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순수 민족자본에 의해 창학한 최초의 민간사학손기정·이희승 등 민족 자존심 드높인 걸출한 인재 배출

양정중·고 창학 100년, 또다른 100년을 준비하는 養心正己
구한말 순수 민족자본에 의해 창학한 최초의 민간사학
손기정·이희승 등 민족 자존심 드높인 걸출한 인재 배출


목동 양정고 기념도서관.

“난세의 시기에 민족사학으로 출발한 양정고의 역사는 한국 중등교육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양정고는 민족사학의 전통과 공교육의 이념을 합쳐 명문 사립 중등학교로 정체성과 독자성을 확립해야 하는 향후 과제를 안고 있다.”

5월 10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관에서 개최된 ‘양정고 창학 100주년 기념 국제 교육포럼’. 우용제 서울대 교수는 ‘한국에서의 민립사학의 성립과 세계의 중등사학’이라는 기조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근대 교육이 도입된 지 한 세기가 훌쩍 넘은 가운데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중등사학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1905년 5월 12일 ‘양정의숙’으로 출범한 양정중ㆍ고등학교(교장 엄규백ㆍ서울 양천구 목동)도 그런 경우다.

엄규백 교장(가운데)이 양정고등학교 10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프랭크 밸리어 캐나다 셔우드 중학교 교장(왼쪽), 존 서튼 전 영국 중등교장협회 사무총장(오른쪽) 등과 얘기하고 있다.

민족자립적 성격 강했던 학풍
구한말의 엄혹한 시절 ‘양심정기(養心正己ㆍ몸과 마음을 바르게 기른다)’라는 창학 이념 아래, 엄주익 선생이 세운 양정중ㆍ고(당시 양정의숙)는 순수 민간자본에 의한 최초의 민간사학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곳곳에서 문을 연 학교들이 선교사 등에 의해 설립돼 종교적 색채가 드리워져 있었던 데 비해 양정의숙은 민족 자립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법률학을 가르치는 3년제 학교로 출범한 양정의숙은 개교 직후인 1907년 심각한 재정난을 맞기도 했으나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가 토지 200만평을 기증한 덕택에 위기를 넘겼다.

일제 강점기에는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교육령이라는 명분으로 법률학과와 경제학과를 강제 폐지한 후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ㆍ고교)로 학교 등급을 강등시킨 것이다. 기준 미달의 시설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실질적인 탄압 사유였다.

창학 이념의 바탕에 민족 자각의 정신이 깔려 있었던 양정의숙으로서는 어쩌면 불가피한 고난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양정고보로 바뀐 뒤에도 교육을 통한 구국이라는 학풍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동문들이 줄기차게 근세사 각 분야의 걸출한 인물로 두각을 나타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국문학자 이희승(1913년 양정의숙 졸), 아동문학가 윤석중(14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21회) 등이 일제 치하 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인 대표적 양정 동문들이다.

양정 동문들 누구에게나 애국애족의 정신을 선양한 선배들의 기상은 가슴 뿌듯한 자랑이다. 양정창학100주년 기념사업회 소식지에 실린 동문들의 회고를 보면 그런 감정들이 물씬 묻어난다.

정형기 동문(39회ㆍ㈜라성 회장)이 4월에 나온 소식지 11호에서 밝힌 추억 속 장면은 좋은 예다.

양정의숙 1회 졸업생들. 홍인기 기자

“1950년 4월 함기용(34회) 선배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돌아왔을 때였어요. 그때 우리나라 선수가 1ㆍ2ㆍ3등을 휩쓸었지요. 운동장【?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환영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손기정 선배도 동석했지요. 두 명의 영웅을 양정의 한 운동장에서 마주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웠어요. 더구나 함기용 선배는 독립된 나라, 우리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해서 얻어낸 우승이었으니 얼마나 벅찬 감격이었겠어요.”

정 동문은 자신이 입학하던 무렵 양정의 위상에 대해서도 생생히 기억해낸다. “각 지방의 우수한 인재들이 선망하는 학교가 양정이었죠. 민족주의적 선각들이 세운 민립사학 양정에 대한 높은 평판이 형성돼 있었는데, 지방 유지들이 자녀들을 양정에 보내고 싶어했어요.”

