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고 박목월 시인 생전 작업 이어받아 30년째 월간지 '심상' 편집에 심혈천성상 헐뜯고 싸우는 게 보기 싫어 TV뉴스도 안봐부친에게 받은 사랑의 빚, 자식들에게 '분할상환' 중…미얀마의 한 대학에 오두막 기증한 게 가장 큰 기쁨

어느 해 크리스마스날, 명색이 국립대 교수인 아들은 아버지에게 선물을 해 드릴 수 없었다. 지갑이 텅 비어있었다. 고민 끝에, 언젠가 제자들이 자신에게 선물한 와이셔츠를 포장해 아버지를 찾았다.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에게는 맞지 않을 사이즈의 셔츠였다. 얼마 뒤 설날, 아버지는 아들이 선물한 와이셔츠를 입고 계셨다. 옷 품은 꼭 끼고 소매는 짧아서 껑충 올라간, 당신 몸에 맞지도 않는 와이셔츠를 입고도 아들을 즐겁게 해주려 애썼다. 이미 선물을 받던 순간부터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셨음을 아들은 깨달았다.

그 아름다운 아버지는 가고, 이젠 아들이 같은 자리에 앉아 새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그에게 찾아온 예순여덟번째 연말이다.

■ 노교수의 행복찾기

관습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코흘리개 시절 대가족의 삶을 잠시 경험했던 기자의 달력으로는, 웃어른께 ‘묵은 세배’를 드리지 않으면 새해 또한 오지 않는다. 늘 한결같던 특유의 인자한 인상 때문이었을까, 2007년 말미를 생각하면서 박동규 교수가 제일먼저 떠올랐다. 짐작대로, 선생은 마치 스승을 찾아온 제자를 대하듯 편안하고 살갑게 이야기를 텄다.

“박사과정 학생들도 가르치고, 뭣보다 ‘심상’지(시 전문 월간지) 만드느라 요즘도 정신이 없어. 아버지께서 5년 하시던 걸 이어받아서 하는 일이야. ”

부친 박목월 시인이 작고한 지 수십년. ‘심상’지 발행은 딱히 부친이 당부한 적도 없는데, 선생 혼자 30년째 안고 있는 일이다. ‘아버지께서 하셨던 일을 어떻게든 계속 살리고 싶어서’가 단 하나의 이유다. 돈벌이로는 꽝이다. 발행된 지 30년이 지나는 동안 이제껏 단 한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다.

“아버지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사실 우리 가족들은 다들 현실적인 적응력이 떨어져(웃음). 둘째인 딸아이도 공부는 미국에서 호텔경영학을 했는데 정작 돌아와서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아. 그나마 아들래미가 우리 가족 중에 제일 현실적인데(미국에서 예술행정학 공부 중) 걔도 공부 마치고 돌아오면 학계로 갈 것 같아. ”

‘가족’에 대한 선생의 애착은 각별하다. 연말이 오면 특히 가족 생각이 더 끈끈해진다.

“오늘 아침엔 미국에 있는 다섯 살짜리 손녀랑 통화를 한 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나도 아이처럼 ‘아이고, 엄마!’하고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 대견한 손녀 얘기를 들으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면서. 나, 참,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웃음) 가족이란 삶의 전체나 다름없어. 가족과의 사랑이 고난을 보람으로 바꿔주는 힘이야 ”

천성상, 선생은 평생 ‘독한 글’ 을 써 본 적이 없다. 남을 맘 아프게 하는 일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다. 부친을 따라 시 평론을 전공하지 않고 굳이 소설 평론을 택한 것도 ‘차마 아버지 친구들(시인들)을 감히 비판할 수가 없어서’였다.

“평소 뉴스도 잘 안 봐. 그럴바엔 차라리 영화를 보든가 노래를 들어. 싸우는 게 보기 싫거든. 싸움에도 룰이란 게 있어야지, 요즘은 비신사적인 싸움이 많아. 대선도 시끄러운 얘기가 나오면 그냥 바로 TV채널을 돌려버려. 자기 실력이 아니라 남을 헐뜯어서 올라가려는 건 비겁해.”

“그래도 투표는 하실텐데, 찍을 사람은 정하셨어요? 안 싸우는 후보가 없던데.”

