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영규정집 표절 시비·노선 배분 문제 등으로 날 세운 대립

“대한항공이 기자들에게 얘기해줬다고 알고 있어요.” “아시아나가 지나치게 무리수를 두는 것 아닌가요?”

국내 양대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공중전이 올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운명적으로 경쟁 관계일 수밖에 없는 두 회사가 항공권 노선 배분 등을 놓고 대립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특히 올들어서는 여러 사건들이 겹치고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더더욱 다툼이 격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올해 두 회사가 처음 이견을 보이며 충돌한 것은 지난 봄 터키 이스탄불과 프랑스 파리 취항 문제. 이때 1, 2차전을 치르며 격전을 경험한 양사의 갈등은 급기야 지난 6월 아시아나 항공기의 우박 파손 사건 때 극명하게 불거졌다.

아시아나, 비상착륙 논란 배후 대한항공 의심

제주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던 이 비행기는 갑작스런 낙뢰와 우박으로 기체 일부가 크게 부숴지며 비상 착륙하는 아찔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당초 이 사건은 “조종사의 침착한 대응으로 대형 참사 위기를 막았다”며 대대적으로 보도가 됐다. 하지만 뒤늦게 이 항공기의 항로 선정에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 드러나면서 사건의 핵심은 ‘침착한 대응’이 아닌 ‘비구름을 피해가지 못한 잘못된 항로’로 급반전된 것.

그런데 아시아나는 이 사건의 급반전 과정에 “대한항공의 적극적인(?) 노력과 개입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즉 대한항공측이 “같은 시간 비행하던 우리 비행기는 다 비구름을 피해갔는데 왜 아시아나항공 비행기만 우박을 맞았는지 모르겠다”며 은근히 아시아나기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섰다는 것.

아시아나의 한 관계자는 “대한항공이 기사화를 위해 관련 보도자료를 들고 언론사를 다니며 돌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원초적으로 문제점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동업자 회사의 잘못을 파헤치고 드러내는 데 앞장서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섭섭한 감정을 표시한 것.

반면 대한항공은 이에 대해 “기자들이 물어 보는 사항에 대해 정확하고 친절히 설명해 줬을 뿐”이라며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쉬운 항공기 항로 문제를 정확한 진실규명 없이 그대로 방치하거나 오도되는 경우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고 반박하고 있다.

대한항공측은 또 “당시 사고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분석하는데 적극 나선 것은 국민 안전을 위한 당연한 처사이며 만약 대한항공의 노력이 없었다면 잘못된 사고가 그냥 미담으로 호도돼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대한항공, "안전운항 바이블 베꼈다" 주장

기체 파손 사고로 촉발된 갈등은 지난달 비행운영규정집(Flight Operations Manual) 표절 시비 공방으로까지 비화됐다.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이 사용하고 있는 비행운영규정이 대한항공의 비행운영규정을 거의 그대로 무단 복제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비행운영규정의 전면 수정 및 사과 광고를 아시아나항공에 요구하고 나선 것. 대한항공은 “수년간 공들여 만든 안전운항 바이블을 아시아나가 훔쳐갔다”고 주장하며 양사의 매뉴얼을 비교하는 자료까지 만들어 그 근거를 제시했다.

아시아나는 이에 반발, 대한항공에 반박 회신을 보냈고 대한항공은 재차 아시아나측에 반박을 조목조목 재반박하는 공문을 보낸 상태. 아시아나는 “항공용어와 각종 규정은 국제적으로 통일돼 있는데 이런 것을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한항공은 아시아나에게 저작권 침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내 양대 항공사들 간의 이 같은 신경전은 사실 외견상 드러난 갈등일 뿐 이면에는 노선 싸움과 이해의 충돌이 걸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가 갖고 있다가 IMF 때 정부에 운항권을 반납했던 터키 이스탄불 노선에 대해 올 초 대신 취항을 시도했을 때 아시아나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홍역을 치렀다.

이어 양사는 한국과 프랑스 간의 항공협상 때는 아시아나의 파리 복수 취항 문제로 또 한 번 감정싸움을 벌였다. 당시 쟁점이 된 인천-파리 노선의 복수 취항 건을 둘러싸고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을 맹비난한 것.

대한항공은 당시 “대한항공이 프랑스 정부에 로비를 하고 있고 프랑스 정부가 대한항공을 지나치리 만큼 감싸고 돈다”는 기사가 현지 언론에 났는데 “이런 기사는 아시아나측의 공작(?)이 없으면 실릴 수 없는 기사”라며 날을 세웠다.

국제노선 배분·확장 놓고 기싸움

두 항공사는 올 가을 중국 노선을 둘러싸고 또 한바탕 결전을 앞두고 있다. 지난달 열린 양국 항공회담에서 주 204회(33개 노선)였던 운항 편수가 401회(43개 노선)로 2배 가까이 확대되면서 시장 확장을 놓고 사활을 건 경쟁이 불가피해진 것.

벌써부터 대한항공은 “증편되는 기존 운항노선을 2004년 중국노선 배분 시 정부가 적용했던 지침대로 즉각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시아나항공은 “이번 한중 항공회담이 결과적으로 우리 회사에 불리하게 진행됐다”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양사의 이 같은 충돌과 갈등에 대해 일부에서는 “또 싸우냐”는 우려의 소리도 크지만 “어차피 경쟁과정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양사 입장에선 앞으로 노선 배분과 확장 등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선점 효과를 얻기 위해서도 충돌은 어쩔 수 없다는 것. 또 최근 아시아나가 복수취항과 노선확장에 적극 나서고 있는 데다 그룹사인 금호가 대우건설을 인수하고 뒤이어 대한통운 인수전 참여까지 노리는 등 사업 확장에 적극 나서고 있어 대한항공으로서는 이를 견제하려는 의지가 작용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아시아나측은 이에 대해 겉으로는 “사업을 하다 보면 동종업체끼리 없을 수 없는 것이 경쟁인데 굳이 삐딱하게 볼 것은 아니다”며 주변의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대한항공측도 또한 “외견상 다투는 모습이긴 하지만 제3민항 취항 등 복잡한 항공 시장 환경에서 원칙과 기준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경기 불황과 고유가로 경영여건이 갈수록 나빠지는 현실에서는 시장점유율을 더 높이기 위해 두 항공사들이 한 동안 더 치열한 싸움을 벌일 망정 화해와 휴전을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