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2% 갈증 운병같은 여행으로 채우다생에 대한 넘치는 확신…21세기형 젊은 예술가

[감성 25시] 아티스트 박태성
예술에 대한 2% 갈증 운병같은 여행으로 채우다
생에 대한 넘치는 확신…21세기형 젊은 예술가


살바도르 해변에서. 오른쪽 끝이 박태성 씨

“왜 고생을 사서 하냐구요? 젊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세상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으니까요.”

2003년 스물 다섯이었던 박태성은 450여 일간의 세계 여행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본토비 프로젝트팀에 합류해 세계문화 예술의 아트로드(art road)를 구축하고 돌아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떠났다. 젊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현재의 편안함과 보장된 미래가 주는 유혹을 멀리하고 바리 바리 싸 들고 갈 짐 없이 장구, 꽹과리, 공연 의상만을 단촐하게 들고 비행기에 오르는 그를 보고 그의 떠남은 ‘도주(逃走)’라고 정의했다.

19세기 유랑극단이나 조선시대 남사당패의 피가 끓고 있는 것일까.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어쩌면 그의 사주엔 역마살이 씌워있을지 모른다고 단정도 했다. ‘정주(定住)’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 쪽에 살짝 손 들어주며 말이다.

2005년 여름,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그는 마치 도를 닦고 온 수도승처럼, 혹은 종교를 전파하러 멀리 이국땅에 다녀온 선교사처럼,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한다. “제가 떠난 건 운명이었어요. 완벽한 선택을 통해 사랑과 중용이란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거 같아요.” 그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을까. 30여 개국을 여행하는 동안 검게 그을린 피부, 다부진 입술이 그를 더욱 확신에 차보이게 만들었다. 매서워 보이기는 하지만 맑은 눈빛은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스물 일곱 살의 그를 나는 21세기형 젊은 예술가라 부르기로 했다.

중앙대학교 연극과 4학년 박태성(27). 한 학기를 못 채우고 여행을 떠났기에 사람들은 그를 만년 4학년이라고 부른다. 귀국한지 2주째다. 서울의 바뀐 버스 노선엔 하루 만에 적응했다. 여행의 후유증을 느낄 시간 조차 없다. 귀국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요청해오는 인터뷰와 본토비 프로젝트 2기에 대한 무성한 가상 시나리오, 공연 섭외로 정신 없이 몇 주를 보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유성균 연출의 ‘민달팽이의 노래’다.(국립극장 별오름 극장 7/15~8/24) 영국에서 우연히 만난 연출가 유성균씨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샜다. 생각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서로에게 호감이 갔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 가면 꼭 함께 공연하자고 약속했다. 그 인연으로 공연 연습이 한창인 지금 박태성은 중간에 투입된 경우다. 그의 역할은 퍼포먼스다.

“무대에 오를 때가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가는 시간 같아요. 오자마자 내 삶에 집중할 수 있는 무대가 있어 신나게 연습하고 있어요.”일년 넘게 세계를 무대로 공연한 사람답지 않게 그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더군다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무척이나 平置蠻낫? 계획도 창창하다. 배우로만 머물러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떠나기 전부터 고민했던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이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갔을 때 탱고 춤을 추는 비앙코라는 예술가에게 물었어요. 탱고가 무엇이라고 생▤毬캅? 그가 저에게 되묻더군요. 당신은 장미의 향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말이죠.”

세계를 돌아다니며 알게 된 예술가 친구들이 그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었다.“사향 1mg은 7,000년 동안 항기를 내고 리타늄 1mg은 7,000년 동안 빛을 발한다고 했는데, 배우로서 깊은 향을 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때문에 사람도, 일도, 사랑도 포기했다.

2003년 대학로 김동수 플레이 하우스에서 ‘우동 한 그릇’이란 연극을 할 때였다. 그는 공연 내내 좌절감과 패배감을 안고 무대에 으0?했다. 유독 예민했던 탓이기도 했지만 배우라면 한번쯤 느끼게 되는 자의식이기도 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우는 거라지만, 전 그 꽃이란 존재조차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었어요. 자신이 방황하는 중간배기도 못 된다는 상실감이 커다랗게 다가온 거죠.”

두 달 장기공연은 성공리에 끝났다. 소극장 연극치곤 성공적인 흥행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한없이 작아졌다. “자유롭지 못했어요. 공연이 끝나면 제 존재는 한없이 작아져 조그맣게 훌쩍이며 떨고 있는 거예요.” 단지 무대에 오르는 것이 배우는 아니었다.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점점 현실에 안주해가는 자신이 싫어졌다. 자신을 향한 불신감이 밀려들었다.“예술가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어요. 그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죠. 세계를 돌며 공연하는 팀을 꾸리는데 남자 멤버가 필요하다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의 머리 속엔 먼 훗날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고 연극 무대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 것도 자유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예술이란 제도권 아래 우울하게 갇혀있는 배우의 모습이었다. 스타가 되기 위해 기획사의 전화를 기다리고, 성형을 하고, 몸을 만들어야 하는 수동적인 배우의 우울한 자화상 뿐이었다. 과감히 등지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세계로 향한 멀고도 긴 인생 공부를 위해서다.

본토비는 그렇게 결성되었다.Born To Be는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나 부와 명예를 얻었다는 의미와 예술의 자유를 얻기 위해 본토를 떠난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안산과 인덕원을 오가며 9개월간 동고동락하며 연습 했어요. 사물놀이와 즉흥 연극 연습을 했죠. 외국인들 앞에서 영남의 사물놀이와 모둠북 연주를 선보이기 위해 맹훈련을 했습니다.”

지구를 한바퀴 돌며 우리 문화를 세계인에게 선보이고 또 그네들의 전통문화를 함께 공유하자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공무도하가’ ‘구지가’ ‘가시리’ ‘적벽가’ ‘황조가’ 등 전통시가의 내용을 극화 시켰다. 어설픈 외국어보다 보편적인 감정인 사랑과 이별에 대한 주제로 즉흥연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 고유의 문화가 최고라는 것을 느꼈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국 문화, 우리의 공연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왔어요. 자부심도 느꼈구요.”

네팔의 권력 3위 안에 드는 무장경찰은 그들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하다며 한국말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 외국인도 있었다.

자기 자신의 한계와 싸우고, 내공을 쌓고 돌아오겠다는 처음의 약속도 지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얻었다.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그것이다.

그에게 예술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그가 다시 되묻는다. 난타가 예술이라 생각하십니까. 맞다면 그게 예술입니다. 당신 맘속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죠. 그리고 덧붙인다. “전 우리 엄마 된장 찌개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 안에 정신이 있어야죠.”

겨울쯤 홀로 뉴욕 여행을 떠난다는 그는 자유인이다. 무엇도 그를 구속하지 못하고 어떤 것에도 얽매일 것 같지 않은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을 보러 갈 예정이예요. 뉴욕을 제대로 체험하고 싶기도 하구요.” 세계 여행을 할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조언을 해줄 수 있단다. 마음속에 바람을 가득 품은 자들의 세계를 향한 ‘대 탈주’가 겨울쯤 시작될지 모르겠다. 그들은 21세기형 젊은 예술가들이다.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07-29 15:31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