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이천봉은 의구한데 사람 풍경은 예전같지 않구나"

은종윤·최인순 부부의 70년만에 다시 찾은 금강산
"일만 이천봉은 의구한데 사람 풍경은 예전같지 않구나"

1933년 보성고 금강산 수학여행 단체사진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70여년 만에 금강산을 다시 찾은 노부부는 길재(吉再)의 시조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은종윤(89ㆍ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사) 최인순(85)씨 부부가 아들 내외, 손자와 함께 ‘그리운 금강산’을 만나러 간 것은 8월 초.

각각 보성고와 동덕여고를 다니던 1933년과 1936년 금강산 수학여행 추억을 안고 있는 은씨 부부는 해방과 분단 이후 처음 3대가 함께 다시 금강산을 가슴에 품은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 비경을 다시 보는구나”며 며칠 째 밤잠을 설쳤던 노부부지만 “안타까운 주변 풍경 탓에 속도 많이 상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우선 노부부는 통일전망대를 통과해 달려가는 금강산 육로 관광 길가에 한여름 땡볕에도 불굴하고 50m 간격으로 빨간 깃발을 들고 늘어서 있는 앳된 병사들의 얼굴을 보고 가슴 아팠다. 환영 반 감시 반으로 동원된 듯 했다.

또 흐르는 냇물에 손 한번 담글 수 없고, 사진 한 번 맘놓고 못 찍게 하는 딱딱한 관광안내는 섭섭하기도 했다. 옛 추억을 찾으려 달려간 이 노부부를 맞은 금강산 인심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곳곳에서 부닥치는 ‘마음의 벽’ 탓에 예전의 추억을 되살리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그 무엇이 많았다.

물론 함께 간 아들(범수ㆍ48ㆍ한샘 이펙스 사장)과 손자(호ㆍ대학생) 등 3대의 금강산 여행 느낌은 세대 간의 간격만큼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산 위에서는 숨막히는 금강의 비경에 가슴을 적시고, 산 밑에서는 북녘 땅 사람들의 삶에 또 한 번 가슴을 적셨다고 입을 모은다.

17살 여고 4학년 때 금강산 수학여행을 다녀왔다는 최 할머니는 “그땐 진달래가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5월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한다.

그 시절 금강산 여행은 기차를 타고 철원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걸어서 장안사(6ㆍ25때 완전 소실), 명경대를 거쳐 금강산 여기저기를 두루 유람하는 것이었다.

최 할머니는 “5월 봄볕에 산을 오르면 땀이 흥건히 찰 만도 한데 비로봉에 오르니 얼음이 얼었더라”며 “예전엔 다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금강산을 구경해야 한다는 마음에 노인네들이 가마를 타고 산을 오르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최 할머니는 “비로봉에 오르니 거짓말 같이 펼쳐진 1만2,000봉의 절경에 한참동안 넋을 뺏겼으며, 사람 한 둘이 들고 나갈 크기의 금강문을 나서니 캄캄 절벽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또 “모두들 절벽에 걸쳐진 쇠 사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붙잡고 내려와 당도한 곳이 바로 생각만 해도 시원한 구룡폭포였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구룡폭포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해금강 삼일포와 총석정, 삼일사를 거쳐 내려오며 구비구비 숨겨진 비경에 친구들과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20리 가까이 이어진 해금강의 금빛 모래사장은 이번에 갔을 때도 옛 것 그대로였다.

요즘 금강산 관광에선 금강문을 통해 구룡폭포로 갈 수는 없다. 원래 금강산은 22개의 등산 코스가 있지만 현재 북에서 개방한 곳은 4곳 뿐이다.

최 할머니가 70년 전 금강산에서의 3박4일 수학여행을 어제의 일처럼 떠올리는 것은 갈 수 없는 고향 평양 고평면에 대한 그리움이 겹친 탓이기도 하다. 수구초심이라던가, 눈감으면 기억 속?북녘 땅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은 씨 부부는 경성 조지야 백화점(현 미도파)에서 경리직 직원과 판매 점원으로 만나 결혼한 ‘사내커플 원조’다.

이후 교직에 주로 몸담았던 은 할아버지는 최근 몸이 불편한 탓에 이번 금강산 여행에서 산에는 오르지 못했다. 은 할아버지는 “이렇게 가까이서 금강산을 둘러보는 것만 해도 잃어버렸던 젊을 적 추억을 되찾은 셈”이라며 만족했다.

함께 간 아들 범수 씨는 기업인답게 “뭐라고 해도 정말 정주영 씨가 큰 일을 해냈다”고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금강산 여행의 소감을 밝혔다.

그는 “동서독 통일에 문화교류가 기초가 됐듯 금강산 관광도 훗날 통일의 디딤돌로 평가 받을 것”이라며 “이념적 장벽을 가장 먼저 넘는 것은 역시 기업가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온정리에 세워진 고 정몽헌 씨 추모비 앞에선 숙연함도 느꼈다. 손자인 대학생 호 씨 역시 “안내를 맡은 북한 사람들이 자신의 임무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며 측은하게만 바라봤던 조부모와는 다른 인상을 밝혔다.

또 “그곳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에게서 냉전적 사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며 “남북이 함께 만난 것 자체가 좋았다”고 덧붙였다.

추억 찾기 여행에 동참했던 3대는 여행 소감은 같지 않았지만, 8월 한더위에 금강산 옥류관에서 가위질 않고 후루룩 먹은 평양냉면의 맛엔 모두들 이견이 없었다며 활짝 웃었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8-30 18:46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