“응. 정했지. 기준? 그 중 남 욕 제일 적게 한 사람 찍을거야(웃음). ”

■ 아름다운 연대기

선생은 부친 박목월(본명 박영종) 시인의 5남매 중 장남이다. 부친이 1978년 갑자기 별세한 뒤 모친이 갖은 고생을 하며 남매들을 키웠다. 선생이 여섯 살이었을 때,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부친은 저녁식사 후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모친은 밥상을 깨끗이 닦아 가져다 드렸고, 부친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젖먹이 여동생을 포대기로 엎고 나가셔서 통금 시각이 지나도록 안 들어오신거야. 어머니를 찾으러 한밤중에 온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어머니랑 가장 친했던 친구분 댁에 마지막으로 가봤더니 그 집 문 앞에 웬 눈사람이 서 있었어. 자세히 보니 어머니였어. 눈을 맞으며 종일 그렇게 서 있었던 거야. 놀라서 왜 여기 이러고 계셨냐고 했더니 ‘이놈아 니 아부지 지금 시 쓰시쟎냐’하시는 거야. 아버지가 시 쓰실 때 방해를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나오신 거지.”

“어쩌면 아버님 이상으로 어머님께도 시가 당신의 큰 꿈이셨나봐요.”

“아마 그랬던 것 같아. 어머니의 긍지이기도 했고. 하지만 자식인 나로서는 어릴 때 아버지의 존재 때문에 상당한 압박감으로 힘들게 보냈어.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될까봐 아무것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거든. 공부를 못 해도 ‘아버지는 아무개인데 자식은...’욕 할까봐 더 열심히 해야 했어. ”

압박이 자랑스러움으로 바뀐 것은 한참 자란 뒤부터였다. 선생은 지금의 당신 아들을 생각하면, 그래서 더 안쓰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우리 아버지 한 분만으로도 그토록 압박감에 힘들었는데, 위로 할아버지에다 나까지 학자가 둘이나 되니 우리 아들은 훨씬 더 심리적인 압박이 클거야. 그걸 생각하면 아주 안스러워.”

하지만 선생 역시 아직은 피장파장이다. 부친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아직도 ‘분할상환’중이다. 정년 퇴임후인 현재에도 유학중인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분투 상태. 외부강연으로 분주한 것도 미처 끝나지 않은 자녀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다.

“맞아, 아버지한테서 받은 사랑, 지금도 아주 톡톡히 치르는거야. 어쩔 수 없지 뭐(웃음). ”

남들에겐 모진 소리 한번 못 하는 만년호인같지만, 실은 그것만도 아니다. 다음날 강의준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술을 끊은 지 10년째, 올 봄 건강검진에서도 전 항목 ‘양호’점수을 받았다. 교수로 재직 중에도 친구들이 욕하든 말든 밤 10시 후에는 무조건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독한’ 사람이었다.

“특히 술 취해서 헛소리하는 꼴은 내가 절대 못 봐. 조금이라도 주사가 보이면 아예 제자 명단에서 잘라버렸어. 남 욕하거나 시비거는 사람이 제일 싫어. 그건 가만히 못 봐. ”

선생은 올해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은 일들을 함께 세어보았다. 수필집 ‘아버지와 아들’을 만든 것, ‘심상’지가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도록 열심히 일한 것,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선생에겐 아주 행복한 송년용 숙제이기도 하다.

“미얀마의 한 대학에 조그만 오두막 하나를 기증한 게 제일 기뻐. 기부금도 이미 절반정도 내놨고, 내년 3월에 완공된대. 학생들을 위한 강연장소로 쓸, 그냥 작고 아담한 곳이야. 그 오두막 이름을 뭐라고 정할까, ‘박씨 家’로 할까 어쩔까 한창 작명중이야(웃음). 나 혼자가 아닌 우리 가족이름으로 달고 싶어. ”

무슨 주제로 시작하든 종국엔 ‘가족’ 얘기로 종착하는 노교수. 트레이드마크처럼 푸근한 미소 사이로 갑자기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가 스치는 걸 보았다.

■ 박동규 약력

1939년생. 서울대학교ㆍ 대학원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 2004년 황조근정훈장 수훈.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후 2004년 정년 퇴임. 현 서울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월간 시전문지 ‘심상’ 편집고문.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