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도 울다 갈 족집게타 상품 베끼기 여부 판정에 심혈, 박사출신 1호 심사관

[직업의 세계-28] 특허청 의장심사관 이상영
귀신도 울다 갈 족집게
타 상품 베끼기 여부 판정에 심혈, 박사출신 1호 심사관


남의 것을 베끼지 말라. 기술은 물론, 디자인만 베껴도 이 사람에게 걸린다. 특허청 의장심사관 이상영(40) 박사. 상표의장심사국에 기용된 박사 출신 제1호 심사관이다. 의장, 즉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생활, 기계, 가전제품 일부 등 5개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의장등록을 받으면 고유의 디자인을 타인이 모방할 수 없게끔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출원인이 등록을 신청한 상품의 디자인을 검토해 등록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 저희 심사관들의 역할입니다.”

특허청은 대전정부종합청사에 자리해 있다. 그 안에 상표의장, 기계금속, 화학생명공학, 전기전자 등 4개 심사국이 있다. 대한민국에 통용되는 의장 등록 상품은 모두 이 곳을 거친 것들이다. 심사관들만 약 400명이 포진해 있다. 사실상 특허청을 움직이는 핵심부대중 하나다.

이름은 그럴 듯 하지만, 이 박사를 비롯해 심사관들이 일하는 모습은 그리 부러울 것도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뚫어지게 모니터만 쳐다보며 앉아 있다. 특허청의 전자시스템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수준. 심사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두 컴퓨터로 시작돼 컴퓨터로 끝난다. 모니터를 상대하는 것도 이쯤되면 중노동이다. 갓 투입된 초보 심사관이라면 며칠만 지나도 엉덩이에 땀띠가 날 만하다. 눈이 가장 혹사당한다. 야근까지 이어지는 날엔 눈이 침침하고 아프다 못해 눈물까지 흐른다. 어깨도 뻐근하고, 갑자기 안경을 끼고 나타나는 심사관들이 점점 늘어난다. 한창 일이 바쁠 땐 주위에 들리는 소리라곤 서류 뒤적거리는 소리 아니면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할 때 나오는 ‘째깍’ 소리뿐이다. 찾아오는 손님조차 별로 없다. 한 달에 한두번 특별한 면담 신청이 있을 때를 빼고는 민원인을 직접 만나지 않는다. 빠듯한 책상 위에 두 폭짜리 병풍처럼 펼쳐진 컴퓨터 모니터만 별 재미도 없어 보이는 도면과 각종 문서들을 끊임없이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그래도 모니터는 최상급이다. 대당 200여만원짜리 21인치 LCD모니터가 두 대나 된다. 해상도 1600x1200, 이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도면이 한 화면에 다 담기지 않아 작업이 더 더뎌진다. 모니터 한쪽엔 심사 대상 품목의 도면을 펴고, 다른 한쪽엔 비교 대상 자료를 펼쳐 동시 대조에 들어간다. 여느 고급공무원 사무실에서도 보기 힘든 이 최상급 모니터가 제 1착으로 보급된 것도 의장심사관들 앞이었다.

- 등록심사는 도면과의 싸움

디자인 등록 심사는 사실상 도면과의 싸움이다. 살펴봐야 하는 도면이 크게 두 가지, 일종의 투시도인 ‘사시도’와 좌우 측면 등 여러 각도에서 도면으로 표시한 ‘육면도’가 필수다. 검토는 까다롭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可, 不可, 또는 문제 부분을 보완한 뒤 다시 심사를 받도록 기회를 주는 ‘의견 제출 통지’, 이 세가지 중 하나다.

변리사 등 전문가의 지원 아래 대기업의 경우 무난하게 합격 판정을 받는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처지의 신청인들이다. 심지어 자도 대지 않고 손으로 비뚤비뚤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이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도면이 아니라 만화에 가깝다. 알고 보면 의장 등록 자체도 낯설고 수십만원의 비용을 쓰며 변리사를 부를 처지도 못되는 영세 상인들의 작품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림을 알아볼 수 없다. 결국 문제 부분을 고친 뒤 다시 심사받도록 의견제출 통지서를 보낸다. 하지만 불합격 사유를 친절히 써놓은 통지서 내용조차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전화기에 매달리거나 직접 찾아오는 신청인도 있다. 디자인 박사, 맘 속으로 똑같이 속이 탄다.

“저희는 신분상 직접 신청인의 도면을 고쳐주거나 손을 대지 못하도록 돼 있거든요. 그런데 사정이 너무 딱한 분들을 보면 가끔은 보다못해 팩스 등으로 도면을 받아본 뒤 잘못된 부분을 화살표 등으로 집어주고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보완하시면 된다’고 이야기로 설명해드리곤 합니다. 사실 심사관은 심사 결과만 알려주고 관여하지 않아야 되는데, 막상 그런 분들을 보면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 베끼기 확인되면 무조건 탈락

타 상품의 모방 여부를 가려내는 것도 주요 임무 중 하나다. 과거의 출원건 자료는 물론 외부의 카탈로그나 팜플렛 등 참고할만한 자료란 자료는 죄다 뒤진다. 기본서류만 1건당 약 20페이지 분량, 여기에 참고 자료까지 합치면 훑어봐야 할 분량이 훨씬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한달 평균 약 210건을 처리한다. 선택이 아니라, 심사관 1인당 반드시 해결해야 할 책임량이다. 일요일만 쉰다 쳐도 하루에 약 9건 꼴이다. 늦어도 40~50분마다 1건씩 심사가 끝나야 한다. 평소 꾀를 피우는 것도 아닌데 월말이면 막판 밤샘을 면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일이 많은 건 나날이 불어나는 신청건수를 심사관들의 숫자가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디자인 분야는 상품의 부분마다 쪼개면 쪼개는 대로 가짓수가 늘어난다. 세탁기 하나만으로도 40~50가지 출원이 가능하다.

