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둔감 →'폭력 스크립트' 완성 → 실제행동으로논픽션 뉴스가 범죄심리 더 부추겨… 게임중독자 가상·현실 구분 못해예방 위해 '등급제' 실효성 높여야

지난해 5월 전파를 탄 KBS 프로그램 <특명 공개수배>가 3월 27일자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마지막 방송까지 총 74명을 공개 수배해 27명을 검거하고 11명이 자수하는 쾌거를 올린 이 프로그램의 폐지 이유는 모방범죄의 가능성 때문으로 전해진다.

<특명 공개수배>의 폐지는 같은 기간 집중보도 된 이혜진-우예슬 양 유괴사건과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만들고 있다. 바로 폭력물과 범죄의 상관성에 관한 논란이다. 마침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모델로 한 영화 <추격자>가 대박을 터뜨리며 이 영화를 모방한 제 2, 제 3의 범죄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 '폭력 스크립트'가 머리에서 좌르르

모방범죄의 가능성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미 논쟁이 끝난 일’이라고 단정 짓는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폭력물에 더 민감한 것은 아동과 청소년이지만, 성인도 지속적으로 폭력물에 노출되면 영향을 받는다. 또한 공격 성향이 높은 사람이 폭력물을 더 자주 본다. 거의 모든 범죄자들이 폭력물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모방범죄가 발생하는 이유 중 첫 번째는 ‘둔감화’다. 처음 폭력물을 접하게 되면 강한 충격을 받지만, 이 후에는 폭력에 대해 둔감해 지며 점점 더 높은 강도의 폭력을 요구하게 된다.

2005년 중고등학생 15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폭력물 둔감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보건복지가족부 백수현 사무관은 “3개월간 관찰 결과 폭력장면을 보고 처음에는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감정이 점점 둔감화됐다”고 밝혔다.

YWCA연합회 한미미 실행위원 역시 “자극에 대해 너무 익숙해져서 더 큰 자극이 오지 않으면 희열을 느끼지 못한다. 더 변태적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매체가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리라 기존의 폭력심리를 자극한다”고 말했다.

폭력, 음란물을 접한 후 범죄 성향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지난 3월 18일 인천에 사는 중학생 A군(14)이 여중생을 빌라 주차장으로 끌고가 성폭행 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조사결과 A군은 자신의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을 보고 집을 나왔다가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 이유는 폭력물을 자주 접함으로써 ‘폭력 스크립트’가 머릿속에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곽금주 교수는 “많은 경험을 하다 보면 특정 상황에 대한 대처 요령이 머릿속에 스트립트처럼 남아있게 된다.

폭력물을 자주 접하다 보면 언제 폭력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폭력을 가하는지, 그 후 대처 요령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폭력 스크립트’가 머리에서 펼쳐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폭력물이 모방범죄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 한다는 분석도 있다.

모방범죄 이후 알리바이를 만드는 방법과 범죄를 합리화 하는 것 역시 폭력물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2006년 13명의 시민을 연쇄살인, 유기한 혐의로 구속된 정남규의 집에서 스크랩 된 사고사건관련 신문기사가 발견됐다.

실제로 범인 정남규는 사체를 유기하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범죄소설과 영화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해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그놈 목소리> 개봉 이후 이 영화의 범인과 똑같은 수법으로 부유층 초등학생을 납치, 10시간 만에 잔인하게 살인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곽 교수는 “성인도 폭력물에 영향을 받는다. 예전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한국 대학생이 텔레비전에서 경찰이 자식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똑같은 방법으로 부모를 살해한 적이 있다. 주인공이 완전 범죄를 위해 피를 안 묻히려고 옷을 안 입고 죽였는데 이 대학생도 같은 방법으로 부모를 살해했다”고 덧붙였다.

■ 게임·뉴스가 더 위험하다

모방범죄를 없애려면 범죄영화만 단속하면 될까? 전문가들은 영화보다는 뉴스와 같은 보도매체에서의 폭력성과 게임의 위험성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허구성’을 인식하지만, 뉴스는 사실이기 때문에 더 동요되기 쉽다는 것이다.

1999년 미국 펜실베니아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은 다섯 시간 동안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도될 만큼 ‘메가 히트’급 뉴스 아이템이었다. ‘섹시한 뉴스’에 관한 대가는 참혹했다. 보도 후 50동안 펜실베니아 주 고등학교의 총기난사 협박 사건이 354건으로 급증한 것. 언론의 정확한 보도가 범죄심리를 자극한 셈이다.

게임의 경우 게임을 즐기는 당사자가 직접 ‘가상 살인’에 가담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텔레비전, 영화와 같은 수동적인 매체보다 훨씬 더 모방범죄의 확률을 높인다. 2001년 온라인 게임이 중독된 중학생이 동생이 잠자는 사이 도끼로 목을 내리쳐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살해도구인 손도끼는 게임 속 아이템과 유사했으며 전문가들은 범죄를 저지른 중학생이 게임 속 가상 세계과 현실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2004년 9월 권 모씨(22)는 ‘크레이지아케이트’게임에서 자신을 계속 이긴다는 이유로 6살짜리 6촌 동생을 목 졸라 살해한 사건도 있다.

전문가들은 모방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우선 등급제의 실효성을 높이라고 주문한다. 곽금주 교수는 “텔레비전 15세 관람가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서는 폭력물이 무분별하게 유통된다.

10세 전후에 접한 폭력물은 성장 이후 공격성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과 같이 연령에 따른 등급제는 철저하게 지키고 교육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아동청소년 매체환경과 김성벽 과장은 “12세, 15세 등으로 나뉜 등급제에서는 폭력성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폭력의 단계를 정해 수위를 공지해야 하고 높은 수위의 폭력물은 15세 등급이라도 부모가 사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대 곽금주 교수 / 사진=임재범 기자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