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2년 (명종17) -1613년 (광해군5) 자는 공언(恭彦)

▲ 신도비
김제남은 연안인(延安人)으로 증조부는 영의정 전(詮)이며 아버지는 영의정에 증직된 오(示吳)다.

증조부는 1489년(성종20) 명경과(明經科)에 장원으로 급제해 영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조(淸操: 깨끗한 지조)'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은, 당대를 풍미한 명재상이다.

김전의 형은 안락당(顔樂堂) 김흔(1448-1492)이다. 그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 직제학과 공조참의를 지냈다. 문집에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남곤(南袞)의 서문이 실려 있는 것이 이채롭다.

김흔의 셋째아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다. 희락당은 1506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좌의정에까지 이른 관인이며 그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임금과 사돈을 맺기도 했다. 장원 급제가 이어진 가문이다.

김안로의 종손자인 김제남에 이르러 재차 왕실과의 혼인을 맺게 된다. 그런데 역사는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었고, 역모를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김제남 또한 사사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관을 쪼개서 시신의 목을 벰)의 액을 당했다. 가문에 내려진 영광과 액운이다.

그러나 김제남은 '역적의 괴수'에서 국왕들이 쉼없이 제사를 올릴 정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연안 김씨는 신라의 종성(宗姓)에서 갈려 나온 성씨다.

김제남은1585년(선조18)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94년에 의금부 도사와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1601년 정언, 헌납, 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가 되어 영돈녕부사로 연흥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이때 너무나 조심스러운 겸손한 태도로, 마치 감당하지 못할 듯이 처신했다. 그 뒤 인목왕후가 공주와 대군을 잇달아 낳아 더욱 존귀해졌으나 평소의 태도를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가 교유했던 인물은 당시의 이름난 이들(淸流)이었으나 한결같이 물리쳐 왕래를 끊었다. 이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처세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인 1613년 이이첨(1560-1623) 등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고 서소문 안 자택에서 사사되었다. 6월 1일, 당시 나이 52세였다. 슬하에는 3남 2녀를 남겼다.

둘째아들은 선조 대왕의 사위인 도위공(都尉公) 서경주에게 장가들었다. 서경주는 약봉 서성의 넷째아들로 그 후손이 현달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김제남의 맏손녀는 김광찬(金光燦, 1597-1668)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안동 김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맏아들로 곡운 김수증, 퇴우당 김수흥,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을 낳았다. 문곡 김수항의 아들로는 몽와 김창집,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노가재 김창업, 포음 김창즙, 택재 김창립 등 역사에 이름난 이들이 많아 김제남의 맏손녀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명문가를 연 셈이었다.

평소 자제들에게 "대개 교만하고 사치함은 부귀에서 시작하지 않음이 없다"며 가문의 세업(世業)인 '청백(淸白)'을 특별히 강조했다. 검소하고 신중한 처세를 실천했던 그였지만 천명을 누리지는 못했고 사후인 1616년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그 죄가 재론되어 부관참시라는 극형까지 당했다.

대인(大人) 군자라 하더라도 함정을 파고 그곳으로 물아 넣으려는 이들을 그도 당할 수는 없었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김제남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이러한 억울함을 "복을 얻는 것이 당연하지만(得福爲恒), 그것이 도리어 재앙의 매개가 되었네(而禍之媒)"라고 애도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복권되어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이이첨 일파에게 씻을 수 없는 화를 입었다. 이이첨은 광주 이씨(廣州李氏)로 정인홍과 함께 대북파(大北派)의 영수로 광해군 시대의 정국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가문을 보면 그가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류(士類: 선비의 무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극돈(李克墩)의 5대손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문과에 급제해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내암 정인홍의 수제자를 자처했을 정도로 학문까지 겸비했던 이이첨은 지금까지 희대의 간신으로 역사에 남았다. 사림들에게 무한한 고통을 주었던 적신가(賊臣家)에서 다시 간신으로 전락한 것이다.

김제남의 신도비명은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1588-1644)이 지었는데, 이는 그의 부친인 상촌 신흠을 대신한 것이었다. 신도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 1984년 지정)는 종택이 있는 지정면 안창1리 능촌 건너편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를 업고 있는 거북의 두부 조형이 독특하다. 묘지명 역시 상촌이 지었는데, 이는 모두 왕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인 노씨의 묘지명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김제남은 불천위 중의 불천위다. 인조 반정으로 복권된 그를 위해 역대 왕들의 추모는 줄을 이었다. 가장 명예로운 불천위란 국왕이 친히 제문을 짓고 조정의 관리를 파견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국왕의 제사는 단 한 번만 이루어져도 가문의 영광으로 길이 남게 된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수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니 그 명성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사후에 의민공(懿愍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 사당의 이름이 의민공사(懿愍公祠)로 되어 있다. 사당은 종택 옆에, 그리고 묘소는 그 뒤편 산속에 있다. 사당은 그 뒤 두 차례의 화재를 겪은 뒤 1965년 재건됐으며 1998년 11월 15일 김종원(金鍾元) 의민공사 설립추진위원장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준공되었다. 불천위 제사는 사당에서 모셔진다.

