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7곳 13만ha 농지 경작, 미래 식량기지 기반 다지는 한인농장

러시아 연해주의 7월은 제법 여유롭다. 드넓은 대지와 맑은 햇빛, 시원한 초원은 이곳의 긴 겨울을 무색해할 만큼 풍요로운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한 발짝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에게 연해주는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동토의 땅’으로 기억되는 어두운 역사의 무게 때문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지만 근ㆍ현대 수난의 발자취가 더 깊게 패여 있다. 가까이는 망국의 한(恨)이 깊이 서린 땅이기도 하다.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19세기 말, 연해주는 굶주림과 학정을 피해 피와 땀으로 일군 고난의 터전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울분을 토하며 항일의 기치를 든 본거지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횡포에 의해 한인들의 삶은 뿌리가 뽑혔고 희생을 강요받았다.

그런 동토의 땅에 풍요와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결실을 맺고 있다. 대순진리회(종무원장 아유종)가 운영하는 ‘아그로 상생’농장이 진출 5년 동안 확고한 자리를 잡으면서 연해주 한인뿐만 아니라 러시아 현지인들에게 새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그로 상생’은 영농(Agriculture)의 러시아식 발음 ‘아그로’에, 대순진리회의 종지(宗旨)인 해원상생(解寃相生ㆍ원통한 마음을 풀고, 조화를 이룸)의 상생을 붙인 것이다..

‘아그로 상생’은 구 소련 붕괴 이후 파산한 국영농장(콜호즈)을 인수해 곡물과 사료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동시에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했다가 구 소련 붕괴 후 연해주로 다시 이주해 온 고려인 3, 4세대를 고용해 핍박받은 그들이 옛 조상의 땅에 정착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대순진리회가 러시아 정부와 50년간 임대계약을 맺어 운영하고 있는 농장은 젬추쥐느를 비롯해 코르닐로프카, 루비노브카, 네스테로브카, 멜구노프카, 일린카, 아방가르드, 블라디미르뻬트로브카, 한마당, 바지모브카, 루카세프카 등 11곳이고, 인수 예정이거나 작업 중에 있는 농장도 6곳에 이른다. 전체 면적은 13만 2,423ha로 새만금간척사업 면적의 7배에 이른다. 7월 2~5일 한ㆍ러 상생의 농장 현장을 돌아보았다.

대순진리회서 운영, 5년 만에 뿌리내려

‘아그로 상생’농장 중 면적이 가장 큰 곳은 뽀그라늬친느군(郡) 루비노브카 농장. 연해주 제1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이곳은 전체 면적이 무려 2만 367ha(약 6,100만 평)나 된다.

2002년 처음 인수한 그라즈단카 젬추쥐느 농장(7,153ha)이 국내 종교단체의 해외진출 농장 1호라면 루비노브카 농장은 2003년에 인수한 제2호 농장으로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신도뿐 아니라 ‘아그로 상생’ 농장 방문객들의 휴식처로도 활용된다.

루비노브카 농장은 크게 콩ㆍ밀ㆍ보리를 재배하는 밭과 초지, 그리고 사슴농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농장 총책임자는 고려인 양 알렉산드로 일리아(58) 씨.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1995년 연해주로 왔다가 2002년 루비노브카 마을에 정착했다.(상자기사 참조).

‘아그로 상생’ 농장의 개척자로 양 씨를 농장에 데려온 젬추쥐느 농장의 고종석(61) 총관리인(선감)은 “양 씨가 학식이 뛰어나고 농사에 소질이 있어 함께 일하게 됐다”면서 “고려인으로 모범을 보여주어 농장 대부분의 일을 맡기고 있다”고 말했다.

루비노브카 농장에는 양씨 부부 외에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처남 가족 등 10여 명의 고려인들이 인접한 네스테로브카 농장(8,400ha)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마땅한 직업이 없어 생활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저축도 한다”면서 고마워했다.

사슴농장까지 운영하는 양 씨의 한달 수입은 도시 대졸자의 초임 수준으로 일반 농민의 3배에 이른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양 씨의 장남은 농장 책임자로 양 씨를 돕고 있다.

루비노브카 농장에는 메주를 만드는 시설을 갖춰 겨울 농한기에는 고려인과 러시아인들에게 짭짤한 수입원이 될 뿐만 아니라 양국인들의 유대감도 높이고 있다. 이곳의 메주는 북방의 양질의 콩으로 만들어 한국에서 호평을 받아 주문이 꾸준히 늘고 있다.

