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조선총독부·친일파가 강탈한 토지 등 재산 되찾기 목소리 높여

“우리가 진정 광복이 됐나요? 독립운동 하느라 일제에 강탈당한 재산을 돌려받지 못하는 한 광복을 인정할 수 없어요.”

독립운동가 정인호(1869~1945년) 선생의 후손인 정진한(83) 씨는 최근 정부가 친일파 재산을 뒤늦게나마 국고로 환수하는 것을 환영하면서도 가슴에 ‘옹이’처럼 박힌 조부의 한을 풀지 못해 씁쓸하다. 일제에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 조부의 한을 풀고 민족 정기도 바로세울 수 있어 진정한 광복을 맞는다는 것이다.

정인호는 구한말 경북 청도군수(1899)를 지냈으며 1911년 ‘105인 사건’때 이승만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연행돼 고문을 받았다.

일제의 관직 유혹을 뿌리치고 1919년 대한독립구국단을 결성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국내의 한규설, 윤용구 등 100여 명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추천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5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정인호는 이런 공훈을 인정받아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당시 정 씨의 조부 이외에 아버지, 작은 아버지 등 가족이 옥고를 치렀고 출감해보니 서울 청량리 일대 토지 5,096평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몰수돼 있었다.

정인호의 후손들은 조상이 독립운동에 가담했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1911년 법원의 화해조서에 의하면 문제의 땅이 정인호 소유임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1919년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던 와중에 국유지로 편입된 것을 문제삼다 군자금 모금활동으로 구금돼 정인호의 정당한 주장이 수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산 몰수·친일파에 불하 등으로 피해

▲ 독립운동가 김세동 선생

독립운동가 김세동(1870~1945) 선생 역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토지를 빼앗긴 경우다.

김세동은 1915년 태백산에서 독립운동 공급용 무기를 제조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을 복역하고 1918년에는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이유로 2년3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공훈으로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김세동은 조선 시대 거유(巨儒) 학봉 김성일의 후예로 선조인 김화진과 김건수 때 강원도 삼척군 일대에 주위 100리 산 전체를 사패지로 포상받아 김세동의 아버지인 김병락 단독명의로 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김병락 명의 토지를 1923년 임야조사사업 때 국유 임야로 귀속시켰고 이에 김병락이 1924년 불복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이 사건은 일제시대 국유 임야분쟁 6대사건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으며 김세동 후손인 김용훈(51) 씨는 “일제가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될 것을 염려해 의도적으로 임야조사에서 국유림으로 사정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개정 산림법에 의거 퇴계 이황의 봉화 청량산 임야, 유성룡의 안동 병산 임야 등을 인정하면서도 김병락 명의 임야는 돌려주지 않은 것은 3대(김병락-김세동-김택환)가 독립운동하다 체포된 것과 관련있다는 것이다. 김병락-김세동 후손들이 새롭게 제기한 소송은 서울지법에 계류 중으로 그 귀추가 주목된다.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일제가 토지를 강탈한 예는 부지기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구한말 대표적 의병대장 이강년(1858~1908) 선생의 예가 그러하다. 이강년은 동학농민운동(1894), 을미사변(1895), 1907년 일본 침략이 노골화될 때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웠다.

이강년의 후손들은 조부 때문에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 살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인 3명과 일경으로 종사했던 한국인 1명이 이강년 소유의 경북 문경군 가은읍 완장리 일대 토지 3,000여 평을 강탈해 갔다고 주장한다.

손자인 이인규(80) 씨는 “조부의 항일 이력 때문에 가족이 숨어지내는 사이 문경 총독이라는 경찰과 한국인 경찰 이모 씨가 부친을 총칼로 협박해 ‘매도’한 것처럼 강제로 도장을 찍게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문경 땅은 해방 후 국유지로 됐다가 어느 순간 다시 이모 씨 소유로 됐는데 지난해 부친의 산소를 옮기라고 해 울분이 치밀었다”며 “강도가 주인한테 집을 나가라는 것 아니냐”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가의 재산을 직접 몰수하지 않고 친일파에게 불하한 경우도 있다. 구한말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가 체포돼 처형된 장윤덕 대장의 재산 피탈이 그런 경우이다.

