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원장 부정선거 시비가 발단, '금발협' 출범으로 한 지붕 두 가족

금융노조, 한심한 밥그릇 싸움
위원장 부정선거 시비가 발단, '금발협' 출범으로 한 지붕 두 가족

금융노조 김기준 위원장.

“금융노조가 깨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만든 노조인데…, 그리 쉽게 깰 수야 없죠.”(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지부의 한 간부)

한국노총 산하 최대 산별 조직인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의 불안한 행보에 노동계 안팎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깨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주된 관심사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금융노조 내부의 심각한 갈등의 불씨가 좀처럼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금융노조는 ‘한 지붕 두 가족’의 어색한 공존 상태다. 한 쪽은 3월 공식 출범한 신임 김기준 위원장 체제의 집행부이고, 다른 쪽은 김 위원장 체제에 불만을 가진 지부 위원장들의 모임인 금융산업노조발전협의회(금발협)다.

금융노조·금발협 불신의 골 깊어
양측 모두 표면적으로는 ‘함께 간다’는 원칙론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원칙보다 감정이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노조가 이처럼 깨질지도 모를 상황을 맞게 된 발단은 1월 19일 실시된 위원장 선거다. 당시 선거는 8만 여명의 조합원이 직접 투표권을 행사한 첫번째 직선인 데다 인터넷 전자 투표를 최초로 시도하는 등 금융노조로선 여러 모로 의미가 큰 행사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새로운 시도가 그만 불행의 씨앗이 됐다. 원활하고 공정한 선거 진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전산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킨 것. 이로 인해 금융노조 선거관리위원회는 부랴부랴 투표 진행을 수기(手記) 방식으로 바꾸는 등 혼선을 빚었고, 그런 와중에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는 지경까지 사태가 악화했다.

당시 김기준 후보 측은 우리은행 투표함 개봉 과정에서 투표 용지 상당수가 묶음으로 돼 있는데다 대부분이 상대인 양병민 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나자 ‘투표 결과 조작’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금융노조 산하 지부 중 선거인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우리은행 지부는 선거 전부터 양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우리은행 지부 측은 이에 대해 “조합원들이 투표 용지를 묶음으로 정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정 선거는 없었다”고 해명했으나, 김 후보 진영은 18개 금융기관 노조 위원장들과 공동 명의로 발표한 성명서에서 “선거가 불법과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개표 작업은 중단됐고, 사태 해결 실마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2월 28일 열린 금융노조 중앙위원회에서 국면 전환 계기가 어렵사리 마련됐다. 중앙위원회는 기존 선관위가 사퇴하고 새롭게 구성된 선관위가 개표를 진행한다는 등의 해결책을 내놓았고, 김 후보와 양 후보 측은 이를 수용했다.

1월11일 은행연합회 회의실에서 19일 투표를 앞두고 위원장과 임원 후보들이 정책토론을 벌이고 있다.

새 선관위는 3월 4일 개표 작업을 마무리 짓고 김기준 후보가 신임 위원장으로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김 후보는 유효 투표 수 6만8,000여 표 가운데 3만6,765표를 획득해 3만1,234표를 얻은 양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눌렀다.

이로써 40여일 간의 파행을 겪은 금융노조 선거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한 번 파인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3월 24일 열린 위원장 이ㆍ취임식에 양 후보를 지지했던 세력이 대거 불참해 반쪽짜리 출정식이 됐는가 하면, 3월 30일에는 서울은행 지부가 투표함 폐기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도 했다. 개표 결과를 여전히 수긍하지 못한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이런 가운데 4월초 금발협이 발족, 노동계 안팎에서는 금융노조가 둘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금발협(의장ㆍ마호웅 우리은행 지부 위원장)은 우리은행을 비롯해 신한ㆍ서울ㆍ산업은행 등 위원장 선거에서 양병민 후보를 지지했던 13개 지부의 위원장들로 구성돼 있다. 전체 37개 지부 가운데 40%에 달한다.

금발협 측은 금융노조의 양분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우리은행 지부관계자는 갚鵬협웰엽鳧떨陸뗌?화합과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친목 단체”라며 “마 의장의 생각도 절대 금융노조를 쪼갤 수는 없다는 쪽”이라고 밝혔다. 또 “금발협은 김 위원장 측에 선거 과정의 갈등 극복, 전체 조합원들의 화합 방안, 우리은행 지부의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고 있다”며 “집행부 구성이나 임ㆍ단협 교섭권의 지부 위임 등도 주요 관심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금융노조 측도 마찬가지다. 대화의 창구는 언제든 열려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 김 위원장은 마 의장 등 금발협 인사들과 여러 차례 물밑 접촉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측이 화해의 악수를 언제 나눌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선거 과정에서 생긴 갈등의 골이 워낙 깊기 때문이다.

이강선 금융노조 부위원장은 “금발협이 ‘화합 방안을 알아서 내놓으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정확한 요구 사항이 뭔지 몰라 답답한 상황”이라며 “양 후보를 지도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집행부도 금발협 측에 개방하는 등 화합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양분 사태 장기화, 조합원 냉소적 반응
선거 과정에서 비롯된 금융노조 양분 사태가 장기화하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구조조정, 비 정규직, 근무여건 악화 등 중대 현안이 산적한데도 적절히 대응하기는커녕 밥 그릇 싸움으로 날을 새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장에서는 냉소마저 보이고 있다.

한 시중은행 대리는 “요즘 일선에서는 근무 여건이 날로 악화하고 있는데 노조 지도부는 ‘정치 놀음’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며 “솔직히 금융노조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노동계 우려도 적지 않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금융노조 선거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많은 조합원들이 자신과는 관계 없는 일로 여기는 모습이 나타났다”면서 “이처럼 상부와 조합원들 간의 심각한 괴리가 큰 문제”라고 안타까워했다.

은행 뿐 아니라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날로 격화하고 있는 ‘은행 전쟁’ 시대에 금융노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현장과의 긴밀한 연대라는 지적이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5-05-04 14:21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