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 '성년 후견제의 날' 제정치매 등으로 독자판단 어려운 사람위한 후견인제 법제화 추진

“자폐아 자식을 둔 어머니인 제 소원이 뭔지 아세요? 아이가 저보다 딱 하루만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에요.”

6월 27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성년후견제의 날’ 제정ㆍ선포식에서 성년후견제추진연대(이하 후견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정인 대표는 이렇게 절규했다.

이 대표는 “부모가 먼저 죽게 되면, 장애인 아들을 보호해줄 법적 조치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다”며 “위정자들의 무시와 국민들의 무관심 때문에 더 이상 장애인들의 권리가 묵살되어선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장애인 부부가 촛불을 켜두고 잠을 자다가 불이 나서 부부 모두가 숨진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전기가 끊어진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가난’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염형국 변호사는 “이 부부는 매달 일정한 정부 생계보조금을 받고 있었지만, 이를 인출해서 전기 요금을 낼 능력이 없었기에 벌어진 참사”라면서 “정신장애 등으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재산 관리를 잘 해줄 수 있는 후견인이 있었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재산권과 신변 보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비단 장애인들만이 아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치매 등으로 인한 심각한 인권ㆍ재산권 침해로 고통 받는 노인들도 늘고 있다.

혼자 사는 60대 노인 최모(여) 씨는 2년 전 교직에서 정년 퇴직했다. 평생 무남독녀 외동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데다, 당시에는 연금으로 받은 돈도 넉넉해 노후 걱정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일이 없어지니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지고 급기야 치매에 걸려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에 있던 이복동생이 돌연 나타나 “누나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최 씨의 연금과 통장을 모조리 가져갔다. 그는 직장도 없이 최 씨의 돈으로 차를 바꾸고 신용카드도 발급 받았다. 하지만 그는 “누나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라며 “다른 사람들은 관여하지 마라”고 되레 큰소리치고 있다.

이처럼 치매 노인의 재산은 무방비로 노출돼 있고, 이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 역시 유명무실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우리가 노인이 되어 치매라도 걸린다면 누가 우리를 보호해주겠냐”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준비로 이제는 성년후견제 도입에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년후견제는 발달장애, 정신장애, 정신지체, 노인성 치매 등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법적 후견인을 지정해, 재산권과 계약권을 지키고 신변 보호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성년후견제와 유사한 제도적 장치로 한정치산ㆍ금치산자 제도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용어 자체가 거부감을 주고, 차별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게다가 일률적으로 광범위하게 행위능력을 제한하고 있어 규정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보호기능은 미약한 반면, 결혼을 제외한 재산권, 계약권, 직장 취업, 참정권 등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대부분의 권리를 박탈해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등 폐혜가 적지않다.

설사 판단 능력이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어떤 부분에 대해 자기 결정을 할 능력이 남아 있다면, 잔존 능력을 최대한 존중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최근 판단능력이 완전하지 않거나 혼자 거동할 수 없는 장애인, 노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성년후견제 도입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에 착수했다.

검토 방안에 따르면 후견인은 배우자나 직계혈족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후견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 스스로는 물론 배우자, 친족, 법원, 해당 주소지의 지방자치단체장 등도 후견인을 선임할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이다.

이렇게 선임된 후견인은 재산의 처분과 관리, 의료 선택, 보험 가입ㆍ탈퇴 여부 등 각종 법적 행위를 대리하지만, 중대 결정을 할 경우 본인 동의나 법원 허가를 받도록 하는 등의 안전장치가 강구된다.

특히 후견인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를 감시하고 후견인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성년후견 감독인을 둬 성년후견제의 악용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안도 강구되고 있다.

이 같은 성년후견제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과 이웃나라 일본 등에서도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최근 열린우리당 이은영 의원도 성년후견제 관련 법안을 마련하여 발의를 준비 중이다.

염형국 변호사는 “금치산자 제도 등 기존 법을 개정하거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할 시점인데, 국민들의 인식과 지원이 없으면 입법이 될 수 없다”며 “올 정기국회에 통과될 수 있도록 관심을 부탁 드린다”고 당부했다.

2004년 발대식을 갖고 성년후견제 도입을 위한 연구계획안과 간담회, 민법 개정안 청원 등의 활동을 벌여온 후견연대에는 대전광역시장애인연합회,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서울장애인인권부모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한국노인문제연구소,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 한국노인의 전화,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등 장애인ㆍ노인 및 복지 관련 16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