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조작에 이어 답안지 대리작성 사건으로 내신 신뢰성에 치명타일선교사들 곤혹스런 입장, 입시제도 등 교육문제 전면 재정비 시급

만신창이 내신, 어찌 하오리까
성적조작에 이어 답안지 대리작성 사건으로 내신 신뢰성에 치명타
일선교사들 곤혹스런 입장, 입시제도 등 교육문제 전면 재정비 시급


일선 고교에서 잇따라 터지는 성적관련 비리로 내신제도가 심각한 불신에 휩싸이고 있다.(사진은 특정기사와 관련없음)

1월 25일 오후 서울 강동구 A고 교무실.

방학 중이라 한산한 교무실 한 쪽에 당직교사 몇몇이 모여 강동구 B고에서 벌어진 교사의 답안지 대리 작성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L(52) 교사는 “일부 파렴치한 교사 때문에 대다수 교사들까지 덩달아 의혹의 눈초리를 받게 됐다”고 한숨을 내쉬며 “방학 중 전체 교사 회의를 열어 엄정한 내신 관리 방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는 개학하는 대로 학부모와 학생을 대상으로 새 내신 관리 방안에 대한 설명회를 열기로 했다.

교사들 ‘내신관리 어쩌나’ 전전긍긍
교사의 답안지 대리 작성 사건으로 내신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일선 고교들이 땅에 떨어진 내신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C고는 “지금도 담임 교사는 규정상 자기 학급 감독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 앞으로는 감독 근무표도 절대 바꾸지 못하게 하는 등 보다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을 보며 “설마 하는 참담한 심정”이었다는 S(53) 교사는 “몇 년 전 서초고 성적 조작 사건 이후 담임을 맡고 있는 교사는 성적 처리실 근무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또 이런 일이 터졌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서초고에선 지난 2001년 한 교사가 학생의 OMR카드 답안지를 자신이 담당한 전산 처리 과정에서 바꿔치기 해 모두 네 차례에 걸쳐 13개 과목의 성적을 올려 주다 파면된 사건이 있었다. S 교사는 “서초고 사건으로 성적 처리를 전담하는 행정직 요원을 별도로 뽑아 교사가 성적 산출에 일절 관여하지 못 하도록 하는 학교도 있다는데 우리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하지만 많은 고교들은 대책을 내놓았다가 오히려 의심을 자극할까 염려하며 내부 단속에 치중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D고의 한 교사는 “그 어느 학교보다 엄정하게 내신 성적 관리를 해 왔다고 자부한다”며 “갑자기 ‘우리는 깨끗하다’고 강조하면 오히려 오해를 살 수 있어 별도의 대책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강북구 E고의 한 교사도 “우리 학교는 성적 부풀리기를 하는 다른 학교들에 비해 평균이 낮아 오히려 학부모 항의가 많았다”며 “내신관리에 관한 한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하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이 교사는 “어느 조직에나 소수의 파렴치한은 존재하는 법 아니냐”며 “차라리 2008년부터 시행되는 내신 상대 평가를 앞당겨 시행해 더 이상 이런 잡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학생들 “언젠가 터질 줄 알았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학생들은 “터질 일이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며 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일부에선 B고 사태가 강남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해묵은 ‘지역 감정’까지 드러내고 있다.

서울 은평구 F여고에 재학중인 심모(19)양은 “강북에서 내신을 부풀린다고 비난하더니 정작 강남에서는 부모와 교사가 짜고 성적을 조작했다”며 “강남 학생이 내신에 불리하다는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심 양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암암리에 다 알고 있던 일 아니냐”며 “친구들 사이에 성적이 많이 오르면 ‘너 담임이랑 친하냐’는 농담까지 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강남ㆍ북만 아니라 서울과 지방도 마찬가지다. 광주 G고에 재학중인 기모(18)양은 “서울에서 이런 식으로 내신을 조작했다니 맥이 다 풀린다”며 “고교 등급제다 뭐다 해서 지방 학생들이 받는 불이익이 많볕?서울에서 내신까지 이렇게 관리한다면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양은 “수시로 대학 갈 생각이라 정시 모집은 손을 놓고 있는 형편인데 계속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며 “내신 관리 잘 해 봤자 어차피 서울 학생들한테 안 될 것 같아 자포자기 심정인 애들도 많다”고 학교 분위기를 전했다.

내신 자체를 폐지해 버리자는 과격한 주장도 학생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서초구 H고에 재학중인 박모(19)군은 “2008학년도부터는 내신 비중이 더 커지는데 이런 식으로 자꾸 잡음이 나면 누가 내신을 믿을 수 있겠냐”며 “수능을 가장 큰 잣대로 삼고 나머지는 그냥 대학에 다 맡겨버리자”고 제안했다. 박 군은 “대학이라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게 한국 사람들인데 무슨 수로 부정을 다 막을 수 있겠냐”며 “내신은 너무 부조리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학부모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I고에 재학중인 고3 자녀를 둔 김모(42)씨는 “갑자기 B고에서 밝혀져서 그렇지 이런 종류의 부정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던 터라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며 “우리 학교도 파헤쳐 보면 이런 케이스가 있을 거라고 아이마저 태연하게 말해 되레 씁쓸했다”고 말했다.

전문가 “교육 제도 근본에서부터 문제”
전문가들은 차라리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입시 제도와 교사 선발 과정 등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가자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김경범 책임전문위원은 “이번 일은 내신 평가 방식이 너무 획일적이고, 대학이 현존하는 학력차를 반영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고교에만 내신 문제를 일임할 게 아니라 대학이 우수한 학생을 뽑을 수 있도록 합리적 평가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내신의 문제점은 수우미양가라는 ‘평가어’로 성적을 처리하는 데서 비롯된다”며 “이렇게 뭉뚱그린 점수로 어떻게 학교별ㆍ학생별 성적차를 감별해 낼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게다가 2008학년도 입시부터는 학생부 위주로 전형이 바뀌는데 과연 대학이 고교에서 보내주는 내신으로 학생을 뽑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최재훈 한양대 입학처장도 “대입에서 내신 비중이 자꾸 높아지다 보니 이런 부정이 발생한 것 같다”며 “이런 일이 자꾸 터지면 내신 반영 비율을 낮추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불안감을 나타냈다. 교사 양성 방식 자체를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박성익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이젠 교사 양성ㆍ선발 과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며 “교사로서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익힐 수 있도록 교직 과정을 재구축하고, 인성을 갖춘 교사만이 채용될 수 있게 임용 절차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교육자에게 윤리성과 인성은 갖추어야 할 부가적 덕목이 아니라 필수 요소라는 지적이다. 때문에 교사가 될 사람들에겐 윤리성과 인성을 제대로 가르치고, 교사를 뽑을 땐 윤리성과 인성을 갖춘 사람들만이 뽑힐 수 있도록 선발 기준을 정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선영 기자


입력시간 : 2005-02-01 15:53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