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10·26을 혁명이라 기록할 것"의연함 잃지 않으려 애써… "나무 묘비에 '의사 김재규 장군'이라 써달라" 당부

김재규 사형 25년, 옥중면담록 최초 공개
"역사는 10·26을 혁명이라 기록할 것"
의연함 잃지 않으려 애써… "나무 묘비에 '의사 김재규 장군'이라 써달라" 당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씨가 다시 화제다. 작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변정수)에서 유공자 적격 논란을 불러온데 이어 1979년 10월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납치, 살해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ㆍ오충일)가 5월 26일 발표하면서다.

김재규는 10ㆍ26 사태 이듬해인 5월 24일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4일만에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국일보>는 김재규가 수감돼 있던 육군교도소로 면회 온 가족들과 변호사와의 대화 내용을 적은 ‘옥중면담록’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1979년 12월부터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까지 총 245쪽의 면담록에는 ‘수감자 접견동향 보고’또는 ‘특정 수감자 접견동향 보고’라는 제목과 함께 날짜와 면회자, 면회 시간 등이 적혀 있으며 접견동향과 대화 내용이 타이프로 인쇄돼 있다.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해 공개한다.

"내 행동은 민주주의 회복위한 투쟁"
- 79년 12월29일 오전 9시45분 김재규를 찾아온 변호사와 공판절차를 논하면서 6ㆍ3사태가 일어났을 때 혁명을 하라고 격려한 사람을 비밀로 해왔으나 2심에서 밝히겠다고 이야기했다.

- 80년 1월4일 오전 10시30분 김재규는 가족의 방문을 받았다. 모친은 박선호 및 박흥주 가족이 김의 집으로 찾아와 “너의 자식 때문에 내 자식이 죽게 되었다”고 소동을 벌인 사실을 전했다. 김은 “공교롭게도 10ㆍ26이 의사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이등박문 살해 날짜와 같다더라. 사내 대장부가 죽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먼 훗날 역사가들이 올바른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 80년 1월14일 오후 2시40분 김재규는 두 차레에 걸쳐 변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김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거사를 한 것이라며 부마사건에 대해 “금번 사건은 민란”이라고 건의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너희들의 정보수집이 부진하다”며 강경한 어조로 “앞으로 발포 명령도 불사하겠다”고 goTek.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는 반체제 인물들을 300만 명 죽였는데 몇 백 명 죽이는 것은 문제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 80년 1월18일 오후 1시30분, 오후 4시35분. 김재규 가족과 변호사가 방문했다. 김은 박 대통령의 명복을 빌어달라며 “불교성전을 1년만 빨리 보았다면 대통령을 죽이지 않고 사직을 고하면서 정치를 바로 하라고 직언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수경사내 보안사팀이 도청을 한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윤필용 장군의 옷을 벗기려 했는데 수도권 60km내 전 부대를 대상으로 감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해 대통령의 오해를 풀었다.

김재규가 남긴 옥중 면담록

- 80년 1월19일 오전 8시40분 김재규는 변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김은 자신의 행동을 자유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투쟁이라고 자평하며 “나를 처벌하면 이 나라에 혼란이 온다. 김주일이라는 학생 하나를 죽여 4ㆍ19가 일어났는데 나라의 장관을 지낸 나를 죽이면 학생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이야기했다.

- 80년 1월21일 오후 4시15분 김재규는 국방부 검찰관의 방문을 받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관련여부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김은 “정승화를 올가미 씌우는 것은 역사상으로, 국제적으로 곤란하다”며 “정승화가 관련이 있다면 내 명예를 위해서라도 ‘동지’라고 얘기 하겠다”고 말했다.

- 80년 1월23일 오후 3시30분 김재규는 변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10ㆍ26 사태에 관여한 부하들이 중형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변호사에게 부탁했다. 항소 보충서에는 주로 박정희 정권의 정치탄압을 거론했다. 야당 국회의원 전부에 대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할 준비를 다해 놓고 실행하지 않아 수차례 걸쳐 욕을 먹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목숨을 걸고 공명선거를 해 신민당이 이겼고 그 일로 공화당 실세가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 박 대통령에게 스스로 유서를 쓰고 자결하게 해달라고 제안하고 정부가 처벌하면 4ㆍ19와 같은 국민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 80년 1월25일 오후 4시25분 김재규는 변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재산포기서 작성 때 고문받은 사항과 부마사태를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김은 부마사태를 체제도전, 현 정부에 대한 불신임, 물가고, 조세에 대한 불만이라고 보고 “부마사태는 민란이니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하자 대통령이

