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조사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이를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것이 익숙한 세상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사를 주관하는 사람의 의도가 충분히 결과의 수치를 조정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설문 문항을 조정하는 방법이다.

"불가피한 경우의 합법적 낙태"에 대한 다음의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설문 문항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추상적인 '불가피한 경우'라는 표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상이한 표현을 써서 조사한 결과를 보자 (1996, ‘미국 여론조사’).

이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건강이 임신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경우'라는 극단적인 경우에도 낙태를 절대 반대하는 사람들이 8% 정도 있다. 그런 반면 45%의 사람은 여성이 원할 경우에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낙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8%와 45%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설문의 표현이 어떻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한다.

그런 반면,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47%의 '중간층의' 사람들은 문항에 따라서 찬성과 반대를 선택한다. '낙태'에 대해 자신의 의도를 가진 사람은 ‘불가피한 경우’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말을 선택함으로써 45%에서 92% 중에서 원하는 조사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근래 우리 선거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2007년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이명박 후보 지지율에 일부 거품이 있다'는 주장을 확인해보려고 설문문항을 시점에 따라 다르게 조사하였고, 그 결과 이 후보의 지지율이 4월 4일에는 47.8%에서, 4월 18일에는 34.1%로 무려 13.7%p가 하락하였다.

“다음 대통령 후보로 누가 됐으면 좋은가” (4월 4일)

“만일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이라면 누구에게 투표하겠는가” (4월 18일)

이러한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의 이명박―박근혜 후보는 후보 선출 방식이었던 여론조사에 대한 규칙을 결정할 때 설문 문항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이 후보 측은 “차기 대통령 후보로 누구를 더 선호하느냐”는 선호도 방식을, 박 후보 측은 “내일 투표를 한다면 누구를 지지하겠느냐”는 지지도 방식을 주장하였다. '적극적 지지자'가 많은 박후보 측은 지지도를 묻는 설문 문항을 선택함으로써 이후보 측에 많았던 '소극적 지지자'들이 '무응답'을 선택하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뚜렷한 소신이 없는 중간 층의 사람들은 설문 어구에 따라서 자신의 의사를 결정한다. 여론 조사 결과를 볼 때는 설문 어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 최제호 약력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계산통계학과 졸업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계산통계학과 통계학 석사 및 박사

<통계의 미학> 저자, (현) (주)디포커스 상무


최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