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 도심서 갈 곳을 잃다추위 피해 지하로, 비좁은 역사에 노숙자와 함께 뒤죽박죽

[이색지대 르포] 종로 3가 지하철역사 광장
노인들, 도심서 갈 곳을 잃다
추위 피해 지하로, 비좁은 역사에 노숙자와 함께 뒤죽박죽


겨울이라면 당연한 한파겠지만 2월의 시작과 함께 몰려든 칼바람은 너무나 매서웠다. 길게 뻗은 종로통에 부는 칼바람은 도시의 회색빛과 어우러져 더욱 황량하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위치한 노인들의 모임터인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90 종묘공원 광장까지 훵하니 비워 놓았다.

한겨울 칼바람을 피해 종묘공원 광장을 떠난 노인들이 모여드는 곳은 지하철 종로 3가 역사 광장. 본래는 한겨울에도 종묘공원에 모이는 노인이 상당수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 며칠 날씨가 너무 추운 까닭에 한꺼번에 지하철 역사로 몰려든 것이라고. ‘광장’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비좁은 역사 내부는 걷기가 힘들 정도로 노인들로 가득 들어차있다. 서울 시내 유일의 노인 휴식처인 종묘공원을 대신해 이곳을 찾은 노인 500여명이 그렇게 하루를 소일하고 있다.

1만2,700평이나 되는 넓은 종묘공원과 달리 매우 비좁은 역사 안에 모인 노인들의 모습은 질서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장기나 바둑을 두는 노인들과 토론을 벌이는 이들, 음주를 즐기는 이들 등이 나름대로의 영역으로 구분해 놓고 모이는 종묘공원과 달리 종로 3가 역사는 뒤죽박죽 섞여있는 모양세다.

장기·바둑·한담으로 소일
가장 확연히 눈에 띄는 이들은 장기 또는 바둑을 두는 이들이다. 벽면에 설치된 조각품인 육의전 앞쪽과 반대편 환승통로 쪽으로 군데군데 내기 장기나 바둑을 두는 노인들이 있고 훈수라도 둬보려고 모인 노인들이 무리지어 이를 관전하고 있다. 가끔 큰 소리가 오가기도 하지만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에이 참 그리 잘 두면 당신이 한번 둬보쇼”라며 훈수꾼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선수와 훈수꾼이 바뀌고 “참 잘 두십니다”라며 점잖게 패배를 인정하며 일어서는 노인도 있다.

내기 장기와 바둑이 한창인 가운데 기둥 주변에선 취기로 인해서인지 잠이 든 노인 몇몇이 매우 위태롭게 보였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지하철역인 까닭에 노숙자들도 종로 3가 역사 광장의 또 다른 주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소일삼아 나온 노인들 중간 중간에 노숙자로 보이는 이들도 여럿 눈에 띈다. 한 구석에는 팔려고 모은 것으로 보이는 폐지들이 산처럼 수북이 쌓여있다.

역사 광장의 양쪽으로 장기와 바둑이 한창이라면 그 중간에는 무리지어 모인 노인들은 시사적인 문제를 두고 목소리 높여 토론을 벌이고 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가장 큰 주제는 단연 정치였다. 호남권 출신으로 보이는 노인 몇몇이 모여서 현 정부의 지역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화두는 이해찬 총리의 ‘호남고속철 조기완공 곤란’ 발언.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노인이 “괜한 피해의식 아니냐”고 껴드는 바람에 이들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더 높이 올라간다.

기아차 노조의 취업비리를 두고 “노조 하는 것들은 다 잡아가야 한다”며 강한 목소리를 내는 노인들도 있고 불황의 책임을 노무현 대통령과 현 정부의 탓이라며 흥분하는 이도 있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박정희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을 칭송하며 그리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강하게 반발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이렇게 정치 관연 사안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곳에는 열 명 이상 의 많은 노인들이 모여든다. 그래서 종로3가 역사 광장을 가득 메운 노인들 가운데 열 명 이상 모여 있는 곳은 대부분 시사 토론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박카스 아줌마들 유혹의 손길
반면 서너 명 씩 모여 있는 노인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한명씩 끼어있는 50~60대 여성 노인들이 있다. 어떤 남성 노인은 여성 노인을 뒤에서 껴안은 채 다른 노인들과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 부부관계인 노인이 함께 이곳에 나와 친구들과 대화중인 것일까.

