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속 주인공으로 사는 변신과 판타지의 요정다양한 캐릭터와 이미지의 코스튬 플레이어

[감성 25시] 코스튬 플레이어 채지윤
만화 속 주인공으로 사는 변신과 판타지의 요정
다양한 캐릭터와 이미지의 코스튬 플레이어


소소한 일상 속에서 아주 가끔은 특별한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코스튬 플레이어(costume과 play의 합성어로, 의상 연기자를 일컫는 말, 이하 코스프레)를 만났다. 자신이 직접 만든 장난기 가득한 의성어 꾸엠(kkuem)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채지윤은 만화 속 캐릭터를 그대로 닮았다. 머리 모양과 얼굴 표정, 의상, 심지어 성격까지 연기할 줄 아는 그녀는 프로다.

캐릭터와 완벽에 가까운 일치를 보여 코스 프레계에선 이미 인기를 확보한 그녀다. 그녀를 묘사하려면 상투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생김새는 전형적인 만화 속 주인공 이미지다. 170㎝의 큰 키에 창백한 피부, 오똑한 콧날과 붉은 입술, 마른 듯 보이는 홀쭉한 몸을 가진 그녀는, 그렇기에 여고생 사이에선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국내의 블록버스터 PC게임의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 ‘마그나카르타’, ‘파이널 판타지 X-2’의 비운의 주인공 유우나, 온 라인 게임 ‘마비노기’3의 교복 버젼, ‘파이널 판타지’ 8번째 시리즈의 청순함과 왈가닥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리노아,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배틀 로얄’의 치구사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줄 아는 그녀지만, 그 중에서도 온 라인 게임과 만화의 공주, 요정, 천사, 성직자, 소녀 역할을 가장 잘 소화한다는 평을 받는다.

밝고 낙천적인 명랑소녀
17세에 코스프레를 시작해 어느덧 미대생이 된 채지윤은 아직 앳된 얼굴이 덜 성숙한 명랑 소녀 같다. 딸꾹질을 할 때 나는 소리 꾸엠 같은 의성어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든 것만 봐도 밝고 낙천적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단 것을 무지 좋아해 치과 신세를 지고 있음에도 초코 케이크 앞에서 “꺄악” 환호성을 지르고 던지는 질문마다 쉴새 없이 “하르르” 하며, 목젖이 울리는데 이 보다 더 만화 주인공 같은 이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상대로 하여금 유년 시절을 동경 하게끔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 그녀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보았다.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다든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생각들, 나는 왜 거기에 있지 않고 늘 여기에 머무는가, 라는 뜬금 없지만 한 번쯤 던져 보았을 법한 이런 생각이 코스프레를 하게 만들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철학적인 답변으로 상대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녀는 더 이상 여고생이 아니다. 올해로 낭랑 22세가 되었으니까.

채지윤은 조금 엉뚱하다. 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고 자신이 특이하지 못한 것에 이상한 컴플렉스까지 지녀 독특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를 따라 하기 좋아 한다.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 탓에 탐구 정신이 발달했지만 만화 외에는 책이란 것은 도무지 잘 읽을 수 없다는 전형적인 AB형이란다. 사람 대신 개미를 친구 삼아 놀았던 조금은 이상한, 자기만의 세계 속에 흠뻑 빠진 아이였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던 날은 비오는 날이었는데 비가 오면 친구들이 죄다 개미굴로 숨어 들어 가기 때문이다. 해서 비 맞으며 물웅덩이 앞에서땅을 파가며 개미 찾기에 열중하곤 했는데 묘하게 그때 맡은 흙냄새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아직도 비오는 날 비 맞으며 흙장난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만화와 게임, 코스프레에 빠지다
그녀는 한 번도 심심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늘 개미와 같은 놀이의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 주기가 그녀의 특기인 셈. 만화와 게임에 심취한 10대 땐 캐릭터를 그대로 따라 그리기가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다 영파여고 시절 만화부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의무적으로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옷 만드는 일도 그녀에겐 놀이였다. 처음엔 천을 사서 바닥에 펼친 후 그 위에 누워 치수를 재고 재단을 했다고 한다. 그런 초보자의 과정을 거쳐 지금은 재봉틀로 직접 자신의 의상을 만들 줄 아는 전문가가 되었다.

