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신씨 보한재 신숙주1417(태종17년) -1475(성종6년) 자 泛翁 호 保閑齋, 希賢堂, 시호 文忠

▲ 신숙주 영정.
과학성과 독창성, 편리성이 탁월한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에게 최고의 혜택을 주었지만 그 못지않게 세계 문자사에도 큰 획을 그었다. 한글은 창제의 주체와 탄생 과정, 그리고 창제 원리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창제의 주역인 신숙주가 어떻게 젊은 나이에 그런 위업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문헌의 기록을 통해 그가 중국 음운과 언어 자체에 대한 수준 높은 소양을 갖췄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한재는 1417년(태종17) 전라남도 나주 오룡동(五龍洞)에서 태어나 7세 때 청향당(淸香堂) 윤회(尹淮, 1380-1436)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6세 때 그의 손녀와 결혼하였고, 17세 때 부친상을 당했다. 그리고 22세 때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평생 관료의 길을 걸었다.

26세 때는 복정산에서 성삼문, 이개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부터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는 28세 때 요동 지방으로 유배와 있던 중국의 저명한 음운학자인 황찬(黃瓚)을 만난다. 그러나 이를 전후해 보한재가 한글 창제와 관련된 언어 소양을 단숨에 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이전에 음운론의 소양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29세 때 황찬으로부터 희현당(希賢堂)이라는 별호를 내려 받았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한양에서 머나먼 요동 땅까지 13차례나 왕래한 조선의 천재에 대한 황찬의 격려였다.

훈민정음은 그가 30세 때 완성되었고 이어서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국보 제1호로 바뀌어야 한다고 논의됐던 국보 제70호 책이다.

보한재 신숙주의 업적은 많지만 필자는 그중에 한글 창제를 최고로 꼽고 싶다. 그 다음의 공과 과는 이 위업에 견주면 소업에 불과하고 그의 허물도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우선 그의 공을 보면 모두 5차례에 걸친 공신에 봉해진 일이 두드러진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왕이 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린 것은 열 번이 조금 넘는다. 그중에 보한재가 5번에 걸쳐 공신에 봉해진 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문중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공신의 자손과 충신의 자손에 대한 등급을 논한다는 게 큰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당대 시대 상황에서 누구나 행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했을 때 비로소 내리는 ‘공신’ 칭호는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보한재의 과에 대한 문제다. 신숙주 하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신하, 또는 성삼문과의 의리를 저버린 기회주의적 인물’을 떠올린다. 시대 상황론을 펴더라도 선비의 바람직한 자세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정도 비난을 면치는 못할 듯하다.

신숙주 가문은 사가 서거정(徐居正)이 이미 ‘문헌지세가’라고 추앙해 마지않았던 터다. 그의 부친 신장(申檣)은 공조참판을 지낸 관인으로 문장에 능함은 물론 초서와 예서에도 이름났다.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인 숭례문의 현판을 썼다고 구전되는 인물이다. 술을 너무 좋아해 세종이 절주를 명했을 정도였다. 보한재의 스승인 윤회(尹淮) 역시 술을 너무 즐겨 국왕이 하루에 세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특별한 어명을 내렸던 사람이다. 그는 보한재의 처조부이기도 하다.

음운학자 신숙주가 아닌 정치인 신숙주의 위상를 말할 때 세조가 그를 평한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는 최고의 찬사이다. 그래서 세조는 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보한재에게 자문해 대처했을 정도였다 한다.

위징(580-643)은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정치가다. 그는 621년 이건성(李建成, 당 고조 이연의 맏아들)의 태자사마가 되어 훗날 당 태종이 된 이세민(李世民, 이연의 둘째아들, 626년 정변을 일으켜 이건성을 죽임)을 죽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즉위 후 위징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벌하지 않고 도리어 간의대부로 중용했다.

태종은 항상 위징에게 나라의 대소사를 자문했다. 위징은 태종에게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 시킬 수 도 있다”는 비유로 답해 태종에게 수나라가 망한 것을 거울삼아 선정을 베풀도록 했다.

태종은 위징의 간언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통치자들에게 모델이 된 ‘정관(貞觀, 태종의 연호)의 치(治)’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세조가 이런 위징을 빗대 보한재를 평했으니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보한재는 5남매 중 셋째이며, 8남 1녀를 두었는데 감사가 2명, 참판이 1명, 참의가 1명, 사과(司果)가 2명, 봉례 1명, 사섬시정 1명 등 아들이 모두 관직에 등용되었다. 그 자신은 38세에 도승지, 40세에 병조판서, 42세에 우의정, 50세에 영의정을 지냈을 정도로 화려한 이력이 있다.

특히 그는 세조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양관(兩館)의 대제학과 예조판서 직을 겸할 정도로 업무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이는 선조 때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맡은 것과 함께 탁월한 능력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의 손자 3명이 동시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일도 유명하다. 그의 처남인 윤자운(尹子雲)은 그가 영의정일 때 좌의정으로 있었다. 처남 매부가 함께 정승 직을 맡은 것이다. 그가 더욱 아꼈던 손자인 신용개(申用漑, 호 二樂! 亭)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 친필 몽유도원도.
▲ 신도비.

신숙주의 주된 저술인 보한재집(17권 4책)을 펼치면 서거정, 홍응(洪應), 김종직(金宗直), 임원준(任元濬), 김뉴(金紐) 등이 쓴 모두 다섯 편의 서문을 만나게 된다. 이들 모두는 신숙주의 동료 또는 문우, 후배의 위치에서 그를 평하고 있다.

이들이 평한 주요한 구절을 소개하면 ‘문장과 정사로 일대에 울린 사람(兼二者之能而鳴于一代者)’, ‘대현군자(大賢君子)’ ‘왕실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功在王室 澤被生民)’, ‘도덕을 몸에 쌓았고 문장으로 나라에 기여한 사람(道德積于躬 文章華於國)’ 등이 보인다.

이들의 평 중엔 그의 최대 업적인 한글 창제에 대한 공은 들어 있지 않다. 한글을 폄하한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한재 후손들에 인물이 난 원천(源泉)은 그가 남긴 ‘가훈(家訓)’이라는 저술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이는 자손을 생각한 사려 깊은 배려였다. 보한재집 권13에 실린 이 글 서문에서 보한재는 ‘世守文學, 忠孝敦睦, 以爲家法’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대대로 문학을 해오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친인척과 잘 지내는 것으로 우리 가문의 법도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각론으로는 조심(操心), 근신(謹身),근학(勤學), 거가(居家), 거관(居官), 교녀(敎女) 등 6개 절목으로 나누어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집안일(居家) 절목을 보면 “사치의 폐해는 하늘의 재앙 보다 심하다”, “집안의 법도가 궁색해짐은 아껴쓰지 않는 때문이니 집안 살림은 먼저 아끼고 검소하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부녀 교육에 유념하라며 세상에서 아들만 가르치고 딸을 교육하지 않는 풍조를 준엄하게 꾸짖은 점은 특히 눈에 띈다. 시공을 초월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게 많다.

영정은 전신좌상(全身坐像)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녹포단령(綠袍團領) 정장 관복본이다. 가로 167cm, 세로 110cm로 1455년에 중국 화공이 그렸다. 현재 보물 제613호로 지정(1977년)돼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九峯影堂)에 봉안되어 있다.

1971년 10월 9일 한글학회에서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 문충공 신숙주 선생 묘역에다 한글창제사적비를 건립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