작년 10월에는 KBS1 TV ‘체험 삶의 현장’ 600회 특집으로 루비노브카 농장에서 콩을 수확한 후 메주와 두부를 제조하는 과정이 소개돼 유해성 논란이 일었던 중국산 수입농산물의 대체 농산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다음날 농장에서 신선한 야채와 콩나물 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항카이스키군 일린카 농장(6,050ha)으로 향했다. 동행한 이유종 종무원장은 충북 옥천이 고향으로 30대 초반까지 농사를 지은 경험을 얘기하면서“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일린카 농장은 콩, 메밀, 옥수수, 귀리, 건초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직원은 80여 명으로 모두 러시아인이다. 세르게이 비탈리비치(33) 농장 책임자는 정중하게 일행을 맞으며 작물 현황 등을 설명했다. 3년째 책임자를 맡고 있는 그는 “농장일을 해 수입이 생긴 것도 좋지만 직원들이 술을 줄이고 도시락을 싸 갖고와 일할 정도로 부지런해진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중ㆍ러 국경을 두고 있는 거대 호수인 항카호에 인접한 아방가르드 농장(9,200ha)은 수로 시설이 잘 정비돼 벼농사가 잘된다. 한국에서와 같은 이앙식이 아닌 파종식으로 농지가 워낙 넓어 과거에는 비행기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영화배우 더스틴 호프만을 닮은 발렌틴 미하일로비치(50) 농장 책임자는 농장마다 동행해 작물을 설명하고 차까지 대접하는 친절함을 보였다.

이날 아방가르드 농장 사무실 앞 공터에서는 이동식 좌판이 열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제품의 80% 이상이 중국산이어서 “연해주 경제는 중국이 쥐고 있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멜구노프카 농장(7,058ha)은 앞의 두 농장 회계까지 맡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곳으로 알렉산드로 이바노비치(62) 관리인은 “작년에 최고 생산 실적을 올려 지프차를 선물로 받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농민 대부분이 텃밭으로 생계만 유지했는데 농장에서 일거리를 제공해 수입이 늘자 이곳에서 일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항카호 주변 휴식처나 가게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이 일행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낸 데는 이런 농장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이어 인접한 뻬르보마이스코에 농장(2만ha), 코미사로보 농장(5,000ha)을 돌아본 종단 관계자는 “앞으로 두 농장을 추가로 인수해 쌀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미래 식량기지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다음 행선지인‘아그라 상생’ 제분공장이 있는 호롤군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선 농장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4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콩이 제분공장에서 특수기술로 분쇄돼, 국내로 들여와 (주)발해농원이 ‘전(全)두부’를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다.

공장 책임자인 김양언(40) 씨는 “콩을 통째로 1,000 메시입자로 분쇄하는 특수기술은 일본과 발해농원 두 군데 뿐”이라며 “기존 두부와 달리 콩의 영양을 고스란히 보존한 전부두는 두부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호롤군은 과거 고려인이 다수 존재하던 곳으로 제분공장에는 고려인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인근 루카세브카 농장(3,500ha)에도 고려인들이 있다. 13년전 키르키스탄에서 연해주로 온 전조야(50ㆍ여) 씨가 농장 책임자를 맡고 있고 사할린에서 온 유종호(47) 씨는 호롤 공장의 전반적인 일을 도맡아 한다.

호롤군에서의 점심식사는 만두국과 샤슬리(꼬치구이), 빵 등 정통 러시아식으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현지 고려인들의 훌륭한 일자리 제공

루바노프카 농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우스리스크 시장은 중국인과 중국물건으로 넘쳤다. “국경을 몰래 넘는 중국인까지 계산하면 연해주 중국인이 100만 명은 될 것”이라는 양일리아 씨의 말이 실감났다.

조선족 동포도 제법 눈에 띄었다. 채소가게에서 장사를 하는 김인순(47) 씨는 “중국 옌지(延吉)자치주 도문시에서 5년 전 건너왔다”며 “중국보다 일거리가 많아서 남편과 함께 왔다”고 했다.

시장을 나와서는 우스리스크 외곽의 수이푼 강가의 이상설 선생(1870~1917) 유허비를 찾아 헌화했다. 1907년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주장했고 연해주에서 ‘성명회’,‘권업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순국 후에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가 이곳 수이푼강에 뿌려졌다.

마지막 날에는 1937년 고려인들을 중앙아이사로 강제이주시킨 역사의 현장을 들렀다.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라즈돌리네역과 고려인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한마당이라는 곳이다. 당시 강제이주된 고려인은 17만여 명으로 추수를 목전에 둔 그해 9월 말부터였다.

