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개혁 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를 주최했다. 당시 중견기업을 대표해 참석한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현행 상속세율은 60~70%에 이른다”며 “상속세를 없애면 중소,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성장사다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상속세율은 기업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지만 사회적 반발을 의식해 잘 말하지 않는 주제다. 대통령 앞에서 상속세 문제를 고한 김 회장의 발언은 용감했다.

한국의 상속세율은 높다. 자녀에게 상속을 하면 지분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다.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상속 규모도 커지고 재벌 2세라 하더라도 소득으로 상속세를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자금, 일감몰아주기, 지주사의 마법 등 주주가치를 편취하는 각종 지배 구조 관련 꼼수들은 상속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감하게 상속세 문제를 거론한 김 회장은 이미 승계를 위한 ‘작업’을 사실상 마무리한 상태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0월 하림그룹이 올품을 부당하게 지원해 사익을 편취했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49억원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2012년 김 회장은 아들 준영씨에게 하림그룹의 지배회사인 한국썸벧판매(올품으로 사명변경) 지분 100%를 증여했다. 올품은 하림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회사다. 당시 준영씨의 나이는 20세였다. 이후 올품을 키우기 위한 일감 몰아주기가 진행됐다. 하림그룹은 국내 최대 양돈, 양계회사다. 올품은 동물약품 및 사료 회사로 양돈, 양계 농장이 최대 고객이다. 하림그룹은 양돈, 양계농장들이 올품을 통해서만 동물약품, 사료를 높은 가격에 구매하도록 했다. 올품은 거래상 역할을 하며 3%의 통행세를 수취했다.

공정위가 지적한 하림그룹의 문제는 승계를 전후해 벌어진 일이다. 사실 승계는 마지막 단계였을 뿐, 적은 자본으로 전체 그룹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 개편은 그 전에 이뤄졌다. 하림그룹은 크게 사료, 양계, 양돈, 홈쇼핑 사업으로 구분된다. 하림은 2001년 농수산홈쇼핑을 설립한 데 이어 제일사료를 인수했고 2007년 국내 최대 돈육업체인 선진을 인수했다. 이후 제일사료는 제일홀딩스로, 하림은 하림홀딩스로, 농수산홈쇼핑은 농수산홀딩스로, 선진은 선진지주로 각각 분할한다.

지주사와 사업회사를 분할하면 지배력을 가진 지주사의 규모가 작아진다. 지배가 목적인 대주주는 지주사 지분만 취득하면 된다. 하림의 4개 계열사는 제일홀딩스-하림홀딩스-농수산홀딩스-선진지주로 지배하는 구조를 갖게 된다. 준영씨가 물려 받은 올품은 제일홀딩스의 지분을 가진 회사다. 이후 제일홀딩스는 농수산홀딩스를, 하림홀딩스는 선진지주를 흡수합병했고, 최종적으로 제일홀딩스가 하림홀딩스를 합병함으로써 제일홀딩스 단일 지주 체제를 완성했다. 제일홀딩스는 상호를 하림지주로 바꿨다.

수없이 이어진 분할합병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주장했지만 지배구조 개편 과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모두 합법적인 절차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의 주장이 허구는 아니다. 주주가치 훼손을 정량적으로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장기 주가는 훼손된 가치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하림그룹에는 6개 상장사(하림지주, 하림, 선진, 팜스코, 엔에스쇼핑, 팬오션)가 있다. 하림지주의 주가는 2017년 6월 상장 이후 46% 하락했다. 나머지 상장사들의 2015년 3월 이후 주가도 마찬가지였다. 하림(42%), 팜스코(57%), 선진 (22%) 등이 하락한 반면 팬오션만 30% 증가했다.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지배구조 개편에 환멸을 느낀 투자자들이 하림을 버리면서 주가는 기업 성장과 무관하게 내리막을 걸었다.

하림그룹의 지배구조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하림그룹은 최근 하림지주와 엔에스쇼핑의 합병을 추진하기로 했다. 엔에스쇼핑 소액주주들은 보유하고 있던 주식 대신 하림지주의 주식을 받게 된다. 이같은 지배구조 개편은 양재동 첨단 물류 센터 개발과 관련해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엔에스쇼핑의 자회사인 하림산업은 2016년 양재동 노른자위 부지를 인수해 첨단 물류센터 개발 사업을 하고 있다. 하림산업은 엔에스쇼핑의 100% 자회사이기 때문에 주주들은 이 사업의 개발이익이 생기면 자기들의 몫이라 기대했다. 양재동 첨단 물류센터 개발 사업은 서울시와 갈등을 빚으면서 지연됐다. 그러다 지난 8월 감사원은 서울시가 부당하게 인허가를 지연시켰다는 감사결과를 발표했다. 5년여 만에 개발 사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같은 기대감에 엔에스쇼핑의 주가는 11거래일 만에 49% 급등했다.

하지만 하림그룹은 양재동 첨단 물류센터 사업의 개발 이익을 엔에스쇼핑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 하림지주와 엔에스쇼핑의 합병은 양재동 사업을 하는 하림산업을 하림지주의 100% 자회사로 만드는 일이다. 엔에스쇼핑 주주들은 자신들이 얻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개발 이익을 하림지주 주주들과 나눠야 하는 꼴이 됐다. 한 엔에스쇼핑 소액주주는 “그동안 엔에스쇼핑에 투자한 이유가 양재동 개발인데 지주에 빼앗기는 듯 느껴진다”고 말했다. 엔에스쇼핑의 주가는 고점 대비 33% 하락했다. 소액주주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다. 엔에스쇼핑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61.5%, 이번에 자사주 소각까지 진행하기 때문에 77%로 높아진다.

한국 재벌 체제의 의사결정은 그룹 차원에서 이뤄진다. 총수의 판단에 따라 계열사 지배구조가 달라진다. 이같은 의사결정은 계열사 소수 주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이사회가 대주주만을 위한 거수기가 아니라 모든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서 G, 지배구조 문제의 핵심이다. 이번에 공정위가 지적한 승계는 증여 부담을 낮추기 위해 이뤄진 수많은 지배구조 개편의 한 조각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주주들의 권리 침해는 합법이라는 이유로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상속세율이 과도해 그랬다는 변명을 주주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 권순우 머니투데이방송 기자 프로필

서강대 신문방송/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경제 기자로서 경제금융계를 10년간 취재하다 지금은 전자, 자동차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담당하고 있다. 유튜브 <발칙한경제>를 진행하고 있고 KBS1 라디오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와 유튜브 <삼프로TV>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ESG에 관심이 많고 저서로는 <수소전기차시대가 온다>, <발칙한경제>가 있다. ESG라는 추상적인 가치가 경영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취재하고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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