만화와 게임, 코스프레에 푹 빠져 산 그녀에게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고2 때. 만화가가 되려면 미술을 기본으로 공부하고 사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추계예술대학에 진학한다. 전공은 판화다. 처음 접한 석판화에 대한 매력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판 위에 그림을 그리고 세밀하게 구석구석까지 파는데 일주일이 걸리더라구요. 잉크를 올리고 종이를 찍어야 완성되는 건데 하얀 종이에 판이 스쳐간 곳 위로 진한 잉크가 묻어 나올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해요.” 자신이 그린 그림이 판에 찍혀 완성되는 순간은 생명의 탄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자신이 동경하는 만화 주인공을 모방할 때의 심정과 흡사했다.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색의 느낌을 좋아하는데, 제 판화에도 제가 즐겨 그리는 카툰과 같은 느낌의 그림들이 많이 들어가요. 주로 빨강이나 파랑, 노랑 같은 강렬한 색으로 판을 찍어요.” 그녀는 성격처럼 밝고 산뜻한 색을 좋아한다. 색감도 풍부하고 시원시원한 느낌의 목판화 작가로 유명한 중국의 첸유핑이나 챠오메이가 그녀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들은 현재 그녀가 모방하고 싶은 이상에 가까운 작가들이다. “판화와 만화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어요. 아이콘적이고 패턴적이고 추상적인 표현 방법을 주로 쓰죠.”

그녀의 취미 역시 게임과 카툰이다. 최근 작업하는 카툰은 온라인 게임 ‘WOW’를 소재로 한 코믹 카툰인데 4컷 형식을 하고 있어 매일 일기 쓰는 기분으로 편하게 작업하고 있다. 의외로 독자들의 인기를 얻어 후속작을 그리는 게 즐겁기만 하다. (그녀의 카툰을 보려면 http://blog.naver.com/kkuem.do)

카툰과 판화 속 세계는 현실에서 코스프레 하는 그녀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가 의상을 준비해 연기하는 캐릭터가 카툰 안에 담겨 있기도 하고 그녀의 맘속 환타지의 세계가 판화로 복제되기도 한다. 허나 그녀의 계획은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로 거듭나기다. 코스프레는 고정된 수입이 없는 것이 흠이다. 잘 나갈 땐 학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적도 있지만 그것도 때에 따라 다르다.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는 한국의 게임 산업이 발전을 하면서 전문 인력이 몰리는 유망 직종이다. 코스프레를 하는데 경제적인 지원이 가능한 직업이기에 욕심을 내고 싶다는데. 코스프레와 카툰, 판화에서 얻은 영감으로 게임 일러스트레이터의 일인자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아무 욕망 없어 보이는 천진한 모습 속에 야무진 꿈이 숨어있다고 말하니,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선 언제나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강한 편이라고 수줍게 고백한다.

코스프레의 한계에 대해 묻자 그녀는 한국의 코스프레는 일본만큼 다양한 연령층을 확보하지 못한 10대에서 20대 수준의 코스프레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이런 현재의 상황을 충분히 극복해 낼 거라고. “제가 성장하는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려고 해요. 중년이 되면 중년층을 대표하는 캐릭터를 할 거구요.” 일본에 진출한다면 한국적인 캐릭터 명성왕후나 선덕여왕, 황진이 같은 역사 속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일본 진출이 기대된다.

코스프레는 변신 놀이다. 변신을 꿈꾸는 이유는 내 안에 무수한 타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나는 마녀가 될 수도 있고, 성녀가 될 수도 있다. 단순한 기분 전환을 넘어 스트레스 해소와 활력소, 설레임까지 안겨주는 생의 이벤트, 환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그런데 그녀는 “코스프레는 중독”이라고 말한다. 만화 속에서 튀어나와 복잡한 현실 속을 유유자적 걸어가는 그녀를 보노라면 그런 중독쯤 하나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02-23 11:40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