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을 예술로 승화 "나는 전생에 무사였을 것"

검(劍) 앞에 서면 그는 자못 진지해진다. 눈을 가리고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다. 마치 비장한 각오를 한 무사처럼. 검의 끝에 기(氣)가 몰린 듯 칼 끝에서 날카로운 한줄기 빛이 번득인다.

이얍! 기합소리와 함께 사과는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그에게 몸을 맡긴 동료 무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일어선다. 진검으로 사람 배 위에 올려진 사과 자르기. 고도의 기(氣)를 이용한 이른바 차력 쇼다.

“It's a magic!”

이어지는 찬사와 박수소리. 난생 처음 차력 쇼를 보는 외국인들에게 무용과 무술이 만난 새로운 장르 마샬 아트 퍼포먼스(Martial art performance)는 새로운 화제 거리다.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춤과 차력 쇼가 벌어지는 동안 높이 3m의 천에 그려지는 사군자 퍼포먼스. 동양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퍼포먼스는 외국 관광객과 현지인들에게 그 자체가 매직(magic)이었다.

검에서 흐르는 기 손끝으로 감지

속임수 없이 눈을 가리고 원하는 사물을 말끔히 잘라내는 그에게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생에 무사가 아니었을까요.”

전생에 무사라고 말하는 이 남자는 합기도 5단, 태권도 5단, 검도 4단, 킥복싱 5단, 유도 2단의 소유자다. 사범, 종합 무술인, 스턴트 맨, 무술 감독 등의 직업을 거쳐 마샬 아트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 극단 무무(武舞, yin yang)의 박완규씨(33)는 검을 들 때만이 자신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느낄 만큼 검 실력을 자랑하는 ‘무사’다.

“검을 들면 전율을 느껴요. 검에서 흐르는 기운이 손 끝으로 감지되는 거죠.”

검과 그는 하나가 되었다. 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젠 알 수가 있을 정도다. 자신을 이기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새벽녘 추운 도장 안에서 도 닦듯 검과 함께 한 인고의 시간은 한편의 인간극장을 방불케 했다.

검에 있어선 실력을 인정받고 무술인으로 인기를 끌었던 그가 극단에 들어와 춤추며 공연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해외의 각종 무술 쇼에 초청 받으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를 ‘사부’라 부르며 무릎을 꿇는 일본 무술인도 있었다. 무술인으로서 진지해 질 수 있는 계기였다. 어느 날 무술을 선보이며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을 받은 그는 ‘무술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또 다른 욕망을 만들었다. 우연찮게 무술인을 찾는 예술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국립중앙극장 수석 무용수였던 안무가 우재현씨와 박완규의 만남은 음(무용)과 양(무술)의 만남이었다.

둘은 곧바로 서로가 가지고 있는 끼와 재능,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외국인들이 ‘음’을 발음하지 못해 ‘인양’이라고 바꾸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극단 ‘무무武舞 인양’은 그렇게 탄생했다.

박완규의 차력 쇼는 니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영화 ‘사무라이 픽션’을 보는 것처럼 재밌고, 무술은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볼 때 만큼 진지해진다.

무용은 화려하고 신비롭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의 무사들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춤과 무술, 박완규의 무술은 이미 예술이었다.

박완규, 그는 몸으로 하는 일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용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창, 검, 봉, 쌍절곤을 가지고 깨고, 부수고, 자르고, 기합소리를 내는 편이 더 나은지도 몰랐다.

부드러움은 박완규와 맞지 않았다. 얼굴에 분장을 하고 공연 복장을 입고 손동작 발동작 하나 하나에 선의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은 어색하기만 했다.

안무가는 무용을 버리지 않으려 했고 무술인은 무술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 속에 무용과 무술은 처음엔 많이도 부딪치고 싸웠다. 그리고 서로의 많은 부분을 버렸다고 인정할 때쯤 2002년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대중 앞에 검증 받을 기회가 다가왔다.

“그때 저는 마음 속에 있던 마지막 고집까지 꺾게 되었어요. 안무가를 인정하게 된 거죠.”

박완규, 그는 무대 위에 처음 올려진 공연 이후 많이 달라졌다. 한번 철저히 깨진 후에 깨달았다.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우재현씨 덕에 그의 몸 동작은 많이 부드러워지고 세련돼졌다.

하지만 무술 안무는 어디까지나 박완규씨의 몫이다. 이젠 무술과 무용은 금슬 좋은 부부 마냥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사이가 되었다. 깨달음 후 무용과 무술의 차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술과 무용은 오십보 백보 차이더군요.”라고.

치열한 삶의 자세, 자신을 넘어서다

박완규, 그는 자신을 넘어선 사람이기도 하다.

밤무대나 이벤트 쇼에서나 볼 수 있었던 차력 쇼를 예술 장르와 접목시킨 것도 그렇고, 마샬 아트 퍼포먼스(Martial art performance)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것도 그렇다. 차력 쇼는 해외에서 최고 무술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인식의 전환을 맞기도 했다.

사실 박완규의 인생도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가 지독하게도 이를 악물고 싸운 것은 가난과 자기 자신이었다.

“가난한 시골출신이죠. 어릴 때부터 미꾸라지 잡아 용돈 벌고, 낚시꾼 대상으로 낚시 밥을 팔았죠. 용돈 한번 받은 적 없었어요. 벌어서 부모님 드리면 드릴까. 뼈가 부러지고 칼에 맞아 살이 패여도 한번도 울지 않았어요. 어찌 어찌 혼자 삶을 헤쳐가는 방법을 터득했죠. 정신력으로 버틴 것들이 많아요.”

학원 폭력으로 패거리들에게 처절하게 당하자 그는 싸움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각종 격투기는 그때 배웠다. 운동을 하다 보니 적성에 맞았다. 무대포 정신으로 운동을 하고 몸을 만들었다. 타고난 재능이라 생각했다.

무술감독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 집도 사고 땅도 샀다. 충남 당진의 고향 사람들은 영화나 방송을 통해 무술인으로 나오는 그를 제법 성공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무무(武舞) 창단 멤버가 된지 4년째다. 더불어 예술가로 사는 것은 배고픈 일이기도 했다. 무술 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 당장의 배고픔은 면할 수가 있지만 왠지 그런 생활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동양무술 퍼포먼스에 대한 그의 생각은 낙관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가난한 것은 사랑하던 연인에게 배신당했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땐 한라산 정상까지 4시간 만에 달려가 소리를 질렀죠. 연골이 닳고 무릎이 파열되어 걸을 수 없다는 의사의 판정도 운동으로 이겨냈어요. 무식하게 견뎠죠. 저는 무무 극단의 2년 후를 믿어요. 브로드웨이 진출이라는 내일이 있으니 모두 참을 수 있어요.”

박완규 그는 자신의 신념을 믿는다. 새벽녘 생수 하나를 놓고 도를 닦았던 시절로 돌아간 그는 어떤 벽 앞에서도 당당하고 견고하다.

다가올 2월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선보이게 될 무무의 마샬 아트 퍼포먼스를 위해 단원들과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해외에서 인정받았지만 깐깐한 국내 대중과 친해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자신 있다. 기존 공연의 단선적인 스토리라인에도 변화를 주었다. 장충동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그는 ‘그를 넘어서기 위해’ 진검을 들고 춤추며, 자신과 매일 싸운다. 그는 어떤 싸움에서도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노라고 여유있게 말했다.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