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선박 조그만 충격에도 기름 '콸콸'… '단일선체' 운항금지 조기 의무화해야

홍콩 선적의 14만6,848톤급 유조선 ‘헤베이 스피리트’호가 충남 태안군 북서쪽 해안에 쏟아낸 1만500kl의 원유는 기름폭탄으로 돌변, 청정 해역인 서해 일대를 삽시간에 ‘검은 죽음의 바다’로 뒤바꿔 놓았다.

사고 1주일을 맞은 14일 현재, 수만 명의 인원이 구슬땀을 흘리며 기름제거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푸른 옛 모습을 복구하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사고 책임을 놓고 유조선, 예인선, 대산해양수산청 등 당사자 간 공방이 끝나지 않았지만, 수사당국은 대체로 ‘인재’(人災)로 가닥을 잡는 분위기다. 사고 당일 거센 바람과 파도가 일었으나 서로 간에 교신, 주의조치 등 해상 안전수칙만 제대로 지켰으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재난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헤베이 스피리트’호의 선체 구조가 이번 사태를 야기한 보다 근본적인 ‘화근’이라는 분석을 제기해 주목된다. 즉, 사고 당사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안이한 대응이 표면적인 사고 원인이라면, 그 이면에는 유조선 자체의 결함도 불씨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헤베이 스피리트’호는 길이 338m, 높이 28.9m에 갑판 넓이가 축구장 3개에 해당할 만큼 거대한 몸체를 가진 배다. 하지만 그 웅장한 덩치의 유조선도 다소 강한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면 여지없이 뚫리고 마는 것을 이번 사고는 여실히 보여줬다.

이 배는 선체 외벽이 한 겹으로 돼 있는 이른바 ‘단일선체’ 유조선이다. 단일선체는 선체 외벽을 뚫고 들어가면 곧바로 선체 내부로 통하는 구조의 선체를 말한다. 때문에 ‘헤베이 스피리트’호는 외견상 그다지 큰 손상을 입지 않았는데도 저장탱크의 원유를 콸콸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최예용 시민환경연구소 실장은 13일 태안문예회관에서 개최된 환경운동연합 주최 토론회에서 “어선을 타고 나가 유조선을 살펴봤는데 뚫린 부분은 지름이 30㎝ 정도로 그리 넓은 편이 아니었다. 만약 사고 유조선이 이중선체 구조였다면 이토록 피해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중선체는 말 그대로 선체 외벽 안에 일정 공간을 두고 또 하나의 외벽을 갖춘 선체를 말한다. 따라서 외부 충격으로 선체 외벽에 구멍이 나더라도 선체 내부와 외부는 여전히 차단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배가 단일선체로 건조됐다. 굳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이중으로 선체를 만들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유 물동량 증가로 유조선 운항이 급증하고 대규모 원유유출 사고가 빈발하자, 지난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는 유조선에 대해 이중선체 구조를 의무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국제해사기구(IMO)는 2010년부터 단일선체 유조선의 운항을 전면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특히 1989년 알래스카 해역에서 사상 최악의 해양오염을 유발한 ‘엑손 발데스’호 사고를 겪었던 미국이나 유럽 등은 한발 앞서 단일선체 유조선 운항에 대해 강력한 금지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 나가고 있다.

문제는 미국, 유럽 등지에 입항을 하지 못하는 단일선체 유조선들이 다른 지역으로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씨티그룹의 보고서에 따르면 특히 급속한 경제발전이 이뤄지고 있는 아시아 항로에 전세계 단일선체 유조선의 96%가 집중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라고 예외일 리가 없다. 해양수산부 자료에 따르면, 12월 현재 국내 정유업계가 이용하고 있는 5,000톤급 이상 대형 유조선 가운데 단일선체 구조인 경우가 61%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유사별로 살펴보면 지난 1월 기준으로 에쓰오일은 100% 단일선체 유조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어 현대오일뱅크 83%, SK인천정유 50%, GS칼텍스 32%, SK 15% 순으로 단일선체 유조선을 이용하고 있다.

정유업계에서도 2010년 이후 단일선체 운항이 금지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현재 이용률만 놓고 보면 준비 태세가 매우 미흡하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와 관련, 한 업계 관계자는 “각 업체마다 이중선체 유조선 확보를 위해 힘을 쓰고는 있지만 단일선체 유조선 의존도가 쉽게 꺾이지 않는다”며 “게다가 이중선체 유조선 공급량이 그리 많지 않아 용선(배를 빌려 쓰는 것)을 하려 해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국내 정유업계가 내수시장뿐 아니라 해외시장 진출에도 비중을 두면서 원유 물동량이 크게 증가한 점도 이중선체 유조선 조달난의 또 다른 원인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아울러 중국과 인도 등 신흥 경제강국의 원유 사용량 급증도 유조선 품귀를 부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어쨌든 이번 태안 원유유출 사고로 인해 정부 당국과 정유업계는 이중선체 유조선 조기 도입에 대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당초 정부는 2010년까지 이중선체 전환 마무리를 하되 일부 예외규정을 둔다는 입장이었지만 다소간의 일정 수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정유업계 역시 이중선체 유조선 발주 또는 용선 계약을 서두를 것이라는 전언이다.

최예용 실장은 “1995년 씨프린스호 사고 당시 정부와 업계가 이중선체 의무화를 외쳤지만 그 동안 어영부영하는 태도를 보이다 결국 이번 사고가 발생했다”며 “5,000톤급 이상 대형 유조선의 경우 신속히 단일선체 이용을 금지하고 5,000톤급 이하 유조선도 최단시간 내에 이중선체 도입을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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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원유 유츌 사고가 발생한지 닷새째인 11일 사고 유조선인‘헤베이 스피리트’호에서는 아직도 유증기가 뿜어져 나와 기름탱크 구멍을 메우기 위한 볼팅작업이 한창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