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군인에 짓밟힌 민주주의 시발점4·19는 미완의 혁명, 5·16쿠데타 없었으면 민주당 정권 혼란 수습 했을것

4·19 주역 노흥권 씨의 '그때 그 순간'
정치군인에 짓밟힌 민주주의 시발점
4·19는 미완의 혁명, 5·16쿠데타 없었으면 민주당 정권 혼란 수습 했을것


1960년 5월 2일자 '라이프'지에 실린 4·19 시위관련 기사와 사진. 원내가 노흥권 씨.

일제시대 순사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일단의 경찰들이 몽둥이로 학생들을 후려치는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한 때는 지난 4월. 신문사 자료실에서 4ㆍ19 화보집을 한장 한장 넘기고 있을 때였다. ‘무엇이 이 학생들로 하여금 길거리로 뛰쳐나오게 했을까’, ‘무슨 힘이 이들을 몽둥이에도 굴하지 않고 움직이게 했을까.’ 사진은 이 같은 궁금증들을 불러 일으켰다.

시선은 이내 사진 한가운데 베레모를 쓴 사내에게로 고정되었다. ‘누굴까’, ‘아직 살아 있을까’, ‘생존해 있다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그를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만약, 그렇게 되기라도 한다면 4ㆍ19 당시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들려줄 수 있을 것이고 또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 얘기도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그 베레모 사내를 찾아냈다. 당시 서울대학교 58학번(사학과 3년)으로 문리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노흥권(66) 씨가 그 주인공. “자칫 무용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껏 사석이나 공석에서, 그 누구에게도 당시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며 연신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를 서울 서대문 인근의 커피숍과 한국일보 자료실, 4ㆍ19혁명기념관 등에서 세 차례에 걸쳐 만났다. 45년 전에 인화된 흑백 사진에 대해 그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경찰 저지선을 뚫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로선 정말 과감한 행동이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거리로 내몰았는지 모르겠어요. 정의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정의감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강의실 밖으로 튀어 나가서 경찰 저지선과 최초로 부딪혔다. “밖으로 나왔는데, 모르는 얼굴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들 모두가 사복 경찰처럼 보이고, 무술경관처럼 보였습니다. 아주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누가 하나 앞으로 나서기만을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제 자신조차도 그랬으니깐요.”

그는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 자신이 어깨동무를 한 대열의 중심이 돼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김정강’이라는 이름의 친구를 오른쪽에 끼고 “자, 가자”고 하자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사진도 경찰 저지선을 유일하게 뚫고 나간 그와 몇몇이 이 경찰들과 충돌한 장면이 카메라 기자에게 잡힌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후 문리대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단과대 학생들이 합류한 무리는 결국 세종로의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다. 원남로터리, 종로 4가, 청계천, 광교를 지나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한 때는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 “3~4차례 경찰 저지선을 넘었는데 국회(당시 부민관) 앞은 의외로 수월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없었죠. 우리들은 한 동안 ‘3ㆍ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뒤를 보니까 그 넓은 세종로가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이 날이 있기 하루 전인 4월 18일, 국회 앞에서 자유당 정권을 향해 한바탕 시위를 치르고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들의 뒤를 ‘정치깡패’들이 종로 4가에서 습격한 일로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학생들만 정권의 횡포에 분개한 게 아니었다. “너희 학교 학생들의 동태가 어떠냐, 내일 시위에 나갈 거냐. 깡패들이 저렇게 득실대는데 무슨 득이 있을 거 같냐고 아버지가 물어보시기에, ‘그래도 의사 표시는 해야겠습니다’고 했더니 ‘위험하다, 조심해라’고만 할 정도였습니다. 부모라면 자식이 위험한 데 간다는데 말려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이 정도로 얘기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민심이었다는 얘기다.

세종로를 꽉 채운 인파에 한층 고무된 그는 12시 반 즈음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가자’고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경복궁 옆 효자동 저지선은 다른 저지선과 달랐다. 몽둥이를 든 경찰이 아니라 헌병들이 칼빈 소총을 시위대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간격을 유지하고 국회 앞에서 외치던 구호들을 총구 앞에서 계속 외쳤다. “1시 반 정도 됐을 겁니다. 갈증이 나서 인근 주택에 들어가 물을 좀 얻어 마실 요량으로 잠시 옆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콩 볶는 소리 같은 게 요란하게 나는 겁니다. 헌병들이 발포한 거였죠.”

