져 결국 장을 50㎝까지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수술 후에도 병원에서 회복기를 갖지 못하고 독방에서 6개월간 뻗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노동 운동을 생각했다. 독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었고, 모진 옥살이에서 몸과 마음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그는 ‘삼각 편지’(제 3의 재소자를 통해 다른 교도소에 수감된 동료에 전달하는 교도소 편지의 은어)로 백태웅씨 등 복역중인 동지들과 연락하고 세상의 변화를 읽으면서 노동 운동의 미래를 그려냈다.

"나를 버티게 한 힘은 공부였다."
은 씨는 교도소에서 단식을 않는다는 조건으로 노동 운동에 관한 책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버티게 한 힘은 공부였고, 그것은 또한 세상에 대한 신뢰의 증거이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감옥에서의 시간은 자신을 무자비하게 들여다 보게 했다. 스스로 몇 번인가 무너지고 또 다시 일으켜 세웠다. 사노맹 활동의 오류도 인정하게 됐다. 그는 “사노맹을 결성할 때 내 나이는 25살, 백태웅씨는 26살, 박노해씨는 32살 이었다. 다들 열정과 확신에 차 있었지만 세상에 서투르고 실수도 많았다. 사회 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탓도 크다. 점조직화한 지하 활동이다 보니 조직 내 인간적인 소통이 약했다. 조직 상층부를 제외하고 서로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소통이 없는 연대의 나약함을 고민하지 못한 것도 돌이켜 보면 잘못”이라고 털어 놓는다. 그는 “검거된 후 기억하기도 싫은 충격적인 경험도 많았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 만큼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라고 고백한다. 그것은 곧 모진 옥살이 동안 자신을 버리지 않은 힘이기도 했다.

97년 출감했지만 오랜 독방 생활 후유증은 어쩌면 감옥보다 더 혹독했다. 밀실 공포증과 고소 공포증, 사회 부적응에 시달렸다. 좋아했던 영화관 가기는 엄두도 못 내고, 조카 데리고 미끄럼틀에 올랐다가 내려 오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다. 6년 ”樗?음악과 절연됐던 세월이라, 음감까지 잃어 버려 그렇게 좋아 했던 클래식 음악을 다시 듣기란 아예 강 건너 일로 치부하기로 했다.

회복과 포기를 오르내리던 지난 99년,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운동권에서 알고 지내던 대학 동기와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은 씨가 수감되어 있을 때 자신도 수배 신세라 면회도 못한 것에 미안해 하며, 은 씨의 출감 후 몇 년의 세월을 “건드리면 유리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무심한 시간 앞에 휘어지는 법도 배웠다. 지금 그의 학문을 가로 지르는 문제 의식에는 세월의 흔적이 뚜렷하다. 상호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자유롭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문법을 만들고 연대(聯帶)를 끌어내자는 것이다.

사실 은 씨는 궁핍한 집안 출신은 아니다. 부친은 군인이었고 미국 유학을 생각할 만큼 생활도 넉넉했다. 그의 가족은 3대째 성공회를 믿는 ‘선량한’ 종교 집안이다. 그의 반전은 그래서 집안에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그는 감옥에서 영어 성경을 5번 읽었다. 그는 지금도 종교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그의 말에 묘한 여운이 감돈다. “아마 나에게 모태 신앙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내가 이렇게 강단 이론가가 된 것도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학문적 열정
은 씨의 박사 학위 논문은 자료 축적 등 5년 넘게 준비돼 오던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한 사건이 노동 운동사적으로 어떻게 평가 받고 해석돼야 하는지에 대해 학문적 접근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맞춰 속도를 내 완성했다. 지난 7월에 쓰기 시작해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6개월을 연구실에서 살았다. 논문을 끝낸 그는 “석ㆍ박사 6년 동안 예전의 단단함을 찾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힌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노동 운동에 대한 열정이 살아난 것이다.

한국 노동 운동에 대한 그의 문제 의식은 ‘전체 노조 조직률 11.6%. 민주노총 조직률 4.3%, 2000년대에 들어 보다 뚜렷해진 정규 - 비정규간의 갈등 등 시민 사회에서 주변화할 가능성도 있었을 한국 노동 운동이 정치 세력화를 이루어 낸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시작된다. 위기에 처한 노동 운동이 어떻게, 왜 정치적 진입을 이뤄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은 씨가 노동 운동을 읽는 틀은 상징(이데올로기 등 포괄적 개념)과 조직 구조라는 개념이다. 그는 80년대 노동운동은 상징과 구조가 일치했지만, 지금의 민주노총은 상징과 조직 구조가 엇박자라고 지적한다. 민노총 중앙 조직은 ‘노동 - 정치 - 소수자 - 복지’라는 상징을 통합해 노동의 이해를 국민적 이해로 재구성하는데 반해, 지역의 조직 구조(단위 노조)는 정규직 이기주의를 드러내고 연대가 아닌 고립적 형태를 보인다는 분석이다. 또 노동 운동 ‘상징 연합’의 정치 세력화로 평가되는 민주노동당은 주요 계파인 NL과 PD 간의 정치적 공약이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맥 차원의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라고 경고한다. 민주노동당이 미래지향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 한 채, 80년대식 낡은 계파들로서만 언론에 부각되는 것은 민노당의 정치적 실험을 위태롭게 한다는 지적이다. 은씨는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상기시켰다. 진보 진영의 계파 다툼을 경계하자는 말이다.

지난 시절, 마치 전설인 양 떠돌던 운동권 비사마저도 이제는 세월의 풍상 속에 진부해졌다. 그러나 불혹을 넘겼지만 그에게서는 파릇파릇한 긴장감이 살아 있었다. “오늘 같이 추운 날엔 골목 낙지집에서 찬 소주 한 잔 생각난다”며 웃는 그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1-27 14:49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