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 등 부담에 벤처기업들 구로·분당으로 떠나, 성형회과·피부과 병원 속속 입성… 300개 이상 밀집

서울 강남 테헤란로 ‘IT밸리’에 더 이상 정보통신 벤처는 없다.

삼성SDS, KTF 등 일부 대기업 간판들만 겨우 몇 개 손꼽을 정도일 뿐이다. 벤처 열풍이 드세던 2000년 무렵 불야성의 거리 풍경을 떠올린다면 지금의 달라진 모습은 가히 격세지감, 상전벽해다.

ITㆍ벤처기업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엔 지금 성형외과ㆍ피부과 등 병원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고 있다.

벤처거품이 꺼지고 돈벌이가 시원치 않게 된 강남 일대 벤처업체들은 고가의 임대료에 허덕이다가 2001년께부터 하나 둘씩 쫓겨나듯 구로디지털단지로, 분당 등 신도시로 총총 빠져나갔다.

포스코센터빌딩 인근에 있다가 3년 전 구로디지털단지 내 벤처빌딩으로 둥지를 옮긴 한 통신 벤처업체 간부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입주한 벤처기업 중 70% 정도는 강남권 특히 테헤란로에서 옮겨온 경우”라며 “벤처업계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남권 업종지도를 바꾸다

테헤란로뿐만이 아니다. 지하철 3호선 신사역 사거리에서 강남구 ‘뱅뱅사거리’에 이르는 강남대로의 변신은 더 놀랍다.

성형외과ㆍ피부과 병원 간판들이 거리 곳곳에 넘쳐난다. 치과, 비만ㆍ탈모클리닉, 한의원도 적지않다. 벤처 열풍이 꺼진 5년 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전에 화려했던 IT밸리가 ‘뷰티밸리’로 대대적으로 성형수술한 셈이다.

성형외과와 피부과 간판이 거리를 점령한 성형밸리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을 중심점으로 열십(十)자 꼴로 형성돼 있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삼성역이 횡축, 3호선 압구정ㆍ신사역에서 뱅뱅사거리까지가 종축이다.

열십자 형태의 성형밸리는 그 안에 병원들이 군집을 이룬 수 곳의 ‘특구’를 품고 있다. 강남역, 압구정역, 신사역, 선릉역과 청담역, 논현역, 교대역 등이 그러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강남역에 병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강남역에서 신사동 방향으로 한 블록 떨어진 교보빌딩까지 거리를 걸어가면서 양 편의 병원 간판 수를 어림잡아 세어보니 모두 100개에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추정해보면, 압구정역-신사역-강남역-뱅뱅사거리에 이르는 강남대로 양 편에 늘어선 병원 수는 자그마치 300개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병원 7~8개가 들어찬 빌딩들도 여럿 눈에 뜨었다.

대한성형외과개원의협의회가 서울지역 478명의 성형외과 전문의 회원들의 분포를 동(洞)별로 조사한 결과 신사 180, 청담 51, 서초 47, 논현 44, 역삼 31명으로, 서울 시내 전체 성형외과 전문의의 74%가 이들 5개 동에 밀집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성형괴과 간판으로 가득찬 압구정역 거리

강남 편애 현상은 피부과의 경우도 비슷하다. 대한피부과개원의협의회에 가입한 서울 강남지역 254개 피부과 병원들의 구(區)별 분포는 강남 59, 서초 28, 송파 20, 강동 13, 영등포 11, 강서 9, 관악 7, 동작 7, 구로 4개, 금천 2개 순으로 나타났다. 절대 다수가 강남권 3개구에 몰려있음을 알 수 있다.

여유 계층이 주로 찾는 성형외과ㆍ피부과 병원들이 강남에 몰려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분야 의사들은 “강남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름값을 한다”고 말한다. 강남 프리미엄이 있다는 주장이다. 쏠림은 또 다른 쏠림을 부르듯, 수요자들도 강남으로 몰린다. 가깝게는 강북ㆍ신도시에서부터 KTX를 타고 지방에서도, 심지어 미국ㆍ중국ㆍ일본 등 해외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결국 공급이 많으니 수요가 몰리고 수요가 몰리니 공급이 늘어나는 성형외과ㆍ피부과 병원의 확대재생산 구조가 거대했던 IT밸리마저 밀어낸 셈이다. 그러나 실상은 미래의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성장동력인 IT벤처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기도 하다.

지금 성형특구에선…

요즘 강남에서는 '동안(童顔) 신드롬'이 거세다.

탱탱한 피부의 20대들까지 '더 어려 보이게 해달라'면서 수십만원대의 주름 제거, 색소 시술 등을 시술받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40대 이상 중ㆍ노년층 고객과 남성들의 발길도 부쩍 잦아졌다는 게 이곳 의사들의 설명이다.

국내 문화ㆍ패션 흐름을 선도하는 강남권인 만큼 유행도 시시각각 빠르다. 성형수술이라고 하면 예전에는 쌍꺼풀, 코, 안면윤곽술, 주름 수술 등이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요즘은 귀족 수술, 턱, 입술, 눈의 앞 트임이나 뒷 트임, 콧볼 성형 등으로 아주 세분화됐다.

성형에도 '강남 스타일'이 따로 있다. 소위 '톱3'에 드는 성형외과의 한 원장은 최근 코 성형을 한 30대 여성에게 "왜 우리 병원을 찾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얼굴 선만 강조하는 우리 동네 성형 스타일보다 비싸더라도 강남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들어 멀리서 왔다"는 답을 하더라고 말했다.

강북 지역에 있다가 5년 전 강남역 인근으로 옮긴 뒤 소위 '톱10' 피부과로 급부상한 다른 병원장도 "예전에는 가급적 싼 치료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반면 강남 사람들은 치료 후 만족도를 더 따진다"고 설명했다.

최근 이곳 의사들은 지금 시간과의 싸움에 여념이 없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퀵 성형'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퀵 성형이란 바쁜 업무로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들러 30분 정도 반짝 시술을 받는 것. 보형물 삽입이나 고주파를 이용한 주름 제거, 얼굴 점 빼기, 콧대 세우기 시술이 대부분이다.




송강섭 차장 speci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