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수 과잉에 진료 영역 파괴 잇달아… 의료사고 분쟁도 늘어

▲ 병원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최근들어 진료과목을 바꾸는 사례가 피부과와 성형외과 분야를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어 사회 문제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련이 없음.
평균 수명 연장과 웰빙 바람을 타고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각종 질환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려는 환자들이 병원마다 넘쳐나지만, 정작 국내 병원들의 진료실 풍경은 점점 삭막해지고 있다.

해마다 의대에서 새내기 의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다보니 환자 유치를 둘러싸고 병원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 때문이다.

또한 과열경쟁 후유증으로 최근엔 진료영역 파괴까지 잦아 시술 부작용이 늘고 있어 자칫 사회적 문제로 비화할 조짐이다.

피부과ㆍ성형외과 전문의들의 주장에 따르면 얼굴 박피나 쌍꺼풀 시술, 혹은 보톡스 주사나 지방흡입 시술 후 부작용이 생겨 다른 병원에서 재수술을 받는 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호황을 누리던 피부과와 성형외과에서 시술 후유증이 증가하는 이유는 2002년 무렵부터 전문의 수가 급증하면서 나타난 경쟁의 산물이다.

해마다 의대에서 전문의들이 개원가로 쏟아져 나오는 데다 낮은 보험수가로 병원 존립 자체가 한계점에 이른 일부 다른 과 의사들이 대표적인 ‘비보험 분야’인 이들 진료과목으로 치고 들어온다는 것.

이에 따라 피부과와 성형외과 전문의들은 한정된 파이를 놓고 많은 의사들이 경쟁하고 있어 최근 환자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울상이다.

산부인과·소아과, 저출산 영향으로 환자수 격감

개원의사 수 포화로 병원 운영이 힘들어진 또 다른 분야는 산부인과와 소아과다. 최근 “아이 한 명조차 키우기 힘들다”며 저출산이 심화돼 환자가 크게 줄어든 탓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비뇨기과, 내과, 정신과 전문의들은 “건강보험 수가가 낮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면서 진료과목 전환의 유혹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병원 유지가 힘들어져 진료과목 이름을 좀더 포괄적인 내용으로 바꾸는 것은 그래도 ‘점잖은 방법’에 속한다. 예를 들어 산부인과 병원이 비만클리닉 등으로 ‘업종 전환’하면서 진료과목 간판을 바꾸는 것은 봐줄 만하다는 것.

하지만 비보험 분야이어서 진료과목 전환의 표적이 되고 있는 피부과와 성형외과의 경우에는 다른 과목 전문의들만이 아니라 의사 면허증이 없는 무자격자들도 넘보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게다가 이들 분야에 주사요법이나 레이저 시술법 등 신기술이 속속 쏟아져 나오면서 시술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져 너도나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진료영역 파괴’가 활발해짐에 따라 피해를 보는 것은 해당 분야의 의사뿐만이 아니다. 시술 잘못이나 후유증으로 환자들이 애꿎게 피해를 당하고 있다.

뒤늦게 전공과목을 바꿔 진료를 시작한 경우 관련 분야 전문지식과 치료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시술 잘못이나 후유증 발생의 우려가 높다. 얼굴 부위 기미를 없애려고 레이저 시술을 받는 도중 화상을 입거나 지방흡입 시술로 군살을 빼려다가 피부 조직이 울퉁불퉁하게 망가지는 후유증 발생 사례가 더러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피부과·성형외과 전문의들은 “만일 치료가 잘못된 경우 재수술을 하게 되면 시술이 더 어렵고, 치료비 부담도 크게 늘어난다”며 새로운 치료술이 속속 쏟아지는 진료과목 특성상 시술 정보를 수시로 접하는 등 끊임없는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과 의사들이나 돌팔이 시술자들이 섣부르게 뛰어들 분야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만큼 치료경험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가령 비만 치료 지방흡입술의 경우 시술을 잘못하게 되면 피부와 근육 조직에 유착 등 손상이 생겨 다시 지방이식을 한 뒤 재시술을 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진료과목 변경으로 부작용 속출

▲ 강남 압구정동 성형외과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 / 임재범 기자

“시술 잘못이나 부작용으로 찾아오는 환자 수가 매달 평균 1~3건 정도에 이른다”는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 원장은 그러나 사정이 이러함에도 뾰족한 해결책이 안 보여 고민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의사고시 합격 후 의사 면허증을 따면 어느 과목이든지 진료가 가능한 현행 의료법상 진료과목 변경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진료과목을 바꿨다고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했다가는 외부로부터 ‘밥그릇 챙기기’란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자칫 의사들 간 갈등으로 번질 우려가 높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진료과목을 변경한 의사들도 항변한다. “현재의 턱없이 낮은 건강보험 수가 체제로는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을 뿐더러 거액을 끌어들여 병원을 개원했지만 시설비조차 못 건진 채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니 어쩔 수 없이 과목을 바꿀 수밖에 없다.”

한 대학병원 피부과 교수도 현 건강보험 시스템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수가가 너무 낮다는 것.

“요즘 피부과 레지던트들은 성적이 동기생들 중 1~10등 안에 들 정도로 한결같이 똑똑한데, 전공의 과정을 거친 뒤 대학에 남아 각종 피부과 질환 치료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겠다는 뜻보다는 개원가로 나가 비보험인 피부미용 시술로 돈 벌 궁리를 하기 일쑤라서 안타깝다”는 그는 “비현실적인 건강보험 수가가 의료 시장의 왜곡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 간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다 보니 의료 분쟁 사례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 소비자보호원이 의료서비스 분쟁 접수 실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피해구제 신청 건수가 전년보다 23.5%가 증가한 1,093 건에 달했다.

분쟁 유형으로는 치료 후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상태가 악화한 사례가 52%(568건)로 가장 많았다. 성형외과 관련 58건의 분쟁 사례를 후유증 유형별로 분석한 결과 사망 등 심각한 사례는 없었지만 부작용 악화 41건, 치료효과 미흡 11건, 감염 3건, 장애 2건 순으로 나타났다.

결국 의사 수 과잉과 병원 간의 과열경쟁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오고 있다. 병들어 가는 의료 시장의 근본적인 수술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송강섭 차장 speci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