종단은 고려인들의 한(恨)을 위무하고 그 후손들의 삶을 보듬기 위해 고려인의 정착촌이 있던 곳의 한마당 농장(800ha)을 매입했다. 이 농장에서는 10여 명의 고려인들이 일하고 있다.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
"고려인들 삶의 터전 만들겠다"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69)은 2000년을 전후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들이야말로 과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이거나 그 후손들일 텐데 다른 지역의 교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권 밖에 놓여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한이든 북한이든 조국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자신들을 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미약하나마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대순진리회는 지난 2000년 국내 종교단체로는 처음으로 러시아 연해주 농장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연해주 아누친스키군 소재 2,700만평의 땅을 50년간 장기 임차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 이후 사업을 확대해 현재 연해주 전역에 걸쳐 3억여 만 평 규모의 대단위 농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최우선으로 농장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종무원장은 연해주와 고려인에 대한 관심과 관련, 크게 세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연해주가 미래 한국의 식량기지가 될 것이라는 것. 앞으로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식량이 무기화할 경우 연해주 농장이 한국의 식량위기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둘째, 연해주의 고려인 상당수가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거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그들에게 ‘꿈의 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셋째, 연해주가 지난 100년 동안 고려인들에게 고난으로 점철돼 ‘포원(抱寃)의 땅’처럼 돼왔는데‘희망의 땅’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대순진리회는 2001ㆍ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연해주 농장 주변 고려인 80명을 국내에 초청, 15일간 한국을 체험하고 한복 등 선물을 건넸다. 앞으로도 매년 고려인들의 모국 방문을 주선해 그들이 연해주에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 고려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고려인 2∼3세를 위해 한국어 학원을 세우고 장기적으로는 이곳 노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양로원, 고아원 등도 세울 예정이다


▲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 수이푼 강가에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 유허비.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
양 알렉산드로 일리아 씨(오른쪽 끈) 가족.
전조야 씨 / 사진설명 좌로부터.
▲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 수이푼 강가에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 유허비.
▲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
▲ 양 알렉산드로 일리아 씨(오른쪽 끈) 가족.
▲ 전조야 씨 / 사진설명 좌로부터.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후손들
연해주에서 새 둥지 마련, 국적문제 등 해결 시급

연해주 고려인 중에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선조의 후손이 꽤 많다. 1990년대 연해주로 돌아온 인원은 4만여 명에 이른다.

루비노브카 농장의 책임자인 양 알렉산드로 일리아(57)씨도 한 예. 양 씨의 조부(祖父)는 1890년대 함경도에서 건너가 연해주에 정착했다가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했다.

양 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19세 때 우크라이나에서 대학입학을 준비하다 돈 문제로 뜻을 접고 95년 연해주로 왔다. 나호드카에서 채소농사를 하던 양 씨는 홍수로 농장이 망가진 뒤 루비노브카 마을로 들어왔다가 ‘아그로 상생’농장 개척자인 젬추쥐느 농장의 고종석(61) 총관리인(선감)과 인연을 맺어 현재 농장에서 일하게 됐다.

양 씨는 “농장에서 일하게 된 데다 러시아 시민권을 얻어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양 씨는 처음 러시아인의 지휘를 받았으나 성실함과 리더십으로 농장 총괄 책임자로 추대됐다. 이후 우즈베키스탄에 남아 있던 처남 가족까지 불러들여 현재 인접한 네스테로브카 농장(8,400ha)에서 일하도록 했다.

양 씨는 “아직 우즈베케스탄으로 끌려갔던 이들의 후손이 많지만 친구들은 나이가 많아서 일하기 어렵고, 젊은이들은 모스크바나 큰 도시로 갈려고 해 연해주까지 오는 인원은 아주 적다”고 말했다.

호롤군 루카세프카 농장(3,500ha)의 책임자인 전조야(50ㆍ여) 씨의 조부는 서울근교에서 1930년대 연해주로 갔다가 1937년 중앙아시아 키르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했다.

전씨는 1993년 연해주로 와 호롤군 학교에서 역사, 지리 과목 교사로 있다 종단 관계자의 통역 등을 도우면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 남편은 소매업과 농사일을 하고 있고 아들 강세르게이(23)는 미국 선박의 원양어선에서 일하며 딸 강이리아(17)는 우스리스크에서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전씨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는 ‘국적’이 중요한데 연해주에서 국적을 갖게 된다면 더 많은 고려인이 이주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