양정이 지금의 중ㆍ고교 체제로 개편된 것은 1953년. 이후 양정은 4ㆍ19혁명 등 현대사의 굴곡 고비고비에도 나름대로의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교정을 떠난 5만여명의 양정 동문들은 사회 곳곳에서 든든한 동량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양정고 총동창회(회장ㆍ고인경)는 100주년 기념식에서 학교가 배출한 자랑스런 동문 21명을 ‘양정의 얼굴’로 선정하기도 했다(박스 기사 참조).

3월 25일 인천공항에서는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깃발을 꽂기 위해 ‘양정인 원정대’가 장도에 올랐다. 창학 100주년의 영광을 안기까지 겪었던 험난한 여정을 되짚어봄과 동시에 선배들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을 되새기자는 양정인 모두의 뜻이 담긴 행사다. 1937년 출범한 한국 최초의 고교 산악부를 갖고 있을 만큼 양정인은 산과 가깝다. 예정대로라면 원정대는 5월 16일 에베레스트산 정상 정복을 시도하게 된다.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100년
양정의 도전정신은 정작 학교에서 더욱 꿈틀대고 있다. 100주년을 맞아 이 학교는 ‘바르게 100년 세계로 100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었다. 걸어온 100년의 발자취가 한반도에 머물렀다면, 앞으로 걸어갈 100년은 세계를 지향한다는 목표 의식을 담았다.

구체적인 교육 방침은 정보화와 세계화를 통한 21세기 인재 육성에 맞춰졌다. 외국 학교들과의 교류 확대와 교육 프로그램 공유 등 실질적인 계획도 이미 세워 놓았다.

우선 인터넷을 교육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사이버 스쿨’을 내년부터 가동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학생과 교사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해외 명문 학교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어학교육 강화를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추가로 마련되고 외국 학교들과의 학생 교류도 확대 실시된다.

학교 설립자 엄주익 선생의 장손인 엄규백 교장은 “지난 100년 동안 민족에 헌신하는 인재를 길러 왔다면 앞으로 100년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인재를 길러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100년 사학’ 양정의 새로운 세기가 막 개막됐다.

'양정의 얼굴' 21인

(왼쪽부터) 손기정, 윤석중, 홍일식, 서옹, 강신호

양정창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창학 100주년 기념일인 12일 학교 발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동문 21명을 선정, 발표했다. 선정위원회는 100년 양정 역사에서 학교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은 동문 출신 인사들 가운데 '양정의 얼굴 21인'을 엄선했으며, 이날 기념식장에서 양정의 얼굴 기념패를 당사자 또는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이번에 선정된 21명은 우리 사회 다방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한 인사들로, 일반에 잘 알려진 인물들이 적지 않다. 일제 치하의 설움을 씻어낸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 옹, 현재 경제계 수장으로 활동 중인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양정의 얼굴 21인은 새로 건립될 양정창학 100주년 기념관에도 현양돼, 양정인의 자긍심을 높여주게 된다. 이들의 업적 또한 100주년 기념관에 영구 보존될 예정이다.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또 옛 만리동 교사를 지금의 목동 교정으로 이전하는 사업과 만리동 교사 손기정 체육기념공원화에 기여한 염보현 전 서울시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1973년 부임 후 30여년 동안 학교를 이끌어온 엄규백 교장에게도 공로패를 수여했다. 양정의 얼굴 21인에 선정된 동문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졸업 횟수와 주요 경력).

안희제(양정의숙 졸, 독립운동가, 중외일보 사장), 박상진(양정의숙 졸, 대한광복회 초대 총사령), 김진섭(4회, 수필가, 서울대 교수), 김현철(3회, 대한민국 내각수반), 진헌식(7회, 제헌국회의원), 배정현(11회, 대법관), 유달영(17회, 재건국민운동본부장), 서옹(16회,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장덕창(3회, 공군참모총장), 손기정(2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강신호(30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홍일식(38회, 고려대 총장), 박병래(7회, 보건부 장관, 성모병원장), 김기령(12회, 연세대학교 의대 교수, 세계이비인후과 학회 고문), 손재형(9회, 서예가, 한국예총 회장), 이병규(2회, 화가, 국전심사위원장), 장욱진(23회, 화가, 서울대 미대 교수), 송범(29회, 국립무용단 단장), 박진(7회, 국립극단 단장), 윤석중(14회, 아동문학가), 김영상(21회, 동아일보 편집국장, 서울600년사 편찬위원장)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5-05-19 14:14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