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찬성, 진보=반대 이분법적 구도로 대립… 국론 분열 양상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한국과 미국 간의 실리 다툼이 아닌 우리 내부의 이념 논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국가적 중대사를 앞에 두고 찬반 논쟁이 가열되면서 국론 분열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전선(戰線)은 곳곳에 형성돼 있다. 전문가 그룹인 경제학자들끼리도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가 하면 언론들도 보수와 진보의 색깔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쏟아낸다. 아울러 싸움이 격해지면서 ‘보수 진영= 한미FTA 찬성’, ‘진보 진영=반대’의 단순한 이분법적 편가르기도 심해지는 모습이다.

보수 진영 총반격?

한미 FTA 찬반 논쟁이 본격적인 이념 논쟁으로 번진 계기는 지난 3월 출범한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가 얼마 전 ‘한미 FTA 국민보고서’라는 연구 저작물을 출간하면서부터. 범국본 정책기획연구단 소속 학자들과 이론가들이 공동 집필한 보고서 내용 중 일부가 보수 언론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지난 7월30일자 한국경제는 한 개 면을 털어 보고서를 집중 비판했다. 다음은 보도 내용의 일부.

“한·미 FTA를 미국의 동북아 침략 전략으로 규정한 범국본은 저지 운동이 반미ㆍ민중 항쟁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실제 ‘국민 보고서’는 한미 FTA 저지운동을 ‘탈미를 위한 투쟁으로, 신자유주의적 개방과 개혁을 저지하고 (···)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 또는 ‘민족과 반미를 횡단해 제국 통치령에 맞서 공화국 민주주의와 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노동자, 농민을 위시한 민중의 민주주의적 항쟁’이라고 밝혔다. (···)”

한국경제는 사설에서 더욱 강한 논조로 범국본을 몰아붙였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최근 발간한 ‘한미 FTA 국민보고서’는 마치 북한의 온갖 선동적 구호를 그대로 옮긴 듯한 내용을 담고 있어 충격적이다. 시장경제마저 부정하는 세력들이 FTA 반대를 빌미로 극단적 반미운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사실상 범국본에 대해 ‘친북 반미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은 셈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는 조선일보 등 다른 보수 언론들도 빠짐없이 가세했다.

범국본은 한미 FTA 1차 협상이 열린 직후 참여연대, 민주노총 등 300여 개 시민사회단체와 학자,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단체. 이들이 한미 FTA 저지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미 FTA에 대한 국민 여론도 당초 찬성 우세에서 지금은 반대 우세로 역전된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범국본의 보고서 내용 중 일부가 ‘이념적 경도’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싸잡아 공격하는 데는 보수 진영이 범국본의 활동에 흠집을 내려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보수 언론들이 보고서에서 공격 대상으로 삼은 대목은 주로 한미 FTA의 정치적 성격을 해부한 ‘총론’과 ‘1부 정치와 사회’의 일부. 한미 FTA가 우리 경제와 사회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파헤친 실질적 본론 부분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은 셈이다.

현재 한미 FTA가 강력한 반대 여론에 직면한 것은 협정 체결이 우리 경제에 미칠 득실에 대한 정확하고 투명한 분석과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반대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는 것도 한미 FTA가 가져올 부정적 영향이 엄청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범국본의 한 관계자는 “한미 FTA는 국민 대다수가 영향을 받게 될 중차대한 사안이다. 어쩌면 생존권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동의 없이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협상을 반대하는 것인데 이를 어찌 친북이니 좌파니 하는 말로 재단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경제학자들도 찬반 주장 팽팽

현재 많은 언론에서는 “주류 경제학자들은 한미 FTA를 찬성한다”는 주장을 별 거리낌 없이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찬성 입장에 서 있는 주류 경제학자들보다 반대 의견을 가진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움직임이 더 활발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 경제학계의 거목인 남덕우 전 총리는 지난달 23일 한국선진화포럼 홈페이지에 올린 ‘FTA, 멕시코의 경험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한미 FTA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날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과 우루과이라운드,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때도 국내에서 반대가 많았고 걱정도 많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산업이 대체로 성공적으로 적응했고 (우리 경제의) 성장과 발전의 촉진제가 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며 “(부정적 측면을 가진) 멕시코의 경험이 한미 FTA를 무조건 반대할 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남 전 총리는 알려진 대로 ‘성장주의’를 신념으로 3~6공화국 당시 경제정책 브레인을 도맡았던 서강학파의 거두다. ‘성장 신화의 종언’을 선언했던 참여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그동안 비판적 입장을 지켜왔으나 한미 FTA에서 접점을 찾은 셈이다.

이에 앞서 지난 7월 6일에는 171명의 경제학자들을 대표한 김수행 서울대 교수 등 7명의 경제학자가 한미FTA 졸속 추진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날 발표한 ‘한미 FTA 협상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견해’라는 성명서에 원로 경제학자인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의 서명도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변 전 교수는 남덕우 전 총리의 ‘성장주의’에 맞서 한국 경제학계를 양분했던 ‘분배주의’의 대명사격 경제학자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한미 FTA 협상은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경제학계의 오랜 이데올로기 대립이 다시 한번 극적으로 재현된 장(場)이 된 셈이다.

김수행 교수는 이날 “미국 대학 출신의 일부 주류 경제학자들은 한미 FTA에 대한 실증적 근거도 없이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고 있다”면서 “이들은 개방을 통한 효율성 극대화와 일부 재벌기업의 경제적 이윤만을 고려할 뿐 노동자, 농민의 삶과 중소기업의 몰락이라는 결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브레인 역할을 했던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 한미 FTA 반대의 앞줄에 섰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미 FTA 전도사로 불리는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 정문수 청와대 경제보좌관과 한때 한 배를 탔다가 이제는 등을 돌린 셈이다.

한미 FTA와 관련해 신중론을 견지하는 한 경제학자는 “현 시점에서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익이 없다. 한미 FTA 협상은 무엇보다 경제의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무엇이 국익을 위하느냐 하는 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미 FTA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 FTA 협상 문제에 과도하게 드리워진 이념의 그늘을 걷어치우고 주판알이나 제대로 튕겨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협상 테이블에 나가기 전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