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이혼율로 모성 결핍, 아동 대상 성범죄 크게 늘어나 · 양상은 선진국화… 의식 · 예방 시스템은 후진적 수준

대한민국은 성범죄자들의 천국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엽기적인 성범죄가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다. 어린이와 노인 등 대상도 가리지 않는다. 범죄 수법 역시 납치, 취업알선 유인, 마취제 사용 등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된다.

그런데도 성범죄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잇따르고 피해자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전근대적 수사관행이 온존해 있는 게 현실이다. 왜 그럴까?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고 사회와 격리돼 혼자 사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우리 사회의 성범죄 양태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지만, 성범죄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과 예방체계는 여전히 후진적이기 때문이다.

급증하는 성범죄를 막으려면 이 같은 반성과 냉철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우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성폭력은 육체적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 잔인한 범죄 행위라는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1. 대전과 청주를 중심으로 전국을 돌며 연쇄 강도, 강간 행각을 일삼아온 일명 '발바리'의 용의자인 이모씨가 서울 강동구 천호동 모 PC방에서 경찰에 검거돼 대전동부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 정재훈 기자
2. 용산 초등학생 살해 유기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김모씨가 서울 용산구 용문동 자신의 신발가게에서 실시된 현장검증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 한국일보 자료사진
3. 청소년보호위원회 직원들이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앞 게시판에 제6차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신상공개 자료를 부착하고 있다.

이 같은 바탕 위에서 우리 사회의 허술한 성범죄 예방시스템을 촘촘히 다시 세우는 작업에 속히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범죄 양태는 이미 선진국

성범죄의 부끄러운 선진화는 양과 질적 측면에서 모두 뚜렷하다. 높은 이혼율과 가정 붕괴로 모성 결핍 상태에서 키워진 사람이 늘어나면서 성범죄도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1.5명이 이혼했던 1995년에 강간범죄는 총 4,844건이 발생했으나, 이혼이 2.9명으로 늘어난 2004년에는 6,959건으로 50% 가까이 늘었다.

선진국만의 사회병리 현상으로 통했던 아동 대상 성범죄도 크게 늘고 있다. 경기도에 신고된 아동 성학대 사례는 2000년 6건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51건으로 늘었다.

경기대 대학원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 성폭행은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경쟁사회에서 패배한 뒤 고립된 사람과 가정 붕괴로 방치된 어린이들이 늘어나면서 아동 성범죄의 토양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구멍 뚫린 성범죄 방지 대책

1989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엽기적인 아동 대상 성범죄가 발생했다.

얼 슈라이너(Earl Shriner)라는 성범죄 전과자가 출소 후 2년 만에 7세 소년을 성폭행한 뒤 성기를 절단하고 사망토록 방치한 사건이었다.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인 1990년 상습적 성범죄자를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지역사회보호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성범죄자의 사회인구학적ㆍ생물학적 특성과 범행수법, 범죄경력 정보 등을 수집, 성범죄자의 등급을 매기는 게 핵심이다.

심리학자들이 참여하는 등급 평가에서 ‘고(高) 위험군’으로 분류되면 형기가 만료된 뒤에도 석방되지 않고, 별도의 치료 프로그램이 적용된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성범죄자의 경우 100년 이상의 치료감호 명령을 내리는 등 가혹하게 처벌한다.

‘저(低) 위험군’ 범죄자를 사회로 복귀시킬 경우에도 전자팔찌를 차게 하고 지역 주민과 학교, 신문 등에 성범죄 전과자가 풀려났음을 알리고 있다.

성폭력이 초래한 용산 초등학생의 죽음은 공소시효 중지, 성범죄자 주거지 제한, 전자팔찌 도입 등 각종 보완대책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가해자 인권침해 우려를 이유로 일각에서 반대하는 ‘성범죄자 등록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등 상당수 선진국은 1990년대부터 ‘성범죄자 등록제’를 시행, 아동 대상 성범죄를 막는데 주력하고 있다.

성범죄는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동종 전과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 이들의 재범만 막아도 흉악한 성범죄를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다.

