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회장 공백으로 승계 작업 차질… 경영도 집단체제 형식 될 듯

검찰이 정몽구 회장의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을 계기로 현대차그룹의 향후 변화 가능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의 오너이자 막강한 경영권력을 행사하는 최고경영자(CEO)이기 때문에 그의 구속은 현대차 경영구도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번 비자금 사건을 통해 그의 외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법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 만큼 승계절차가 상당기간 지연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향후 경영구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누가 정 회장을 대신해 현대차그룹을 이끌어 나갈 것이냐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현대차그룹에 정 회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2인자가 없다.

현대차에는 김동진 현대차 대표이사 부회장과 설영흥 부회장(중국사업 담당), 이전갑 부회장(기획총괄 담당)을 비롯해 계열사에 정순원 로템 부회장, 이용도 현대제철 부회장, 김원갑 현대하이스코 부회장, 한규환 현대모비스 부회장, 김평기 위아 부회장 등 총 8명의 부회장이 있지만 이들 중 누구도 2인자는 아니다. 이들 부회장이 각기 정 회장에게 직보할 수 있는 체제로 분할돼 있다.

계열사 사장들이 이학수 부회장을 거쳐 간접적으로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 삼성그룹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조다. 따라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해외투자사업 등 핵심 현안은 앞으로도 정 회장이 직접 챙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정 회장의 구속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옥중결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인사제도 조직구조 수술 불가피

그러나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업무까지 정 회장이 일일이 간섭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전망이다. 따라서 김동진 부회장을 중심으로 주요 부회장과 사장급이 참석하는 경영협의체가 집단경영체제 형식으로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 부회장이 경영협의체에서 논의한 사항을 정 회장에게 보고하고 재가받는 형식으로 운영된다는 뜻이다. 그룹측은 공식적으로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간에 정 회장이 집무실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현대차그룹이 비상경영에 들어가 있음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경영자가 제때 일처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사제도와 조직구조에 일대 수술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비자금 사건이 불거진 결정적인 배경이 인사조치에 불만을 품은 내부인의 제보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 회장 특유의 수시인사제도의 폐해가 집중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확실한 신상필벌과 스피드 경영이 수시인사의 장점이라고 설명해 왔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부작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만큼 새로운 인사제도를 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기획총괄본부가 중심이 돼 업적과 능력에 따라 임직원을 평가할 수 있는 새 인사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직구조 개편의 핵심은 계열사간 중복업무 조정을 맡고 있는 기획총괄본부의 축소다. 기획총괄본부는 계열사가 관계되는 투자와 재무, 기획 등 중복업무를 조정하는 핵심부서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를 각 계열사 실무부서로 이관할 가능성이 높다.

기획총괄본부가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조직은 아니긴 했지만 그룹 규모가 커지면서 그 역할과 위상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비자금 사건의 최대 피해조직은 기획총괄본부다.

특히 기획총괄본부 조직의 축소는 각 계열사 조직의 연쇄개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말 마케팅총괄본부 조직 일부를 현대·기아차 실무부서로 이관한 전례도 있다.

그룹은 조직개편과 함께 비자금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임원에 대한 문책성 인사를 단행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검찰의 내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관련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만큼 일부 임원은 정 회장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그룹을 난처하게 만든 책임을 질 것으로 보인다.

경영권 승계 정공법 택할 가능성도

정의선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도 상당기간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초 현대차그룹은 정 사장이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비상장 계열사를 육성한 뒤 증시 상장을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순환출자 구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기아차 주식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정 사장이 그룹 지배권을 확보하게 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불거지면서 당초 시나리오대로 풀어나가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더구나 이미 상장한 글로비스 지분 전체를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한 만큼 정 회장은 기아차 지분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자금도 전혀 없다.

글로비스의 상장후 최고 주가(1월 6일, 8만3,100원)를 기준하면 정 회장 보유 글로비스 주식(1,195만4000주) 가치는 무려 1조원(9,934억원)에 육박한다. 기아차의 현재 주가(4월 27일, 1만9,600원)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4.6%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금액이지만 주식 전체를 사회 환원하기로 한 만큼 의미없는 숫자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정 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다른 비상장 계열사들을 활용하기도 어려워졌다. 정 사장은 이노션(40.0%)과 엠코(25.1%), 오토에버시스템즈(20.1%), 위스코(57.9%) 등에 지분을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차그룹은 정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정공법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정공법이라면 증여나 상속을 통한 대물림을 말한다. 그러나 증여·상속세율이 50%에 달한다는 점이 문제다. 지난 1월을 기준으로 정 회장이 보유한 주식 가치가 2조7,00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보유주식 전체를 증여 혹은 상속받는다고 가정하고 단순 계산으로 1조3,500억원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셈이다.

이 세금을 내려면 결국 물려받은 주식을 처분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주요 계열사 지분을 상당부분 처분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일부 계열사에 대해서는 경영권을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때문에 정 회장 부자는 향후 상당기간 경영권 승계에서 한 발 물러나 그 방법을 놓고 진지한 고민을 거듭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혁훈 매일경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