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병원 신규 채용 때 "2년 지나야 결혼 가능" 서약서 요구 파문병원 내 폭언 등 스트레스도 심해… 결국 의료서비스 질 저하 불러

간호사들의 결혼과 임신 등을 제한하는 서약서를 받아온 한 대형병원의 사례가 밝혀지면서 간호사들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9월 전남 순천의 성가롤로병원 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 지부)은 병원측이 남녀고용평등법 7조와 11조를 위반했다며 지방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노조측이 문제로 삼은 것은 신입 간호사들이 병원에 제출해온 서약서의 일부 반(反)인권적 내용들이다.

실제 노조가 공개한 서약서에는 ‘입사 2년이 지나야 결혼이 가능하다’, ‘혼전 임신시 사직을 원칙으로 한다’ 등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조항들이 명시돼 있었고, 맨 아래에는 신입직원과 간호부장이 함께 서명하도록 돼 있었다. 노조에 따르면 병원측은 지난 2004년 9월부터 이 같은 서약서를 신입 간호사들로부터 제출받아 왔다.

이에 대해 병원측은 서약서 제출이 병원의 공식 내규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간호사들을 총괄 관리하는 간호부가 자체적으로 서약서 제도를 운영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 병원 인사행정팀 관계자는 “간호부에 여성 직원들이 많다 보니 원활한 운영을 위해 자체 규정을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한 사실은 없으며 지난 8월쯤 서약서가 문제가 돼 이미 폐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조의 설명은 좀 다르다. 김정수 지부장은 “직제상으로 병원장 바로 아래 직급인 간호부장이 서명까지 하는 서약서 내용을 병원에서 몰랐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서약서가 병원의 공식 문서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병원측의 묵인 아래 공식 효력을 발휘해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성가롤로병원은 매년 50~60명 정도의 간호사를 신규 임용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동안 대략 100~120명 정도의 1~2년차 간호사들이 서약서 때문에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던 셈이다.

간호사들이 결혼과 임신 등을 제안하는 서약서를 받아온 병원들의 사례가 밝혀지면서 간호사들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월 국내 한 보건의료노조지부 조합원들이 파업 출정식을 하는 장면, 조영호 기자
‘간호사 서약서’ 사건이 알려지자 의료계 안팎에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서울 S병원에 근무하는 한 고참급 간호사는 “특정 병동의 간호사들이 한꺼번에 몇 명씩 임신하게 되면 인력 운용에 어려움을 겪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결혼과 임신을 강제로 못하게 하는 서약서를 받는다는 건 요즘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혀를 찼다.

"순서 정해서 임신하라 요구도"

일부에서는 간호사들의 결혼과 임신 등을 억제하는 일이 의료계에 만연된 관행이라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 이숙희 여성국장은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임신한 간호사들은 병원을 그만둬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며 “과거보다는 좀 나아졌다지만 요즘도 임신 순서를 정해주는 등 암암리에 규제를 가하는 병원이 적지 않은 실정”이라고 밝혔다.

간호사 경력 4년째인 한 누리꾼은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입사 후 1년쯤 됐을 때 결혼을 한다고 알리니까 병원에서 난리를 치더라. 하지만 결혼 휴가 대신 휴일을 당겨 쓰고 결혼한 뒤에도 당분간 임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서 결혼과 임신이라는 개인의 기본권마저 제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대부분 병원이 전체 인력 가운데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인 데다 경영 효율화라는 명분 아래 적정한 인력을 확보하지 않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성가롤로병원 김정수 지부장은 “임신이나 육아 문제로 결원이 발생하면 대체인력을 채용해 투입하면 되지만 병원에서는 단지 비용 절감이라는 논리로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도 8일 내놓은 성명서에서 “(이번 서약서 파문은) 병원들의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내부적으로 여전한 전근대적 인사노무 관리시스템과 잘못된 관행, 간호사 인력 부족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발생한 필연적 귀결”이라고 비판했다.

