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적 삶일지라도 누구나 주인공을 꿈꾼다

[유혜성의 감성25시] 연출가 박혜선
엑스트라적 삶일지라도 누구나 주인공을 꿈꾼다

배우와 관객이 둘 다 시치미 떼야만 하는 연극이 있다.

연극 ‘주머니 속의 돌’은 100분 동안 배우 한 명이 8.5인 역할을 해야만 하는 신기한 연극이다. 배우 두 명에 배역은 17개. 갈아입을 의상도, 암전도, 단 한번의 퇴장도 없다.

무전기, 모자, 콧수염, 지팡이 등 소품만 있으면 즉석에서 변신이 가능하다. 단 0.5초 동안 무전기를 든 조감독부터 화려한 모자와 헤어 밴드를 한 여배우 나주리까지 배우들의 변신은 그 순간 만큼은 무죄가 된다.

그렇게 눈 깜짝 할 사이 벌어지는 변신술에 관객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는 관객도 시치미떼기 선수다.

언제 봤냐는 듯 순박한 시골청년이 순식간에 여배우가 되어도 변신의 비밀을 못 본 척 한다. 연극 ‘주머니 속의 돌’이 어느 연극보다 배우와 관객의 관계가 끈끈하게 유지 될 수 있는 것도, 관객의 수준과 분위기에 따라 공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함께 공범자가 된 관객은 엑스트라가 주인공이고, 주인공이 엑스트라인 연극 속 주인공의 인생에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화려한 주인공 보단 소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이 우리의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배우의 힘이 크지만, 연출가의 숨은 내공 또한 이에 못지않다.번역과 연출을 둘 다 맡은 연출가 박혜선은 이 연극에서 엑스트라 같은 존재다.

“할수록 덜컥 겁이 났죠. 욕심 내서 하고 싶은 작품이었지만 100분 동안 배우 두 명이 17개 역할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죠.

자면서도, 무대 위에서도, 배우들의 동선을 그렸습니다. 그만큼 연출적 상황과 고민으로 부담이 컸던 작품이었어요.”

국내에서 처음 공연되고 있는 ‘주머니 속의 돌’(원제 Stones in his pockets)은 영국의 작가 메리 존스의 작품이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 제작진이 아일랜드에 가서 영화를 찍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박혜선은 강원도 산골에 서울 충무로 영화팀이 찾아오는 것으로 바꾸고, 극중 여배우가 아일랜드 억양을 배우는 부분은 강원도 사투리를 배우는 것으로 설정했다.

“아일랜드가 가지고 있는 고립된 느낌과 순박함이 때묻지 않은 강원도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적당히 시골스러우면서도 낯선 느낌이 강원도ㆍ사투리에 묻어있죠.”

아일랜드 작품을 한국식으로 번안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따랐다. 1차 번역은 원작이 가지고 있는 말에 대한 뉘앙스를 철저히 살리되 우리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번역의 초점을 맞추었다.

무려 8번의 번안 작업이 이루어졌다. 1차 번역만 빼고는 모두 공동 번안이다. 2차 번안에는 극중 배우 서현철이 가담했고, 사투리 번안작업은 전인철이 도왔다.

강원도 사투리가 이에 익숙하지 못한 배우들에게 극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감안해 마지막은 전 출연진이 공동번안 작업을 했다.

수도 없는 대본 읽기를 반복했다. 사투리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사투리를 자연스레 자신의 억양과 톤에 맞추는 연습에 중점을 뒀다.

마지막으로 감정을 실어 표현 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자연스럽게 극에 걸 맞는 사투리로 극화 시키기, 이것이 그녀가 연습 내내 강조한 사항이다.

그녀가 이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이다. "‘주머니 속의 돌’에 대한 리뷰를 읽고 끌렸어요. 호기심을 자극했죠. 상식을 깨는 연극이었어요. 틀을 깨는 퍼포먼스 개념의 연극, 재미있겠다 싶었죠.”

단지 번역만 의뢰 받았던 그녀는 1차 번역을 끝내고 연출가로서 욕심이 생겼다. 연출가라면 한번쯤 ‘이런 연극 해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는, 국내에서 초연인 ‘코믹 탈의극’이었다.

그리고 이 한 줄 카피는 신인 연출가를 욕심 내게 했다. ‘코미디 걸작’, ‘라이브 퍼포먼스 상상력에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 녀뇩염紫曠舊?않았고, 결국 행운을 잡았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부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단지 넓은 세계에서 부딪치며 연극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 워털루 대학 연극과에 입학한 그녀는 학기마다 4편의 연극에 참여하며 학문보다 실전에서 ??연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힘들기도 했지만 실전에서 뛰는 것이 그녀와 잘 맞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연출은 학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내에서 실질적인 작업으로 평가 받고 싶었다. 그 목마름은 졸업하자마자 그녀를 한국의 무대로 불러들였다.

처음엔 극단 전망에서 연출부 생활을 하며 연극 관련 통역과 무대 감독을 맡았다. 실전에서 활동한 그녀에게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적인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다. 번역도 간간히 했다. ‘시선집중 연출가전’에서는 데이빗 헤어 작품인 ‘프라우다’를 번역과 동시에 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렇기에 시대풍자극 ‘프라우다’는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이기도 하다.

신인 연출가에겐 아직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연극 ‘주머니 속의 돌’은 그녀에게 새로운 계기를 던져주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것은 틀림없다.

“아직 성장하는 과정일 뿐이에요. 새로운 시도가 되고 저를 자극하는 작품을 만나는 것이 연출가에겐 더 없는 행운이죠.” 그러면서 ‘주머니 속의 돌’ 은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거라고 덧붙였다.

서울 대학로에서 이 달 말까지 공연 예정인 ‘주머니 속의 돌’은 현재 가장 호평 받고 있는 작품이다. 엑스트라 배역마저 잘린 청년이 주머니 속에 돌을 가득 채운 채 자살하는 사건으로 극은 전개되지만, 형식은 한없이 자유롭고 배우들의 연기는 유쾌하기까지 하다.

연극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주머니 속의 돌’은 허구의 세계 영화 속에선 엑스트라인 마을 주민들이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된다.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는 연극을 만들자고 의기 투합하는 장면은 막이 내리면서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번쯤 인생의 주인공을 꿈꾸는 우리, 하지만 주인공은 한 명일 수밖에 없다. 이 연극을 보면 결국 엑스트라로 사는 우리가 사실 인생의 주인공 아니냐는 새삼스런 진리를 깨닫게 된다.

연출가 박혜선은 말한다. "‘주머니 속의 돌’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이 연극은 배우가 유독 무대에서 빛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것은 숨어 있음으로 더욱 빛나는 엑스트라 같은 연출가가 있기 때문 아닐까.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10-11 18:31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