다시 사진을 집어 든 그는 또 다른 사실 하나를 풀어놓았다. 이 사진이 미국의 ‘라이프(LIFE)’지에 크게 실린 것이다. 라이프지는 타임지 등과 어깨를 겨누며 당시 세계적으로 700만부가 발행될 정도로 인기를 끌던 사진ㆍ화보 전문 잡지다. “시위 후 한 열흘정도 지났을까요. 친구들이 ‘야, 네가 라이프에 나왔어’ 하더라고요. 보니까 제가 한가운데 서 있더군요.” 또 그 뒤에 확인 한 것이지만, 당시 인텔리들이 즐겨보던 ‘사상계’에도 비슷한 각도에서 촬영된 사진이 실렸다.

이후 민주당이 집권한 한국사회는 외견상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사회주의 정당이 창당될 정도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백가쟁명 식의 논쟁이 일던 당시를 떠올렸다.

전두환 대위와의 만남
“이렇게 사회가 혼잡한 것도 민주주의의 시작인데, 이걸 참지 못하고 군인들이 나선 게 5ㆍ16 쿠테타입니다.” 그는 당시 군인들의 단순했던 사고방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4ㆍ19 이듬해인 1961년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윤번으로 맡던 총학생회장을 문리대가 맡게 돼 그가 총학생회장을 하고 있을 때의 일로, 이야기의 시점은 1년 후로 옮아갔다.

“ 5ㆍ16 쿠테타가 난 지 4~5일 정도 지났는데 총장실에서 학생회장을 찾는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곧장 달려갔죠. 그런데 총장은 안 계시고 비서실장이 나서더니 ‘이분들이랑 인사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접견실에 군인 셋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한테 인사를 하라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둘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둘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 학군단(ROTC) 생도들을 교육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위탁교육을 받으러 들어온 김성진과 김복동(노태우 처 김옥숙의 오빠)이었다.

“그 둘이야 2년 동안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도의 인사는 했는데, 거기서 처음 보는 육군 대위가 ‘지금 사회가 얼마나 부정부패하고 혼란하냐’고 대뜸 묻는 거예요.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 그냥 있으니까 제 뒤에 총장실로 온 법대회장 이하우에게도 대놓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하고 지목해서 물었습니다.” 머리 숱도 적고 목소리에 친근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공격적인 태도의 대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에 알고 보니 전두환이었다고 했다.

쿠테타가 일어난 판이니까, 모든 군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대꾸도 않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너, 그럼 동의한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민주당이 집권하고 그 같이 복잡한 논리의 시대에 그렇게 단순한 질문으로 답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단순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후 동의한 것으로 판단한 전두환은 요구 조건을 얘기했다. “‘이 같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군인이 등장했다. 육사 생도들이 시가행진을 했는데, 너희들도 군사 혁명을 지지하는 그런 종류의 뭐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특유의 목소리와 인상에 얼마나 위축됐던지, ‘싫다’ , ‘못하겠다’ 등의 얘기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서 대답할 사안이 아니다”며 답을 미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당장 각 단과대 학생회장을 소집해서 결정해 달라고 했다. 겁이 나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는 평소 학교 캠퍼스에서 부딪히는 외신 기자들이 5ㆍ16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는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하던 터라,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 결국, 이튿날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으로 각 대학 단과대학회장 70여명이 모여 둘러 앉는다.

“‘군인들이 5ㆍ16의 불가피성을 이야기 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다들 입 꼭 다물고 있었죠. 말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도 있었기 때?訣?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저 뒤에 있던 한 학생이 ‘너희들이 뭔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거냐, 이거 누가 시켰어’ 했죠. 이게 시발점이 돼 여기서 이런 논쟁은 그만 두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전두환 일행은 소기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하고 자릴 떴습니다.”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논의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었다.

4·19 기념행사 하는 쿠데타세력 이해 못해
이후 군사 정부에 의한 4ㆍ19기념행사를 두고 노흥권 씨는 또 한번 혼돈을 겪기도 했다. “저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 4ㆍ19를 일으켰는데, 군인들은 이 때문에 세상이 혼란하다며 쿠데타를 일으켜 놓고 기념행사를 하는 건 무슨 논리입니까.”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합리화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쉬워했다. “민주주의 사회란 모든 이해 집단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사회 아닙니까. 모든 이해관계의 주장들을 취합해서 토론하고, 걸러서 하나의 국가적인 대안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훈련된 행정가가 많았다면, 4ㆍ19이후 세상은 혼란스럽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군사정권의 출현도 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 때 교육 받은 관료들이 대부분 관직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그는 나름대로 분석했다.

“5ㆍ16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맞지 않은 얘깁니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4ㆍ19후 민주당 정권에게 좀 더 시간을 주고, 당시의 행정 관료들을 좀더 교육, 훈련시켜 각 분야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줄 아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했다면 오늘의 모습은 지금과 또 달랐을 것입니다.” 4ㆍ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정민승 기자


입력시간 : 2005-06-30 19:45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