‘재범 확률이 높다’는 것은 ‘성범죄자는 일반인과 다르다’는 말과 같다.

형사정책연구원 강은영 연구원은 “상습적 성범죄자는 정신상태가 일반인과 확실히 다르다”고 말했다. 성범죄자 가운데 상당수는 ‘반사회적 정신장애’로 불리는 정신병적 특성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성범죄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재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강 연구원은 “미국 등에서도 성범죄자의 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아이들을 잔혹한 성범죄에서 보호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주거지 제한 · 전자팔찌 착용 등으로 전과자 체계적 관리 필요
전문가 "성범죄자 등록제 도입해야"… 남성 중심 성문화도 원인

검찰ㆍ법원의 남성 중심적 성의식

아동 성폭력 전문가인 형사정책연구원 강 연구원은 최근 성범죄를 심리하는 판사와 검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초등학교 여학생을 유인해 자위행위를 시킨 교사를 처벌할 수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요지는 객관적인 판단의 근거를 찾기 위한 게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교사가 여제자를 직접 어떻게 한 것은 아니니까 처벌할 수 없는 게 아니냐?”, “미국과 일본에서도 이런 행위를 처벌한 전례가 있느냐?”고 물었다.

강 연구원은 “선진국에서 이미 수십 건의 판례가 나와 있는 분명한 성범죄인데도 처벌여부를 물어와 어이가 없었다”면서 “법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검찰과 법원의 남성 편향적 태도를 속히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 중심의 성문화도 성범죄를 키우는 중요한 요인이다. ‘성범죄자 등록제’ 같은 하드웨어가 갖춰져도, 소프트웨어가 따라가지 못하면 도로아미타불이다.

2004년 ‘아동 성폭력 고소 과정에서 어머니의 고통스런 말하기’라는 논문으로 이화여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 정명희 보좌관은 “수사관들이 성범죄 피해 아동에게 ‘성기가 어떻게 생겼니?’, ‘몇 번 했니?’, ‘어떻게 했니?’ 등 폭력적이고 관음증적인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성의식을 질타했다.

인터뷰 - 한국범죄심리학회 이상현 회장
"유전자 정보은행 설치 시급"

“경쟁사회가 낳은 복잡한 갈등, 개인의 열등감과 공격적 성향이 결합돼 성범죄가 발생합니다.”

한국범죄심리학회 이상현(65ㆍ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회장은 성범죄자가 태어나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구성원들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대립하는 공동체 속에서 성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가진 사람이 욕구 분출을 제어하지 못해 약자인 ‘여성’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요즘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한 일련의 성범죄에 대해 “잦은 집행유예 처분 등 형 집행이 느슨해서 생긴 일”이라며 재발 방지를 위해 ‘(성범죄자) 유전자 정보은행’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 성범죄가 잦은 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모든 범죄가 그렇겠지만, 대립과 갈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성폭력 발생 빈도가 높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이다. 지역, 인종, 계급간 대립이 초래한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범죄로 발현되고 있다. 성범죄는 단순히 성욕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이 같은 사회적 배경 위에 ‘여자’라는 물리적 약자에 대한 개인의 공격적 성향이 더해져 발생한다.”

- '공격적 성향'은 왜 생기나?

“대개 남성 호르몬 안드로겐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이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 염색체나 유전자 이상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왜곡된 성 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 결핍 등이 작용해 성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심리적 열등감이나 정신 이상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 요인이 중요하긴 하나, 개인의 유전ㆍ생물학적 요인도 간과해선 안 된다.”

- 최근 부녀자를 24차례나 강간한 용의자가 검거되는 등 성범죄 재발률이 매우 높은데….

“연쇄 사건 용의자는 성범죄를 거듭 저질러도 그 심각성을 별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의 유전자나 염색체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찰과 검찰이 ‘유전자 정보은행’ 설립 법안을 올해 상반기 중 국회에 상정, 내년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인권침해 우려를 이유로 설립을 반대하던 시민단체의 지적 사항을 잘 반영하기 바란다.”

박원기 기자




조철환 기자 new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