이런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방금 그들 사이에 있던 여성 노인은 잠시 후 혼자 역사 광장 이곳저곳을 혼자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다른 남성 노인 한명과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그네들 무리 사이에 끼어든다.

소위 말하는 ‘박카스 아줌마’인 셈. 1~2만원의 저렴한 봉사료를 받고 노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박카스 아줌마 여럿이 종로 3가 역사 광장의 또 다른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그만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역사 광장의 사진을 찍는 기자를 제재하고 나선 이 역시 그들 가운데 한명이었다. 한 50대 여성이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 다가와 “사진 찍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 나오면 안된다”고 얘기한 것.

역사 광장 한쪽 구석에 위치한 구멍가게와 자판기가 이곳의 유일한 편의시설이다. 가게에서 500원짜리 빵을 구입해서 마실 것도 없이 이를 먹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선 자판기 커피를 들고 대화를 나누는 노인들이 서있다.

종묘공원에 비해 역사 광장의 가장 불편한 점은 흡연이 안된다는 것. 물론 무임승차 연령인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역사 출입은 무료승차권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것도 힘든데다 매번 무료승차권을 달라고 매표소에 가는 것이 멋쩍다”는 한 노인은 “그래서 그냥 참는다”고 얘기한다.

종로 3가 역사를 빠져나와 텅 빈 종묘공원으로 향한 기자는 이곳에서도 박카스 아줌마를 만날 수 있었다. 비좁은 역사 광장에서는 누군가와 눈에 맞아 여관으로 향하기가 어렵다는 게 주변 상인의 얘기. 그들을 필요로 하는 남성 노인 역시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역사 광장보다는 사람이 드문 종묘공원 주변에서 박카스 아줌마를 찾는 게 일반적이라고. 오히려 역사 안에 들어와 있는 박카스 아줌마들은 잠시 추위를 피하러 온 것에 불과하단다.

종묘공원 앞 인도를 걷는 50대 여성 세 명 역시 박카스 아줌마들로 보인다. 이 가운데 한 여성이 “아까 그 노인네는 돈이 2만원밖에 없다며 차비로 천원만 달라더라”고 얘기하자 다른 두 여성이 웃음보를 터뜨린다. 어렵게 말을 붙여봤지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 다만 “요즘에는 할아버지들이 연애할 용돈도 없는 것 같다”는 얘기만 들을 수 있었다. 불황이 노인들이라고 피해갈 리 없다. 아니 제일 먼저 불황의 한파를 접하는 이들이 바로 노인층이리라.

종묘공원 주변에서 노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포장마차였다. 닭똥집이 5,000원인 안주 값으로 미루어 볼 때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주는 한 병에 2,000원, 막걸리 역시 2,000원이다. 두셋 씩 테이블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노인들은 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격렬한 시사 토론 보다는 삶에 대한 한탄이 주를 이뤘다.

몇몇 포장마차를 돌아다니며 귀동냥을 해보니 가장 주로 등장하는 주제는 자식얘기, 특히 며느리 얘기였다. 며느리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불편함을 얘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한군데 노인들이 모여드는 곳은 가판, 그것도 가장 작고 형편없이 꾸려진 담배 파는 곳이었다. 가판에서 파는 담배는 소위 ‘대포담배.’ 시중가보다 500원가량 담배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인들은 주로 이곳에서 담배를 구입한다. 아예 보루채로 사가는 노인들이 상당수였다.

또한 뽕짝테이프, 돋보기안경 등 노인들의 시선을 끄는 상품들을 파는 가판도 여럿 눈에 띄었지만 추운 날씨 탓에 거리를 오가는 손님이 거의 없는지라 이를 구경하는 노인이 거의 없었다.

고령화 사회의 단면 들여다보여
종로 3가 일대에 몰려드는 수천 명의 노인들은 대부분 서울, 수원, 인천, 성남 등 수도권 지역에 사는 이들로 대부분 지하철 타고 이곳을 찾는다. 심지어 지방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이들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급속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한국 사회는 이제 노인 문제를 제대로 바라봐야 하는 할 시점에 다다랐다. 젊은 기자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에 의연한 그들의 저력은 인내와 끈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노인들에게 인내와 끈기만을 요구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입력시간 : 2005-02-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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