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근로자를잇는 노동현장의 구원병"법 보다는 사람이 먼저", 노사 양측 오가는 외줄타기

[직업의 세계-27] 공인노무사 이근덕
기업과 근로자를잇는 노동현장의 구원병
"법 보다는 사람이 먼저", 노사 양측 오가는 외줄타기


3년 전 모 기업의 노사분규 현장. 당시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던 이 대기업의 이례적인 파업사태는 며칠간의 숨막히는 줄타기 끝에 마침내 노사합의 근처까지 다다랐다. 마지막 관문인 노조의 내부 찬반투표가 곧 시작될 시간. 그런데 다시 먹구름이 뒤덮였다. 그대로라면 합의 자체가 전면 무산될 분위기였다.

갑자기 낯선 누군가가 뛰어들어 마이크를 잡았다. 사방에서 ‘당신은 뭐냐!’는 고함이 날아들었다. 누구였을까? 회사측도, 노조측도 아닌 제3의 조정자, 공인노무사 이근덕(42. 위더스 노무법인)씨였다. 빗발치는 고함을 뚫고 이씨가 사자후를 토한 결과는 조금 뒤에 밝힌다.

“저희는 쉽게 말해 ‘노’짜가 붙은 일은 다 한다고 보면 됩니다. 노동법과 같은 법률적인 문제에서부터 근로자들의 산재 사고, 임금 체불, 기업의 인사, 노무관리 자문 등등 상담에서부터 자문, 이 노사분규 때처럼 직접 조정자로 참여하는 것까지 노동문제에 관계된 모든 일을 다룹니다.”

갈등이 있는 곳에 이들이 뛴다. 근로현장의 숨은 해결사, 공인노무사. 기업과 사람을 지키는 전문가다. 노무사 개인에 따라 산재나 임금 문제, 과로사 등 전문 분야가 나눠져 있다. 그중 이씨는 올해로 17년째 노사문제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삼성전기, LG 투자증권, AC 닐슨 코리아 등 약 40개 기업의 자문을 맡고 있다. 한국노동교육원, 한국생산성본부 등에서 강연도 펼친다.

△ 노사분쟁의 숨은 조정자

얼핏 보기엔 법의 문제 같지만,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이다. 노사간에 충돌이 일어날 경우, 노무사의 자리가 특히 크다. 잘 되면 다행이지만, 잘못하면 오히려 양쪽에서 화살을 맞을 수도 있다. 노무사들의 외줄타기다.

“자신의 중심이 서 있지 않으면 어느 한쪽에 휘둘려 결과적으로 오히려 일에 역효과를 가져오거나 기회주의자로 낙인이 찍힐 수 있습니다. 사용자측이든 노동자측이든 의뢰한 곳에 최대한 서비스를 하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의 업무시간중 거의 절반이 바깥에서 흘러간다. 사용자 또는 노동조합의 의뢰에 따라 대개 1년 단위로 자문 계약을 체결한 뒤 평소에 상시 관리를 한다. 의뢰처와 관련된 경제동향이나 노동계 뉴스도 부지런히 뒤쫓지만, 직접 현장이나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좋은 정보는 없다.

산재 사고 등 권리구제사건을 맡을 경우, 일의 60%는 문서와의 싸움이다. 법원의 소송에는 나설 수 없다 뿐, 하는 일은 사실상 변호사와 같다. 고소장과 증거 서류 등 직접 작성하거나 챙겨야 할 서류들이 한아름이다. 언제 누가 도움을 청할지 몰라 휴대폰을 평일, 주말없이 켜 둔다.

어느 일요일 저녁, 한 기업의 다급한 SOS를 받고 지방까지 달려간 적도 있다. 노조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며 ‘내일 아침에 당장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고 한 이들은 임원들까지 비상소집된 가운데 노무사 이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장거리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에 들러보지도 못한 채 곧바로 차 머리를 돌려 다른 기업의 ‘불’을 끄러 간 일도 있다. 노사의 벽이 두꺼울수록 노무사는 절대적인 구원병이다.

인천의 모 섬유공장에서 벌어진 임금관련 분쟁을 조정한 것을 비롯해 이씨는 보험사, 증권사, 정보통신기업, 병원, 항공사 등에서 노사분규 또는 임금관련 분쟁, 파업사태를 조정, 해결한 경력이 있다.

2001년 모 항공사의 노사분규 때는 특히 고생이 심했다. 글 첫머리에 이야기한 바로 그 일이다. 그는 원래 그곳의 노조측 자문을 맡고 있다가 다른 곳에서 튄 불똥이 순식간에 이들의 분규와 전 직원 파업사태로 번지면서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노조뿐 아니라 회사측의 사전 동의하에 부여된 일이다. 그만큼 양측 모두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을 번갈아 만나며 해답을 찾았지만, 워낙 서로의 입장 차가 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씨가 절충안을 만들어 내밀었다. 양측의 기본 원칙은 모두 충족시갭庸?쟁점이 된 임금 인상폭을 다소 낮추는 방식으로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도록 권했다. 양측 모두 절충안에 만족스러워했지만, 선뜻 합의에 나서지는 않았다. 급기야 이씨가 강수를 던졌다.

“먼저 회사측에 ‘이렇게 가면 나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 그만두겠다. 차에서 딱 10분만 기다려보고 그 안에 (합의하겠다는) 전화가 안 오면 그대로 떠?줄 알라’ 책상을 쾅 치며 큰소리 치고 나와버렸습니다. 차에서 기다린 지 5분만에 전화가 오더라구요. 사실 분명히 전화가 올 거라고 처음부터 다 예상을 하고 벌인 일이었지요.”(웃음).