장윤덕(67년 건국공로훈장 추서)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예천읍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던 인물로서, 1907년 4월 의병을 일으켰고 같은 해 9월 36세의 나이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다.

후에 일제의 산림법에 따라 만들어진 임야조사위원회는 1915년 ‘장윤덕은 배일도배’라는 이유로 장윤덕 소유의 경북 예천군 보문면 수계동 산147번지 일대 40여 만 평의 땅을 친일파인 보문사 최성환 주지의 소유로 하라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장윤덕의 손자 장기봉(76) 씨는 1969년부터 50여 차례에 걸쳐 잃어버린 땅에 대한 소유권 반환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각계에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서류상으로는 이 땅 임야가 장윤덕 소유임을 입증하였지만 시효가 걸려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 홍현주(1882~1945) 선생은 비밀결사운동에 가담함으로써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던 기간에 토지신고를 하지 못하게 돼 재산을 피탈당한 경우이다.

홍현주는 한일합방 직후였던 1910년대 대표적 비밀결사체였던 풍기광복단(1913~1915년)과 후속 조직인 대한광복회의 비밀결사체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서, 1918년에 체포되어 10개월여 수감생활을 마치고 만주로 건너가 대성학교 교사를 하였다. 1924년 국내로 잠입,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체포돼 1년6개월의 형을 살았다. 1990년 대한민국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후손인 홍의찬(76) 씨는 “조부께서는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던 1913~1918년에 비밀결사운동에 가담해 토지신고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러한 정황을 알게 된 5촌 홍모 씨가 연고자로 등록하고 공모자 정모 씨에게 명의이전을 해 토지를 잃게 됐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핍박으로 재산을 관리하지 못해 제3자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경우도 있다.

구한말 의병장인 신인로(1871~1919) 선생은 을사늑약 때 구권회복운동에 참여, 강원도 일대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 항일대열에 나섰고 1907년 고종이 물러나자 의병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돼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7년 만에 출옥했다.

1919년 3ㆍ1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옥중 후유증으로 그해 49세로 사망했다.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신인로의 3남 형집, 4남 규집, 사촌동생 형집은 비밀 토벌대(무량대도)를 결성, 일경을 공격하고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다 일경에 체포되거나 도망다녔다.

손자인 신재문(52) 씨는 “일경의 감시로 고향에서 쫓겨나 산속에서 살았으며 부친은 심마니 생활을 했다”며 “재산은 관리는 물론 소재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일대에 조상의 땅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 독립운동가 염온동 선생

독립운동가 염온동(1897~1946) 선생은 가족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조국에 있는 재산을 관리할 겨를이 없었다.

염온동은 1919년 3ㆍ1운동 때 간도 독립단체와의 연락을 맡아 활약하다가 세 차례나 투옥되었고 1921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 1929년 난징(南京)에서 한국혁명당 간부, 1941년 중일전쟁 때는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 사무과장, 광복군 사령부 서무과장,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아들인 염락원(70) 씨는 “광복 후 재산을 찾을 생각조차 못했고 강원도 금화군은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출입이 어려워 최근에야 조상의 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입법 추진중인 ‘독립운동가피탈재산의 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에 따르면 ‘독립운동가 피탈재산’은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가 독립운동에 관여함으로써 또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인해 일제 당국 또는 부일협력자에게 강탈당한 재산’으로 정의된다.

이 분야 전문가인 백동현 박사(고려대 강사)는 “독립운동가 피탈재산을 일제나 부일협력자에 의해 강탈당한 경우 외에도 독립운동참여로 인해 소유권을 상실한 케이스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입법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진한 '독립운동가 피탈재산 회복운동모임' 회장
일제 피탈 재산찾기 60년… 입법청원 나서

▲ 독립운동가 정인호 선생
▲ 정진한 '독립운동가 피탈재산 회복운동 모임' 회장 / 김지곤 기자
"독립운동가 재산을 일제가 강탈한 것은 '장물(贓物)' 인데 정부가 그러한 장물을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의 것으로 인정한다면 '장물아비' 정부 아닙니까? 정부가 그런 장물을 환수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정부도 처벌받아야 해요."

