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제약사와 무한경쟁… 수익감소→신약개발 중단 악순환 우려

▲ 한미 FTA 3차협상 김종훈 한국측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미국측 수석대표가 7일 새벽(한국시간) 새이틀 구 역사산업박물관에서 열린 본협상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시애틀=연합뉴스
‘차라리 이럴 바엔 한미 FTA 협상이 중단됐으면….’ 지금 국내 제약사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의약품 분야 줄다리기가 한창 진행 중인 요즘, 국내 제약업계는 초상집 분위기다.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협상이라 차마 대놓고 반기를 들진 못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머지 않아 닥칠 대변혁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다”며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

한미 FTA 협상, 건강보험 의약품의 선별등재, 생동성 시험 강화라는 ‘카운터펀치’를 연타로 맞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더구나 미국 제약업계의 요구사항을 치밀하게 협상에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웬디 커틀러 FTA 미국측 수석대표가 시애틀 3차 본협상의 중점 과제로 의약품 분야를 첫 손가락에 꼽았을 정도로 단단히 벼르고 있는 상태라 더 그러하다.

이에 한국제약협회는 지난 8월 2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미 FTA 의약품 협상 때 무언의 시위를 벌인 데 이어 5일 문성태 부회장과 지적재산권, 특허, 약가 전문가 등으로 FTA 대책팀을 꾸려 한미 간 3차 협상이 열리는 미국 시애틀로 급파한 것도 업계의 위기감 때문이다.

업계는 “정부가 만일 미국의 요구 사항을 곧이 곧대로 수용했다간 국내 제약산업이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고사하고 말 것”이라고 아우성이다. 그 실상과 대응 움직임을 알아본다.

폭풍전야의 긴장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의 지식산업이자 바이오테크놀로지(BT)의 총아로 한국경제를 이끌 차세대 성장동력인 제약산업.

1980년대 시장 개방 이후 약 30년간 보수적 경영을 유지해온 국내 제약사들이 정부의 의약가 인하 조치와 한미 FTA 협상 결과에 따라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게 된다. 건강보험 의약품 선별등재, 생동성 시험강화 조치 등에 따라 연간 8조원(2005년 기준)의 시장을 놓고 다국적 제약사들과 수백 개에 달하는 국내 제약사들이 뒤엉킨 일대 혼전이 벌어질 판이다.

의약품 선별등재는 약효가 좋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경제성을 갖춘 의약품만을 엄선해 건강보험 적용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고 생동성 시험은 제약사가 복제약을 판매 허가를 받기 전 실제 사람에게 투여하여 오리지널 약과 똑같은 약효를 내는지 여부를 증명하는 절차다.

국내 제약업계 위기감의 배경은 다국적 제약사의 지재권 강화, 의약품 선별등재에 따른 경쟁 격화로 매출이 줄어 수익성이 악화하는 것이다. 수익이 감소하면 연구개발(R&D) 돈줄이 막혀 신약 출시를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은 뻔하다는 지적이다. “거대 자본ㆍ기술력ㆍ브랜드 파워로 무장한 다국적 제약사와의 경쟁도 힘에 부치는 판에 220여 곳의 국내 제약사끼리도 사투를 벌여야 하니 죽을 노릇”이라는 하소연이다.

신약과 개량신약, 복제약(제네릭) 등 연 매출 100억이 넘는 소위 ‘블록버스터’ 제품을 최소 1개 이상 갖고 있고 R&D 기술력까지 겸비한 동아제약, 유한양행, 한미약품, 대웅제약, 녹십자 등 ‘빅5’의 경우 그나마 유리할 수 있다는 전망도 일부 나오고 있지만 한미 FTA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2000년 의약분업에 버금갈 정도의 변화가 올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국내 제약산업 기반 붕괴에서 더 나아가 ‘제약주권’마저 잃을 수 있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활로찾기 정중동 행보도

물론 발빠르게 대처하는 업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일찌감치 TF팀을 꾸려 기존 국내외 제약사들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면서 묘수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최근 국내 제약업계의 화두는 복제약과 개량신약 개발이다. 2004년 한미약품이 국내 최대 매출의 처방의약품 ‘노바스크(한국화이자ㆍ고혈압 치료제)’를 국산화한 개량신약 ‘아모디핀’이 지난해 연 매출 400억원의 대박을 터뜨리면서 국내 제약사들의 새로운 생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된 것.

신약에는 예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약물인 오리지널 제품과 특허가 만료된 기존 오리지널 제품과 똑같이 만든 복제약. 두 종류가 있다. 개량 신약은 이 두 가지의 중간 단계로 특허가 끝난 기존 약물의 분자구조나 치료 용도 등에 변형을 가해 새롭게 만든 약이다.

개량신약과 복제약 출시는 신약 투자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료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환자들에게도 혜택을 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를 가진 신약이 1,000원이라면 복제약의 약값은 800원 선으로 20% 이상 저렴하다.

현재 대부분의 국내 제약사들은 특허가 만료되는 다국적 제약사의 신약 목록을 줄줄이 꿰고 복제약이나 개량신약 제품의 개발 분야에서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중에는 신약 개발로 매출에 날개를 단 성공사례도 있다. 동아제약의 ‘스티렌(위염 치료제)’, 부광약품의 B형간염 신약 ‘레보비르캡슐(성분명 클레부딘)’이 대표적이다. 자이데나와 스티렌의 경우 천연물질 이용이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레보비르캡슐은 대규모 시장 분야에서 신약 개발 및 판매권을 미국으로 역수출하는 쾌거까지 올렸다는 점에서 블루오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건강보험 혜택을 부여하는 전문의약품이 아닌 일반의약품 분야에서 거금을 벌어들이는 ‘캐시카우’를 일군 사례도 있다. 대웅의 코엔자임큐텐이 그것. 전문의약품의 주성분 중 하나를 추출하여 만든 것으로, 국내 제약산업의 강점 중 하나인 한방과 천연물질을 적극 이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리지널 신약 개발의 경우 평균 3억~5억 달러의 투자금과 10~15년이란 장기간이 소요되는 반면 신약 후보물질 발견에서 신약 출시까지의 성공 확률은 1만분의 1 수준으로 위험부담이 크다. 이에 따라 국내 업체 중에는 신약으로 다국적 제약사와 맞서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곳도 있다.

중외제약 박구서 전무는 “수액 분야에 집중 노력한 결과 연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다”며 “국내 제약사들이 전문화와 특화 전략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제약협회 장우순 차장도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제약사들 중에는 피임이나 여성호르몬, 당뇨병, 안과 질환이나 조영제 등에 특화한 전문기업들도 수두룩하다”고 한우물 저전략에 동조했다.

결국 앞으로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선호하는 제약사, 감기 걸린 사람이 먼저 찾는 브랜드가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송강섭 기자 speci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