△ 막판 승부수로 교섭 이끌기도

비슷한 작전으로 노조측의 동의도 마저 받아냈다. 파업 6일째 밤, 이씨의 입회하에 마침내 양측 대표들이 최종 합의를 위해 마주 앉았다. 그런데 또 돌발사고가 터졌다. 당장 합의서를 쓰자는 사측과 찬반투표 후 쓰겠다는 노조측이 즉석에서 충돌하면서 돌연 양쪽 교섭단이 서로 화를 내며 퇴장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까지도 어렵사리 이끌어 온 것을 그렇게 원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곧바로 양측 간사들의 멱살을 잡다시피 끌고 와 서로 합의를 했다는 내용에 반 강제로 서명을 하게 했어요. 법적인 효력은 없지만 상징적인 의미였지요. 그리고는 노조측에 그럼 빨리 투표를 하고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불안했던 이씨. 노조원들이 모여있는 서울 외곽의 연수원까지 직접 달려갔다. 비가 내렸던 그날, 다들 우비를 입고 투표를 위해 모여 있었다. 노조위원장이 합의내용을 설명하는 등 순조롭게 지나는가 싶더니, 한 직원이 일어나 울먹이며 이의를 제기하면서 갑자기 상황이 역전됐다.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의견이 쏠렸다. 투표가 이어질 경우, 십중팔구 부결될 분위기였다.

지켜보던 이씨가 급히 집행부의 허락을 받고 갑자기 마이크를 잡은 것이 이때다. ‘노무사도 필요없다. 나가라’는 거친 고함에도 아랑곳없이 원고도 없는 열변을 쏟기 시작했다. 절절한 호소가 끝난 뒤 조금씩 변화가 엿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투표장을 나왔다. 한참 뒤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가 떠올랐다. 약 75%의 찬성으로 가결됐다는 연락이었다. 무사히 모두가 일터로 복귀한 뒤, 이씨는 양측으로부터 모두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가장 애를 먹고도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힘들수록 보람은 더 큽니다.”

거저 얻은 칭찬이 아니다. 조정에 매달린 나흘동안 그도 파업현장에서 이들과 함께 살았다. 종일 긴장속에 뛰어다녔다. 잠도 거의 못 잤다. 책상과 의자뿐인 교섭장에서 이따금 존 것이 전부다. 나흘을 통틀어 8시간쯤 잤다. 파업 조정 때면 거의 예외없이 보이는 모습이다.

이씨는 1980년 성균관대 사학과에 입학, 80년대 민주화 열풍과 진통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다. 이와 함께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뒤 대학졸업 후 한 법률사무소에 취업, 노동문제 상담가로 약 6년간 일했다. 무료 상담이 가능한 그 곳엔 주로 가난한 근로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산재 사고 등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다보면 얼마 뒤 찾아와 고맙다며 우는 이도 있었다. 노동문제에 대한 애착이 점점 더 깊어졌다.

93년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이씨는 우리노무법인을 설립해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으론 학원가에 직접 제안해 처음으로 공인노무사 입시반을 등장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개업 3,4년만에 삼성그룹의 자문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변호사나 공인회계사처럼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지배하는 이 직종에서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자리를 잡았다. 주경야독으로 공부, 성균관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인노무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86년이지만 90년대에 들어 한참이 지나도록 일반인은 물론 기업인들에게도 사뭇 생경한 분야였다. 요즘은 대기업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인사, 노무 관리에서 필수적으로 노무사들의 자문을 받을 만큼 환경이 변했다. 아예 자체의 급여관련 부서를 없애고 이를 외부의 노무사들에게 용역 형식으로 맡긴 기업도 있다. 현재 국내에 활동중인 개업 노무사는 약 600명. 시장의 규모에 비해 아직 약소한 숫자다.

원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기쁨은 크지만,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얘기다. 일이 꼬일 땐 짜증나고 힘들 때도 많다. 무엇보다 입장이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에 서야 하는 역할부터가 만만치않다.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에겐 껄끄러운 고역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실력파 이씨에게?지나친 부담감으로 벌어진 실수 경험이 있다.

△ “나는 위기관리형 체질”

“사건을 맡아 노동위원회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인데, 갑자기 눈 앞에 있는 종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워낙 마음의 부담을 안고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다행히 빨리 대처해 그 상황도 무사히 넘어갔고 결과적으로도 승소를 거뒀지만, 무엇보다 제가 제 자신을 못 견뎌하는 거지요.”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집단 대 집단의 관계, 그것도 이해관계로 맺어진 집단의 문제를 풀어가기가 어디 쉬우랴. 와중에 부딪치는 스트레스를 감당치 못해 도중에 길을 접는 노무사들도 적지 않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때때로 짜증나고 힘들 때야 물론 있지만 제 경우 한번도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왜 이렇게 안 풀리나 답답할 때는 있어도 일을 그만둘까 그런 정도는 전혀 아니었어요.”

그럴 만도 하다. 밖에서는 ‘쉽지 않겠다’며 고개를 젓던 일이라도 막상 현장에 들어서면 생기가 솟는다.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배포와 순발력도 가세한다. 주위에선 ‘현장에만 가면 눈이 반짝거리더라’고도말한다. 자타가 공인한 위기관리형 체질이다.

가정에선 1녀1남을 둔 가장이다. 결혼생활 16년 동안 그는 부부 사이에서도 ‘무분쟁’ 기록을 세운 참신한 남편이다. 직업 효과일까, 타고난 성품일까. 아이들까지도 다른 건 몰라도 이러면 이씨에게 제일 크게 혼 난다.

“자기 생각만 하는 것, 남에게 피해주는 것, 그런 건 용납을 못 합니다. 아이들에게 이 부분은 특히 엄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2-18 13:41


정영주 자유기고가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