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신분 '중규직' 뜨거운 논란무기계약제·분리직군제는 임금체계 달라… 승진 차별하는 하위직급제 등 편법 기승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에 따른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최근 ‘무늬만 정규직’이라는 이른바 ‘중규직’ 논란이 뜨겁다. 신분은 정규직이나 임금은 비정규직 수준인 직군이다.

주로 금융권을 중심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직군 전환이 이뤄지면서 대안으로 나온 무기계약직, 분리직군, 하위직급제 등이 중규직에 해당한다. 이런 방식은 비정규직을 온전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대신 새로운 노동계급인 ‘중규직(반 정규직)’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지난 10월 국민은행은 비정규직 노동자 8,000여 명에게 무기계약직 전환을 발표했다. 은행창구직원, 텔레마케터, (고객)지원센터 직원에 한해 3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 전원이 적용되며 시행은 내년 1월이다.

지난 7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실행되고 국민은행 등 대기업이 잇따라 비정규직 직군전환을 실시하고 있다. 삼성테스코, 롯데마트, 동원 F&B 등이 시행하고 있는 무기계약제는 ‘표면상’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한다.

단, 임금과 복지에 있어서는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밖에 비정규직보호법안 시행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진 직군을 살펴보면 분리직군제와 하위직급제 등이 있다.

서울 서소문 올리브타워에서 열린‘비정규직보호법 대토론회'에 참석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시위대에 몰려 고립돼 있다.
서울 서소문 올리브타워에서 열린'비정규직보호법 대토론회'에 참석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시위대에 몰려 고립돼 있다.

LG 텔레콤, 우리은행, 산업은행 등이 시행하고 있는 분리직군제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또 다른 직군 형태다. 정년이 보장되고 복지수준은 정규직과 동일하지만, 임금체계는 다르게 적용 받는다.

하위직급제의 경우 정규직 체계 아래로 편입되는 구조다. 임금과 복지 수준 모두 정규직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기업이 최하 1단계에서 최고 4단계까지 승진되는 정규직 직급 구조를 갖췄다면 하위직급은 이보다 낮은 0단계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하위직급제를 실시하는 기업은 부산은행과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등이 있다. (표 참조)

롯데호텔의 경우 지난 7월 비정규직보호법안이 시행되자 사측이 먼저 나서서 잠실과 본점 비정규 직원 33명을 하위급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본점과 잠실점을 제외한 전국 800명 비정규직 직원의 경우 직접 고용형태이지만, 추가 조치는 없다. 보호법안 시행을 피해가기 위한 ‘본보기 용’인 것이다.

한국노총 금융산업노조 김재현 본부장은 “무기계약제에서 분리직군, 하위직급제로 갈수록 높은 수준의 고용전환이라고 보면 맞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의 비정규직 직군 전환은 직원에게 고용안정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이전 비정규직제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무기계약직, 분리직군, 하위직급제 등은 각 기업들이 홍보하는 것처럼 ‘고용보장’이 되지 않을 뿐더러 임금과 복지체계에서 정규직과 엄연한 차이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은행의 경우 같은 연차 대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은 100: 53으로 거의 두 배가 차이가 난다. 비정규직이 3년이 지나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돼도 여전히 정규직 임금의 70%만 보장 받는다. 이들 기업이 제시한 직군 전환은 사실상 반 정규직인 ‘중규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비정규노동센터 김성희 소장은 “이들 기업의 고용계약서를 살펴보면 곳곳에 독소 조항이 나온다. 일부 기업의 고용 계약서에는 성과가 부진할 시 해고가 가능한 조항을 넣어 문제가 됐다.

이전 계약직 근로자가 1년마다 계약을 연장하면서 업무성과를 평가 받았다면 이제는 성과에 따라 해고를 결정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얘기”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우리은행의 경우 이 조항이 문제가 돼 노조에서 크게 반발했고 사측이 독소조항을 약화시킨다는 말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김 소장은 “계약서 상의 독소조항이 약화됐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향후 이 조항이 실제로 작동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승진에 있어서도 정규직과 중규직은 서로 ‘승진 통로’가 다르다. 이 때문에 ‘중규직이 제 3신분으로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분리직군제의 경우 아예 정규직과 임금체계, 복지체계, 승진체계가 다르고, 하위직급제는 하위직급제 내에서 최고 승진을 한 직원이 정규직 신입사원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 김 소장은 “무기계약직의 경우 소속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향후 각 기업이 어떻게 대응할지 분석조차 어렵다”고 밝혔다.

비정규직에서 중규직으로 전환된 직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문제는 더 심각하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계자는 “백화점, 할인점, 호텔 등과 같은 서비스 직에서 여성 근로자는 40%정도이며 비정규직은 대부분 여성이다. 환경이 열악한 중소 외식업의 경우 비정규직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100%”라고 밝혔다.

금융업 역시 창구직, 콜센터, 지원센터의 직원은 여성이 95%를 넘는다. 이들은 생계형 일자리가 많기 때문에 노조가입은 물론 노사협상에서도 요구사항을 관철시키지 못할 때가 많다.

중규직을 시행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대기업은 ‘비용’을 이유로 든다. 수 천명의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경우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 최대의 수익을 내고 있는 은행만 보더라도 앞뒤가 안 맞는 설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김문성 금융산업노조 비정규직 위원장대행은 “국민은행의 경우 모든 5년차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완전 전환할 경우 3,000억 원이 소요된다. 지난해 수익은 2조4,000억 원, 이중 주주배당으로 1조2,000억 원이 쓰였다”고 밝혔다.

비정규직의 직군 전환이 이토록 어정쩡하게 이뤄진 이유는 노사협상에서 비정규직이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국노총 산하 금융산업노조의 조합원은 8만2,000여 명. 이중 비정규직 조합원은 단 200명에 불과하다. 비정규직 노조가 있는 단위사업장은 전무한 상태다. 비정규직은 노사협상 테이블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다.

김문성 위원장 대행은 “비정규직은 노조 가입률이 지극히 낮고 조직적으로 입장 표명을 한 것이 없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있어 정규직 노조의 의지나 능력은 약하다”고 말했다.

김재현 한국노총 금융산업노조 본부장도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통과된 후 비정규직 노조도 협상권을 갖게 되었지만, 사실상 지지부진하다. 조합원 숫자나 세력면에서 사측이 비정규직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중규직의 경우 정규직군으로 분리돼 정규직 노조에 가입된다. 앞으로 단체 협상을 통해 단계적으로 환경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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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