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함께한 40년 세월… '한국문학 추억의 작고문인 102인전' 열어 화제편안한 표정의 천상병 시인·애주가로 소문난 조태일 선생…박종화 선생 장례식 땐 필름 잘못 끼워넣어 헛사진 찍기도육필 원고·육성 테이프도 모아… 문학박물관 건립되면 기증

사진작가 김일주(66) 씨와의 대화는 수월치 않았다. 그의 한쪽 청력이 불완전해 큰소리로 묻고 또 들어야 했다. 그는 40년째 문인들의 인물사진을 촬영해 온 전문사진작가다.

편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그는 문인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찾아가 셔터를 누른다.

그 자신이 소설가임에도 자작 소설작업은 뒤로 한 채 사진에 평생을 걸었다. 지금 그의 손에 쥐인 것은 옛날식 수동 카메라다. 그는 최근 예술의 전당 아르코예술정보에서 ‘한국문학 추억의 작고문인 102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이 일로 평생 상대를 찍기만 하던 그가 이번엔 찍히는 입장으로 바꿔 섰다. 솔찮이 곤혹스러워하는 심정이 표정으로 묻어 나왔다. 그는 연신 땀을 닦았다.

“ 아, 이거 쉽지않네. 아직 멀었어요? 인물도 시원찮은데 카메라 앞에서 웃으려니 더 안 돼.”

■ 기자는 없어도, 김일주는 있었다.

“(전시작 중) 꽤 멋진 사진들이 많던데, 포즈를 직접 주문하신 건가요? ”

“아휴,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대가(유명 문인들)들한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겠어. 어림도 없지. 전부 그냥 옆에서 눈치껏 찍은 것들이에요. 어쩌다 잘 나온 건 그냥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거지, 진짜 사진기자들이 보면 저건 작품도 아니라고 할 거야.”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은 그의 ‘재산’중 1%도 안 된다. 그가 직접 찍은 문인 사진들이 8만여 장. 그 필름들을 각각 6장씩 잘라 36장씩 다발로 묶어 정리해 박스에 넣었다. 이 박스 더미가 자택 거실의 한쪽 벽면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문학상 시상식은 물론 술자리, 세미나, 야유회, 출판사 편집실을 막론하고 문인들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닌 결과물이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한 지인은 ‘문인들이 있는 곳이면 기자들은 없어도 김씨는 꼭 있었다’고 했다.

“내가 사진을 찍도록 편안히 내버려두기까지 하는데만 거의 10년이 걸렸어요. 문인들은 특히 까탈스러워. 사진 기피증도 있고, 70년대는 군사정권, 기관원에 대한 공포증 같은 게 있어서 더 카메라를 싫어했어.”

■ 문단, 평생의 인연

시인 박두진 선생의 사진만 600여장. 자신보다 20세 손위였지만 사진을 찍든 말든 전혀 상관없이 편안했던 천상병 선생, 생전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선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옥상에서 찍은 김동리 선생 사진, 워낙 술을 좋아해 소주에 밥 말아먹을 정도의 애주가로 소문났던 조태일 선생 모습 등 사진마다 구구절절 사연이 깃들어있다.

당사자는 물론 유족들도 본 적이 없거나 갖고 있지 않은, 김씨의 땀내나는 보물들이다.

깐깐하기로 치면 소설가 황순원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서재에서 멋스럽게 찍은 사진은 선생의 문학전집 수록용으로 어렵게 ‘협조’ 받은 것이다. 황순원 선생은 웬만한 행사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월탄 박종화 선생 장례 때의 실수는 지금도 아쉽고 아깝다. 고인의 장례가 서울 변두리에서 치러졌는데 필름을 갈아 끼우다 잘못 넣어서 말짱 헛사진을 찍었다. 흑백사진은 죄다 날리고, 간신히 칼라사진 몇 장만 겨우 건졌다.

“그나마 문학전집을 낼 때 촬영이 가장 편하고 쉬웠지요. 본인의 책 때문에 작가가 사진을 안 찍을 수 없거든. 내가 맡았던 전집 중에는 50~100권짜리 대형 전집들도 많았지.”

사진만 아니라 육필원고와 육성테이프도 모았다. 작고했거나 현재 활동중인 작가를 합쳐 그는 약 30년에 걸쳐 육필원고 1천여 점을 확보했다. 1톤 트럭을 가득 채울 분량이다. 문인들의 육성을 담은 녹음테이프도 60분짜리로 100여 개 남짓.

“육필원고를 얻으려고 일부러 문인들과 자기도 많이 잤어요. 문인들이 한번 술을 마셨다 하면 늦게 끝나잖아, 그럼 그때까지 함께 있다가 ‘나는 집이 인천이라 멀어서 지금 가기 힘드니 당신 집에 좀 재워달라’는 핑계로 그 집에 묵고는 다음날 ‘이왕 왔는데 육필원고나 하나 달라’고 해서 원고를 얻곤 했지요. ”

김일주 씨가 찍은 피천득, 김동리, 모윤숙의 사진 (왼쪽부터)

■ 소설가의 사진가 팔자

그는 사진작가이기 전 먼저 소설가였다.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1968년 경기일보 문화면 편집기자로 재직하던 중 작가 조지훈 선생의 타계 소식을 전하려다 고인의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직접 나선 것이 첫 발이다.

“그렇게 대작가인데도 생전에 찍은 사진이 별로 없더라고. 그만큼 카메라가 귀한 시절이기도 했고. 그때 ‘아, 누군가 해야겠구나, 그 누군가를 내가 하자’고 생각했죠. 카메라도 내 돈으로 사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인들 사진을 찍고 다니기 시작했지.”

“선생님 자신의 소설은 못 쓰고 다른 작가들 사진만 찍고 다니시자니 맘이 답답하거나 조급해지진 않시던가요?”

“내 팔자가 그런 걸 뭐, 어떡하겠어. 어쩔 수 없지.”

1989년 월간지 ‘인물계’ 편집장직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문인 촬영 작업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당시 잡화점을 꾸리고 계시던 모친 덕에 생계를 해결하며 살았다. 노모께 끼친 폐는 1997년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안겨드리는 것으로 그나마 조금 보답이 됐다.

■ 문학박물관을 기다리다.

얼마간 대화가 오가고 나자 그는 ‘딴 얘기보다 문학박물관 얘기나 많이 하자’고 채근했다. 그의 소망은 하루빨리 국립문학박물관이 세워지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는 작가들의 개인 기념관만 몇몇 있을 뿐, 국립문학박물관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애타게 하는 일이다. 국립문학박물관만 설립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자료를 기증할 준비가 돼 있다.

“다른 건 괜찮은데 육필원고가 제일 걱정이에요. 원고만 따로 마루방에 보관하고 있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자꾸 종이가 삭거든. 글씨도 바래고....정부에서 빨리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좋겠어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단 과거는 과거. 그는 여전히 새 사진을 보탤 준비로 이날도 종로의 단골 필름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이들에게 문학계의 인물사와 향수의 감동을 일으켰던 그의 ‘작고 문인 102인전’ 은 조만간 전국 순회 전시로 펼쳐질 예정이다.

■ 김일주 약력

1942년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월간 <인물계> 편집부장 역임. 국내 최초 한국문인사진전 개최(1982), <시인의 얼굴>전 2회(1983), <한국현대문학의 얼굴>전(1996), 저서 <한국현대문학의 얼굴>(1996.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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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