간호사들이 기본권을 침해받는 것은 비단 결혼과 임신 문제만이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 선배 간호사와 후배 간호사 간에 수직관계로 구축된 병원의 비민주적 조직문화에 따른 인권침해도 적지 않다고 한다.

J국립대병원에서는 지난해 11월과 올해 4월 2명의 수술실 간호사가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지난 9월에는 대구의 중소병원 간호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뒤를 이었다.

이에 대해 유족과 노조 등은 고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병원 내에서 일부 의사나 상사들로부터 받은 일상적 폭언과 인격 모독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지난해 11월 세상을 등진 A간호사(당시 26세)는 자신의 일기장에 ‘힘들어서 못 살겠다. 직원들의 비인격적인 대우가 너무 심해 직장생활이 힘들다’는 글을 남겼다. 그 전에는 병원에서 받은 비인격적 대우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 입원 치료까지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근로복지공단은 A간호사 자살 사건에 대해 지난 7월 업무상 스트레스를 인정하고 산업재해를 승인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명의 J국립대병원 간호사가 공교롭게도 같은 수술실에서 근무했다는 점은 눈길을 끈다. 사실 병원 내에서 가장 폐쇄적인 수술실에서는 인격 모독적인 언행이 심심찮게 벌어진다고 한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수술실은 외부와 차단된 공간적 특수성 때문에 일부 의사들이 실수를 빌미로 간호사에게 심한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2004년 수술간호사회가 전국 대형병원의 수술간호사 7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의사들의 언어 폭력으로 인한 간호사들의 스트레스가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난 적도 있다. 당시 조사에선 부분 마취로 의식이 남아 있던 환자가 원색적인 표현으로 간호사를 모욕하는 의사를 나무란 사례도 적혀 있다.

간호사들이 근무 현장에서 겪는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는 보건의료노조와 원진재단부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지난 10월 J국립대병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공동 실시한 ‘직무 스트레스’ 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설문조사 결과 간호직 여성의 총 스트레스 수치는 61.3을 기록해 보건직(57.3)과 행정직(38.0) 여성을 크게 웃돌았다.

뿐만 아니라 폭언, 폭행, 성희롱 등 폭력 경험을 조사한 결과도 심각한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체적인 폭행(또는 맞을 뻔했던 경험)은 조사 대상자의 23.3%가 겪었다고 응답했으며, 욕설을 포함한 폭언 경험은 50.9%, 성희롱 발언 및 신체적 접촉은 15.5%, ‘야!, 너!’ 등의 반말을 들은 경험은 53.6%에 달했다.

간호사 81% "인권침해 경험"

이 같은 결과를 종합하면 조사 대상자의 68.9%가 언어적, 신체적, 성적 폭력 등을 경험했으며, 특히 직종별로는 간호직이 무려 81.2%나 인권침해를 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것은 의사, 수간호사, 관리자 등 직장 내 동료 못지않게 환자 및 보호자로부터 받는 수모가 크다는 점이다. 가령 폭언의 경우 환자 및 보호자(197명), 의사(66명), 수간호사 등 관리자(19명) 등의 순으로, 폭행의 경우 환자 및 보호자(109명), 의사(18명), 동료(9명) 등의 순으로 경험 빈도가 나타났다.

한 대형병원 간호사는 “환자들 중에는 술을 마시고 껴안는다든지 혈압을 재는데 신체접촉을 한다든지 등의 성희롱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하지만 병원측에 이런 사실을 호소해도 ‘환자가 그런 걸 어떡하냐’는 식으로 팔짱만 끼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간호사들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고 업무 스트레스가 과도한 상태로 방치된다면 의료 서비스의 질적 저하는 불 보듯 뻔하다고 지적한다. 병원 인력의 70% 가량을 구성하는 간호사들의 사기 저하와 비인격적 대우는 결국 환자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정부 당국과 병원들은 간호사 인력 충원, 모성 보호, 병원 인사노무 관리시스템 점검 등 병원 내 근무환경 개선을 위한 근본 대책을 하루빨리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