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킬번· 최금옥 부부한옥에 매료돼 한국에 정착… 훼손·난개발에 안타까움, 한옥 보존 투사로 변신

우리의 전통 가옥인 한옥은 나무와 흙, 돌 등 천연 소재로 만든 데다 유려한 곡선 건축구조를 지녀 자연친화적인 특성을 지닌다. 한옥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건강이나 정서적 측면에서 긍정적 영향을 얻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점을 주목해 한국인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한옥을 높이 평가하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저널리스트이자 광고ㆍ마케팅 전문가인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63)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킬번은 이른바 ‘북촌한옥마을’에 속하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의 한옥집에 살고 있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가 서울의 한옥에서 산다는 것은 한옥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1986년 영국 유학 중이던 한국 여성 최금옥(52) 씨를 만나 이듬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아내의 나라 한국에서 한옥과의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었던 88년 8월 어느 날 킬번은 아내와 함께 서울의 고궁과 인사동을 구경하던 중 한옥의 멋스러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 후 대뜸 아내에게 한옥집을 구입하자는 제안하고 다음날 가회동으로 달려가 네 번째 들른 집에서 단 5분 만에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좀 더 둘러보자는 아내의 만류도 킬번의 “내가 찾던 게 바로 이 집이야”라는 확신에 찬 한 마디에 묻혔다. 평소 세계 각국의 고유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킬번은 한옥에 대해서도 금세 강렬한 기운 같은 것을 느꼈다. 게다가 가회동 여러 집 중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집이 유독 풍수지리적으로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킬번은 호랑이를 소재로 한 한국화도 무척 아낀다. 가회동 집에도 여러 점을 걸어 놓았거나 소장하고 있다. 한국 호랑이는 다른 지역 호랑이에게는 좀체 없는 강한 ‘스피릿’(혼)이 느껴진다는 이유에서다.

최 씨는 “나도 한옥의 가치나 한국 호랑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오히려 외국인 남편 덕분에 우리 고유의 가치를 새로이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킬번은 평소 “자연적 소재로 만든 한옥은 자연의 정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사람의 품성과 덕성을 부드럽고 안온하게 만든다”며 한옥을 예찬론을 폈다. 그는 이런 자신의 한옥론을 직접 글로 써 90년대 초부터 외국 저널에 수 차례 기고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서민형 주택인 킬번의 집은 언뜻 보기에도 키 큰 서양인이 살기에는 비좁고 불편한 감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년 동안 마치 자식을 돌보듯 집을 손보고 가꿔왔다. 집안 구석구석에는 그의 애정어린 손길이 잔잔히 스며 있다.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부작용 지적

하지만 언제부턴가 부부의 행복한 한옥생활은 조금씩 방해를 받기 시작했다. 2001년 시작된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사업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북촌 가꾸기는 한옥보존 규제가 90년대 들어 완화되면서 전통 한옥 철거와 난개발이 우려할 수준에 이르자 서울시가 북촌의 전통 주거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 사업이다.

사업의 골자는 주민들이 자신의 집을 한옥으로 등록한 뒤 개·보수를 원하면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보조 또는 융자해주는 한편 주차장이나 공원 조성 등 주변환경 개선사업을 동시에 펼치는 것이다.

문제는 한옥 개·보수나 증·개축 과정에서 전통 한옥의 형태적, 재료적 속성을 무시한 날림공사가 적잖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최 씨에 따르면 콘크리트나 철근 자재를 쓰는 것은 물론 편법으로 층수를 2층으로 만드는 일도 있다고 한다. 실제 한옥 50여 채 이상이 밀집한 31번지 일대 골목에서는 그런 공사 현장이 더러 목격됐다.

사업차 외국 방문이 잦았던 킬번 부부는 10여 년 동안 조용하고 평화롭던 동네가 갑자기 ‘공사장’으로 변한 이유를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집의 개·보수 공사로 인해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는 한옥집이 손상되는 일이 발생하자 자연스레 한옥보존 투사가 됐다.

최 씨는 “한옥 개·보수를 한다며 주변에서 마구잡이로 공사를 하는 통에 우리집의 구조가 손상돼 관할 관청에 민원을 냈지만 매번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식의 반응만 돌아왔다”며 “더욱 이해 못할 일은 전통한옥 구조를 무시한 개·보수 공사가 공공연히 벌어져도 별다른 규제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시의 한옥지원 조례에 따르면 한옥은 ‘주요 구조부가 목조구조로서 한식기와를 사용한 건축물 중 고유의 전통미를 간직한 건축물과 부속시설’로 정의돼 있다.

하지만 개·보수나 증·개축된 한옥 가운데는 이와 동떨어진 집들이 수두룩하다. 한옥 전문가들 중에도 북촌 한옥에 대해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기와지붕만 올린 가짜 한옥”이라고 쓴소리를 내뱉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킬번 부부는 그냥 체념하지 않고 스스로 북촌 한옥의 파수꾼을 자처했다. 서울시청, 종로구청 등 관계당국에 수도 없이 민원을 제기했을 뿐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직접 무단, 불법 공사 현장을 고발했다.

무단공사 지적하다 송사에 휘말리기도

이처럼 한옥보존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동분서주하던 부부에게 지난해 2월 불상사가 벌어졌다. 무단 공사 현장을 촬영하던 킬번이 이를 제지하는 시공업자에게 떠밀려 넘어지며 크게 다친 것. 이로 人해 킬번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고 현재도 일본에 체류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부부를 더욱 황당하게 만든 것은 그날 사건의 피해자인 킬번이 쌍방 폭행의 당사자로 처리돼 지난 연말 벌금 5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최 씨는 “남편이 외국인인 데다 나도 해외서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우리말이 서툴러 대응을 제대로 못한 것 같다”며 “그렇더라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또 “남편도 문화 애호가로서 전통 한옥문화를 지키려 했을 뿐인데 범법자 누명을 써 착잡해 한다”고 킬번의 심경을 전했다.

킬번 부부는 명예회복을 위해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변호사를 선임해 정식 재판을 청구하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벌금은 내도 그만이지만 지금까지 북촌 한옥보존을 위해 싸운 명분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최 씨는 “우리 부부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앞으로 계속 밀고 나가기 위해서라도 이번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킬번 부부의 바람은 단지 전통 한옥과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하자는 것뿐이다. 그들의 외침에 당국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킬번 씨가 찍은 가회동의 한옥 개보수 현장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