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홍씨 만전단 홍가신
1541년(중종36년)-1615년(광해군7년) 자 興道, 호 晩全堂, 시호 文莊

만전당 홍가신은 1541년 7월 17일에 태어나 27살 때 진사가 되고 34살 때 부여현감, 45세 때 수원부사가 된다. 52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가을에 남양으로 돌아와 의병을 규합해 왜적을 토벌했고 53세 때는 파주목사가 되었다.

그는 이 해에 국왕인 선조에게 장문의 시국방책을 건의한다. 그 이듬해에 홍주목사가 되었고 이몽학의 난을 당하자 민병을 모아 난을 평정했다. 59세 때 강화부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60세에 해주목사가 된다.

63세 때는 특진관으로 경연(經筵)에 입시했고 강원도관찰사, 개성유수 직을 역임한다. 64세 때에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충청난공신 1등에 책록된다.

선조38년(1605) 3월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에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진다. 그는 광해군7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17년 문장(문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것이 그의 평생 대략이다.

만전당은 초당(草堂) 허엽(許曄,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부친)과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퇴계 선생에게도 수학한 적이 있다.

그는 서울에서 퇴계 선생에게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朱子書)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동문수학했던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1548-1622, 좌의정 역임)는 “근세 사대부 가운데 명절을 보전함에 있어서 시종 흠이 없는 이로 의당 공이 으뜸이다(近世士大夫 保全名節 終始無瑕 當以公爲首)”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인물평을 통해보면 동문수학자로서의 상투적인 찬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일찍부터 유명(儒名)이 있었는데 행실이 청렴결백하다는 것으로 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홍가신은 청간(淸簡)하고 욕심이 적으며 직분을 다하려고 힘써 가는 곳마다 모두 치적이 있었다.” “홍가신은 젊어서부터 글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는 등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순신의 딸을 며느리로

홍가신의 넷째아들이 초취(初娶)로 한백겸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후사가 없자(신행 전에 친정에서 사망) 이순신의 딸(이순신은 3남 1녀를 두었음)을 계실로 맞아 4남 1녀를 두었다.

류성룡(1542-1607)과 이순신(1545-1598)은 홍가신과 서울에서 청년시절을 함께 보낸 이력을 지닌다. 이때 류성룡과 홍가신은 서울에 와 잠시 벼슬하고 있던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 적이 있다.

따라서 서애가 쓴 부여의 의열사기에서 ‘나의 벗(余友)’라고 홍가신을 칭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부여의 도강영당에 미수 허목과 번암 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한 것과 그의 신도비명의 글씨를 영남 남인의 맥을 이은 칠탄 김세흠이 지은 것도 이러한 학맥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