김제남의 둘째딸 인목왕후(仁穆王后)… 19세에 왕비에 책봉

역사상 인목대비로 더욱 유명한 왕후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둘째딸이다. 선조의 계비이다.

인목왕후는 1584년에 태어나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와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낳았다.

광해군이 집권한 뒤 선조의 14남 중 유일한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은 사사되고 왕후는 서궁으로 유폐되었다. 대북파의 의견을 따라 광해군이 저지른 이 폐륜은 정변의 구실로 작용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인목왕후는 그 뒤 인조의 정통성을 인정한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복원됐다. 인조로부터도 극진한 봉양을 받았다.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세상을 떠나 선조와 의인왕후가 묻혀있는 목릉(穆陵)에 잠들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1632년에 지은 인목왕후 만사(輓詞: 죽은 이를 애도하여 지은 글)는 당시 이 가문이 겪은 참혹한 화! 란을 짐작케 한다. 인목왕후의 묘지(墓誌)는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지나간 일을 차마 말로 하리오
궁궐에 유폐되어 몇 해를 지나셨나
왕비 법도에 결점 없어서
하늘의 도가 바로 잡혔지
인조는 대비께 예를 극진히 했거니
이제 온 나라가 함께 죽음을 슬퍼하네
무덤 향해 행상이 멀리 떠남이여
눈물 뿌리며 저 흰구름 바라보네."

여기서 '지나간 일을 차마 말로 하리오(往事那堪說)'라는 귀절에 함축된 의미가 있다.

차마 할 수 없는 1613년(광해군5) 소위 계축옥사(癸丑獄事)의 참혹함은 아들의 죽음과 부친의 사사, 그리고 친정 혈육의 죽음, 모친의 절도 유배(제주도에 8년간 유배), 그리고 자신과 어린 공주의 궁궐 유폐를 말한다. 유폐된 궁은 서궁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이름은 '장추궁(長秋宮)'이었다.

자신의 혈육인 어린 영창대군을 지키기 위해 선조는 임종 때 7명의 신하들에게 후사를 부탁한다는 은밀한 당부를 남겼다. 이것이 소위 '유교칠신(遺敎七臣)'인데 한준겸, 황신, 박동량, 신흠, 서성, 허욱, 한응인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도 옥사를 막지는 못했다.

우의정 정인홍은 "먼저 일곱 신하를 제거하여 영창대군의 날개를 꺾어야 한다"고 국왕에게 주달함을 시작으로 마침내 대군의 목숨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김제남 가문의 큰 인물들

연흥부원군 집은 큰 인물이 많이 난 가문으로 유명하다. 종손이 글 잘하기 어렵고 부자이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과거에 합격한 경우도 드물다. 그것은 종손으로서의 책무가 미리 활동을 제약해서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출사(出仕)보다는 종손의 책무에 중점이 두어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 종손의 증조부가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해 형조판서까지 이르렀고, 4대조 사석(四錫)이 고종 대에 진사, 5대조인 최수가 순조 대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증조부인 김세기는 성균관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 개성유수, 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궁내부특진관 등 구한말까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관인(官人)이다.

근자의 후손 중에는 김덕주(金德柱, 1933년 생) 전 대법원장, 김종운(金鍾云) 전 서울대학교 총장, 김각영(金珏泳) 전 검찰총장 등 저명 인사들이 많다. 불천위 제삿날 참제관 중에도 대학교수, 퇴임 교장 등 다수의 인사가 있다.

▲ 동각산록

둘째손자가 쓴 동각산록(東閣散錄)

계축일기와 유사한 내용이지만 김제남의 둘째손자인 김군석(金君錫)이 직접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 책은 후손가에 보장(寶藏)되었다가 현재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인데, 1602년부터 1709년까지 108년에 걸친 피의 기록이다.

내용은 광해군 대에 집중되어 있다. 전체 12권으로 나누어진 규장각본은 어이없게도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고 해제(解題)하고 있다. 이 책의 뒷면에 소화5년(1930)에 필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김제남의 손자 친필로 보기는 어렵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