- 80년 1월28일 오전 9시15분 김재규는 변호사들의 방문을 받고 특별한 이야기를 했다. 박 대통령 자제에 관한 부분으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구국여성봉사단과의 관계, 그리고 박지만씨의 사생활에 관한 사항이다. 김은 본래 진술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진술을 한다며 변호사에게 서면으로만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 80년 2월15일 오후 4시30분 김재규는 변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종교 4개단체에서 게엄사령관에게 김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탄원서를 냈다. 김은 국민 여론을 유도하고 사실을 밝여야 한다며 메모해 둔 박 대통령의 여자관계 등을 이야기 했다. 재야인사 장준하가 정치적으로 살해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김대중이가 제일 강적이다"
- 80년 2월26일 오후 4시25분 김재규는 변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김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등 70건의 위법사실과 관련해 “글라이스턴 미국 대사 등의 압력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에 대한 평가에 대해 “여당에서는 최규하와 태완선 등이 괜찮고 야당에서는 김영삼이가 괜찮지만 김대중이가 제일 강적이다. 모르겠지만 대통령 선거를 한다면 여당이 힘들 것이다”.

김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에 대해 “알고 있지만 말은 안 하겠다”면서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의 관여 여부에 대해 “거기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하겠다. 했다고 하면 군대가 가담하지 않았겠나”고 말했다.

- 80년 5월20일 오전10시45분 김재규는 여동생 등 친척들의 방문을 받았다. 김은 진행 중인 대법원 선고 결과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심취한 불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회원들이 5월 24일 경기도 광주 삼성공원묘지에서 25주기 추도식을 하고 있다.

- 오후1시35분 변호사들이 찾아와 사형이 선고된 과정을 들려줬으며, 김은 부하들과 국민에게 전할 당부의 말을 남겼다. 김은 “자유를 회복시킨 것은 진리를 회복시킨 것이니 죽을 때에는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0ㆍ26혁명 만세만은 부르고 가자. 지금은 10ㆍ26사태라고 하지만 앞으로는 10ㆍ26혁명이라고 부를 것이고, 이를 연구하는 분들은 나의 최후진술을 참고 하게 될 것이다. 국민에게 자유가 떠나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말을 신문 등을 통해 발표해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 80년 5월22일 오전10시30분 부인과 여동생들이 찾아왔다. 김재규는 반야심경과 천수경전문을 5분간 읽어줬고 가족들은 합장한 자세로 눈물을 흘렸다. 김은 “우리는 유(有)로 생겼다가 무(無)로 돌아가니 내가 가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 3심은 끝났지만 4심은 하늘이 하는 것이다. 하늘의 심판에는 (내가) 이길 것이다”고 말했다.

- 오후 3시55분 김의 어머니 권모 씨와 동생이 면회를 왔다. 모자간의 마지막 만남이다. 권 씨는 “마음을 편안히 생각하고 당황하지 말아라. 괴로울 때는 관세음보살을 찾아라. 여기(교도소)에 일하는 사람과도 다 인연이라고 생각해라. 후세에는 만나게 돼 있다”고 말했다. 김은 접견실에 비치된 군용 담요를 깔고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세 번했다.

- 80년 5월23일 오전10시25분 형 집행 바로 전날 김은 동서와 처남 등에게 사형 집행이 가까워진 것을 예감한 듯 유언을 남겼다. 김은 “내가 죽거든 군복인 동정복에 계급장을 붙이고 근정훈장을 달아라. 검은 양말과 구두를 신기고 오른 손에는 상아 지휘봉을, 왼손에는 약력을 창호지에 적어 넣어 달라.

나무로 묘비를 세우되 장군이란 호칭을 붙여 ‘의사 김재규 장군 지─?箚?하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사형되면 국민 감정이 돌아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내 죽음이 결정적 모멘트가 될 것이다.

- 오전11시25분 김은 동생과 조카 등의 접견을 받았다. 김은 조카에게 “우리 족보를 보면 아들이 없어 양자를 입적한 예가 많았고, 내 대에도 그렇게 해야겠다.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큰아버지에게 큰절을 해라”고 말했다.

김은 이어 접견실 바닥에서 큰절을 한 조카의 팔을 잡고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그의 생에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6-02 15:29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