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전정혁 씨 1980년부터 중국 동북 3성 돌며 독립군가 채록

“창검빛은 번개같이 번쩍거리고/ 대포알은 우레같이 퉁탕거릴제/ 우리 군대 사격돌격 앞만 향하면/ 원수머리 낙엽같이 떨어지리라 …”(용진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건너라/ 악독한 원수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보세…”(독립군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독립군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와 싸우면서 불렀던 노래들이다.

독립군가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항일전쟁에 대한 소명과 승리에 대한 신념, 생사를 초월한 희생정신, 조국에 대한 사랑 등을 공통으로 담고 있다. 노래로서의 독립운동사인 셈이다.

하지만 독립군가는 광복에 이어 조국이 분단되고 남북 대결, 고증의 어려움 등으로 상당 기간 묻혀져 왔다. 일부에서 독립군가를 발굴, 보존하기도 했지만 독립군가가 주로 무력투쟁이 가능했던 국외, 특히 만주로 통칭되는 중국 동북 3성(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을 중심으로 불려졌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러한 공백을 메우고 나아가 만주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데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신빈현(新濱縣) 문화관에 근무하는 조선족 전정혁(57) 씨의 역할이 상당했다. 전 씨는 지난 8월 친척 방문 차 한국에 왔다.

전 씨가 독립군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로 중국 동북3성을 돌며 본격적인 독립군가 채록에 나선 것은 80년부터다. 전 씨가 독립군가와 독립운동사 연구 인생을 바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부친은 소학교 교사로 독립운동에 헌신

전 씨의 조부는 1916년 일제의 학정과 수탈을 피해 고향 평북 연천을 떠나 중국 신빈에 정착했다. 부친 전병균은 (연천)중학생 때인 1919년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회를 조직했다가 제적당하자 신빈으로 들어가 인근 삼원포에서 소학교(초등학교) 교사를 하였다.

그는 1923년 항일독립단체인 정의부(正義府) 김두칠의 소개로 중국 광저우(廣州) 황푸군관학교에 입학, 보병부대를 졸업한 뒤 북벌혁명에 참가했고, 1927년 광저우 항일투쟁에서 일본경찰에 쫓기자 임시정부로 건너가 활동했다.

광복 후엔 신빈에 신광 소학교를 설립하고 신빈 조선족 중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 그리고 전국 소수민족 대표로 랴오닝성 정치협상회의 위원(도의원에 해당)을 지냈다.

전정혁 씨는 신빈 조선족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중국 문화대혁명에 따른 ‘하방(下放, 중국이 공직자ㆍ지식인을 개조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한 것)’운동으로 신빈 왕칭먼(旺淸門)으로 내려갔다가 독립군가를 처음 들었다.

왕칭먼은 1920~30년대 남만주 독립운동의 메카로 전 씨는 5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항일 영웅 양세봉 장군 부대에서 활동한 한석주 노인 등 독립군들을 만났다.

하방이 끝난 후 전 씨는 왕칭먼 중학교 교사, 문화관리소 소장을 하면서 조선족 민요와 독립군가를 수집했다. 83년 옌볜(延邊) 예술학교에서 민족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신빈현 문화관원으로 근무하면서 85년부터 동북 3성을 돌며 본격적으로 독립군가를 채록했다.

항일전쟁사에 빛나는 김좌진ㆍ홍범도 부대 독립군을 비롯해 양세봉 장군 부대원, 무명의 독립군들을 만나 독립군가를 기록하면서 자연스럽게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게 됐다.

전 씨는 그 중에서 신빈 일대가 주 활동무대였던 양세봉 장군을 주목했다.양세봉은 항일전쟁시기 “북만주엔 홍범도, 남만주엔 양세봉”으로 불릴 정도로 1920~30년대 항일 영웅으로 알려졌다.

양세봉은 1920년께부터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투신, 1923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대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1929년 신빈에서 무장항일단체인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제1 중대장을 거쳐 총사령관이 돼 남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1932년에는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이춘윤과 한중연합군을 조직, 융링제성(永陵街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싱징현성(興京縣城)을 함락시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독립운동사에서 양세봉처럼 항일부대를 조직해 한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10년 가까이 무장투쟁을 벌인 인물은 흔치 않다. 정부는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양세봉 장군 활약상 알리기에 주력

전정혁 씨는 95년 양세봉 장군이 활약했던 왕칭먼의 조선족 소학교에 동상을 세우는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99년부터 매년 양세봉 장군 전적지가 위치한 지역의 조선족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양세봉 장군컵 작문 콩쿠르’를 개최, 민족의 정체성을 고양하고 있다.

지난해 8회 대회까지 7,480명의 학생이 참여하고 조선족 언론, 학술단체 등이 대대적으로 지원, 이제는 랴오닝성의 유명한 민족행사로 자리잡았다.

▲ 양세봉 장군컵 콩쿠르에 입상한 중국 조선족 학생들.
▲ 양세봉 장군 흉상 앞에서 전정혁씨와 양세봉 장군 친조카.

전 씨는 95년 독립군들이 불렀던 용진가, 협사가(안중근 노래), 조선의용군 노래, 조선혁명군가 등 120수를 모아 ‘중국 조선족 항일투쟁 노래집’(요녕성 민족출판사)를 발간했다.

같은 해 10월, 베이징서 열린 중국 조선족 항일투쟁 토론회에서는 새로운 자료를 토대로 ‘독립군 용진가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발표, 특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 씨는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천착, 실증적인 방식으로 오류를 바로잡기도 했다. 93년 7월, 헤이룽장성 해림에서 열린 ‘김좌진 장군 연구토론회’에서 전 씨는 김좌진 암살 배경에 대한 논문을 발표, 김좌진이 일제와 결탁했다는 중국 공산당의 기록에 대해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반박해 토론회에 참석한 김좌진 장군의 딸 강석 노인(2004년 사망)이 감사를 나타내기도 했다.

전 씨는 “독립군가를 통해 역사 속에 가려진 항일투쟁사를 새롭게 조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독립군가를 발굴, 복원하는 것이 역사를 보존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의미다.

전 씨는 수많은 독립군가 중 양세봉 장군이 이끌던 조선혁명군소년단에서 15세에 통신원으로 활동했던 김효순 노인이 부른 ‘용진가’와 김좌진 장군의 딸 강석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출정가’가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전 씨는 “앞으로도 의무감과 자부심을 갖고 독립군가를 부를 것”이라며 “제2의 독립운동에 동포들이 많이 참여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독립군의 사기를 고취하고 광복의 희망을 주었던 독립군가는 정작 우리 땅에서는 잊혀져 가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이 점차 노골화하는데 반해 우리의 대응이 미숙하고 뒷북치는 격이 된 데는 우리들의 집단적인 ‘역사 망각’과 무관하지 않다. 선조들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해내고 ‘제2의 독립운동’에 나서야 할 당사자는 오히려 우리가 아닐까.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