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서 "생식기형·성조숙 유발" 충격보도로 파문 확산주부들 "반찬 이젠 어디에 담나" 걱정… 일부선 "과민 반응" 반론

‘플라스틱 용기를 데울 때 발생하는 환경호르몬이 남성의 여성화, 성조숙증 등 희귀병을 유발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플라스틱 공포증’을 몰고 온 방송사의 환경호르몬 프로그램(SBS 스페셜- 환경호르몬의 습격)의 주장이다. 사실 환경호르몬과 플라스틱의 관계는 아직 명확히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불안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냉장고에 있는 플라스틱 반찬통을 죄다 유리로 바꿨다.” “플라스틱통에 들어있는 올리브유가 그렇게 안 좋다고 하죠. 그럼 뭘 먹나.” “환경호르몬, 너무 무섭고 두렵고 소름까지 끼친다.” 방송 이후 플라스틱 공포가 주부들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가히 노이로제 수준이다.

왜 이토록 환경호르몬의 공포에 떨게 됐나. 현대인에게 환경호르몬은 그토록 위협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가. 실상을 알아본다.

환경호르몬 노출 실태

그간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은 비단 이번 플라스틱 파동만이 아니다. 1998년 컵라면 용기의 폴리스틸렌으로부터 환경호르몬의 의혹이 있는 화학물질이 흘러나왔다는 보고가 발표되면서 환경호르몬은 일반인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에도 다이옥신, 랩 파동 등 끊이지 않는 환경호르몬 검출 소식이 해마다 흘러나오고 있다.

환경호르몬이란 인간이 만든 환경 오염물질에서 생겨난 가짜 호르몬이란 뜻. 1997년 5월 일본 학자들이 한 방송에서 ‘환경 중에 배출된 화학물질이 생물체 내에 유입되어 마치 호르몬처럼 작용한다’고 한데서 명명된 용어다. 이렇게 가짜 호르몬이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로 들어와 마치 진짜 호르몬처럼 체내의 성장 프로그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환경호르몬이 함유된 물질이 아직 체내에 성장 프로그램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위협 하고 있다는 것. 아기 젖병, 장난감, 미술 교재, 놀이방 매트 등 어린 아이들의 손길이 닿는 용품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환경 호르몬이 잇따라 검출되고 있다.

국내서 유통되는 유아용 장난감 10개 중 4개는 생식기능 이상과 암 등을 유발할 수 있는 환경호르몬 디에틸헥실프탈레이트(DEHP)와 프탈레이트계 가소제(DINP)를 함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지난해 시중에 유통되는 유아용 장난감 26종을 대상으로 안전검사를 실시한 결과에서 밝혀졌다.

소비자시민모임(소시모)이 최근 서울 시내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장난감 42점에 대해 한국생활환경시험연구소에 유해물질 검출 실험을 의뢰한 결과에서도 말랑공, 안경, 지우개 등 3개 제품에서 디에틸헥실 프탈레이트, 디이소닐 프탈레이트, 디부틸 프탈레이트(DBP)가 발견됐고, 어린이에게 유해한 중금속도 검출됐다.

심지어 아기의 손과 발, 엉덩이 등을 수시로 닦는 물티슈에서도 포름알데히드(formaldehyde)가 국내 안전 검정 기준(30ppm이하)의 7배인 210ppm이나 나왔다. 이는 인체에 과다 노출시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며 발암물질로도 알려져 있다.

가정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가족 건강의 바로미터가 되는 주방용품에서도 환경호르몬과 유해물질이 발견돼 가정의 안전 관리에도 비상이 걸렸다.

소비자모임이 유아용품과 더불어 종이냅킨, 키친타올, 고무장갑 등 19개 주방용품 제품을 검사한 결과 고무장갑 9개 중 2개에서 디엘틸헥실프탈레이트와 디에틸헥실 아디페이트(DEHA)가 검출됐다. 또 병 음료제품 13개 중 9개 제품의 병 뚜껑(음료 접촉부분)에선 생식 독성에 대한 우려가 있는 디이소데실 프탈레이트(DIDP)가 나왔다.

환경호르몬 얼마나 위협적인가

1996년 세계야생생물보호기금(WWF) 고문인 미국인 동물학자 테오 콜본 여사와 더마노스키, 피터슨 등은 공동저서 ‘도둑맞은 미래’라는 책에서 환경호르몬의 섬뜩한 위협을 경고했다. 미국 야생 조류 일부가 생식 및 행동장애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인간의 경우 먹이 사슬을 거치면서 2,500만 배 이상의 농축 효과를 보일 수 있다고 경각심을 촉구했다.

당시 커다란 이슈를 몰고 온 환경호르몬 가설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환경호르몬의 정체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인간의 생식기능 저하, 기형, 성장장애, 암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성제일병원 산부인과 한정열 교수는 “임산부가 환경호르몬에 노출되면 에스트로겐 같은 여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면서 (남자) 아기의 생식기형이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인제대 의대 서울백병원 소아과 김우경 교수 또한 “환경호르몬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뚜렷하게 증명된 바는 없지만, 학계에선 알레르기 질환에서 호흡기 질환, 폐암의 연관성까지 보고되고 있다”며 “특히 어린 아이의 경우 노출 기간이 길고, 면역력이 약해 환경호르몬의 위험성이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환경호르몬에 현명하게 맞서려면 우선 환경호르몬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하지만 불행히도 현재로는 통일된 환경호르몬의 물질분류 기준도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다. 세계자연보호기금은 농약 41종과 다이옥신 등 67종을, 일본 후생에서는 143종을, 미국에선 73종의 화학물질을 환경호르몬으로 규정하고 있다.

환경정의시민연대 강명숙 팀장은 “해마다 수천, 수만 종의 화학물질이 새롭게 양산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얼마나 많은 환경호르몬이 생겨날지 가늠조차 어렵다”며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강화하고, 친환경 생활로 환경호르몬의 발생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과민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소비생활연구원 이보람 연구원은 “환경호르몬과 질병의 관계가 아직 증명된 바 없다”면서 “그렇지만 플라스틱 등 환경호르몬을 유발하는 제품에 대해 올바로 알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표> 소비자시민모임 소비자리포트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