독립운동가 정인호 선생의 손자 정진한(83) '독립운동가 피탈재산 회복운동모임'회장은 "정부가 독립운동가의 피탈 재산을 회복하는 데 항상 소극적이었다"면서 울분을 토했다. 입법은커녕 청원조차 제대로 답변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 회장이 '조상의 땅 찾기'에 나선 것은 무려 60년이나 된다. "일제에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만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쳤던 조부의 원혼을 달래고 나아가 진정으로 일제의 식민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세울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는 1950년 조부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왕래서신철을 들고 이 전 대통령을 찾아갔으나 당시 자유당 정권의 감찰위원장 강모 씨 등의 '인의 장막'에 막혀 이 전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관련 서류 등을 일부 분실하였다.

박정희 정권 때도 정부기관을 상대로 백방으로 재산권 회복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1970년대 재무부를 상대로 탄원서까지 제출하기도 했지만 돌아온 것은'현행법 체계상 불가능하다'는 무심한 답변뿐이었다.

그는 또 1993년 각 독립운동 단체 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가 피탈재산보상법 입법추진위원회'를 결성해 국회에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는 현행법 등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외면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특별법 제정 등 근거 법령이 마련돼야 가능하다'는 회신만을 받았다.

그는 그동안 재산권 회복에 전력하는 한편, 20년 가까이 국회에 출근하며 독립유공자를 위한 주요 법률을 청원, 입법화하는 데도 앞장섰다.'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1994)','독립유공자생존지사특별예우금(1997)','독립유공자자손대학특례입학청원(1997)','독립유공자수권유족의료보호확대(1997)'등 18개 법률과 시행령이 모두 정 회장의 작품이다.

지난해 8월엔 조부의 항일투쟁 기록을 담은 책('끝나지 않은 항일 투쟁',신원기획 출판)을 발간, 국회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기도 했다.

요즘은 '독립운동가피탈재산의 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이 올해 정기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고 있다.

"미군이 이 땅에 진주한 이래 자국민의 재산권 보호에 최대 역점을 두었던 사실에 비춰 일제에게 강탈된 항일 독립운동가의 토지마저 돌려주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이냐"고 정 회장은 물었다. 그 답은 누가 해야 할까.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
"독립운동가 재산권 회복은 국가의 의무"

▲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 / 박철중 기자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친일파 재산의 국고 환수 작업이 18일부터 본격화됐다. 이는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환수 특별법'이 있기에 가능해졌다.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던 열린우리당 최용규 의원은 최근 일제에 의해 강탈된 독립운동가의 재산권을 환수할 수 있는 근거 법률도 마련하고 있다. '독립운동가피탈재산의 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이 그것.

최 의원은 "친일파 재산환수 특별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입법이 수월하다"면서도 법리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가다듬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범위를 한정한다 하더라도 '피해자'를 어떻게 증명하는냐 하는 문제, 강탈당한 재산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리고 피탈 재산의 재산권 변동에 따른 재산권 회복 및 정부의 보상에 관한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재산권 변동과 관련, 국가에 귀속된 형태로 남은 경우는 '장물'성격을 지니므로 재산권 회복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없으나 선의의 제3자가 취득한 형태로 소유가 바뀐 경우는 토지를 되돌려 주라고 한다면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그 경우엔 국가가 '정의 회복'차원에서 보상하는 게 순리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공청회를 통해 법리상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정리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오는 정기국회 때 특별법을 상정할 예정이다.

최 의원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재산은 물론 자식조차 돌볼 수 없었던 순국선열에 대해 그에 상응한 예우를 하는 것은 국가의 역사적ㆍ도덕적 의무"라며 "국가가 최고 선(善)을 지향하는 도덕적 존재로서 '시효'라는 법기술로 정의를 외면해선 안 된다"며 특별법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