누적량이 많다 보니 신청 후 심사 결과를 통보받기까지 평균 6~7개월이 걸린다. 상표 등록에 비하면 그나마 ‘초스피드’ 수준이다. 상표 출원은 평균 1년이 소요된다. 특허청에 박사 출신 심사관들이 영입된 것도 이 같은 인력과 시간의 한계를 전문가들의 노하우로 이겨보려는 절박한 자구책에서 비롯됐다.

6개월 또는 1년이나 기다린 끝에 받아든 통보가 ‘등록 거절’인 경우, 당사자의 기분은 오죽할까. 만약의 오류를 막기 위해 심사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심사관들이지만, 남의 것을 베낀 것이 확인될 경우 지체없이 탈락 처분이다. 심사관의 눈을 속이려는 수법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베껴 만든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원래의 상품 카탈로그에 실린 사진과 전혀 다른 각도로 상품 사진을 찍어 버젓이 제출한다. 사실 웬만한 심사관들도 좀처럼 잡기 어렵다. 그렇다고 꼭 무사 통과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디자인 박사의 공력도 만만치 않다.

“모 업체에서 출원한 캐스터(의자 등의 이동용 장치) 자료를 들여다보는데 아무래도 어디서 본 것 같은 거예요. 계속 뚫어지게 보다 보니 외국 것과 똑같이 만들어놓고 사진을 찍을 때 정면이 아니라 거꾸로 놓고 찍은 거더라구요. 주위에서 ‘이 박사, 어떻게 그런 것까지 집어냈어!’하며 신기해 하셨어요.”

- 전기톱 시위 등 ‘난리굿’도

평소에 조용하던 사무실이 두어달에 한번씩은 들썩거린다. 거절 통보에 화가 나 찾아온 이들의 소동 때문이다.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며 난리를 치는 이도 있다. 이웃 부서인 상표심사국은 더욱 소란이 잦다. 한때 ‘전기톱 사건’도 있었다. 큼직한 스포츠 가방을 들고 찾아온 한 신청인. 신청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왜 자신의 것을 빨리 심사해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상표심사는 의장 심사쪽과는 또 달리 별도의 ‘우선 심사 대상’ 제도조차 없는, 철저한 선착순 원칙을 따른다. 점점 신청인이 흥분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가방에서 전기톱을 꺼내 들었다. 급기야 출동한 청원경찰들에게 이끌려 나가고서야 일대를 떨게 만든 공포 분위기가 겨우 진정됐다.

등록 문제를 둘러싸고 경쟁 업체와 업체간에 분쟁이라도 벌어지면 상황은 더 요란해진다. 특허청내 심판원을 거치고도 끝내 조정이 안 될 경우 법원으로까지 연장전이 벌어진다. 얼마 전 언론에도 보도됐던 음료회사들간의 치열한 ‘카페 라떼’ 상표 분쟁은 대법원 판사 앞에서야 막을 내렸다. 원래 일본에서 시판되던 상품을 국내 모 유업이 들여와 상표를 등록하지 않은 채 판매하다가 결국 동종 경쟁사들간에 치고 박는 쟁탈전으로 번진 것이다.

얄궂은 출원도 있다. 남자 성기 모양의 컵이나 괴상망칙한 정력 팬티 등으로 디자인 등록을 신청하는 경우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경우 거절 사유가 된다고 법에 나와 있지만, 기준이 애매하다. 탈락을 시키자니 ‘조선시대 발상’이라 비난받을 수 있고, 그렇다고 제작자의 권리를 존중해 허용하자니 ‘공기관이 웬 퇴폐 조장이냐’는 화살이 돌아올 지 모르는 딜레마가 겹친다. 정 곤혹스러울 땐 다른 심사관들과 난상토론을 벌인다.

“제 개인적으로도 이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 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공무원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고맙고, 같은 디자인 분야안에서도 다른 직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장점과 재미가 있습니다.”

- 산업디자인 분야 15년 경력

심사관 생활 자체로만 치면 이 박사의 경력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의장심사국에 들어선 것이 지??2월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학부까지 합쳐 15년 가까이 산업디자인 분야에만 있었다. 1992년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드 몽포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출신으로 영국에서 세 번째로 디자인학 박사학위를 받은 주인공이다.

2000년에 귀국해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벤처 사업에 몇 차례 참여하면서 짧은 기간이나마 세상의 달고 쓴맛도 고루 경험했다. 한국디자인경영연구소에서 약 1년간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우연히 특허청 상표의장심사국의 첫 박사 특채 공고를 만났다. 입사와 함께 쏟아지는 주위의 관심과 기대만큼이나 스스로도 하고 싶은 일들이 무궁무진했다. 6주간의 연수 후 의장1과로 배속돼 실무를 맡은 것이 작년 4월. 선배 심사관들과 공동심사형식으로 일하며 실전을 익히다가 온전히 자신의 서명으로만 통지서를 발부할 수 있게 된 것이 9월 중순에 이르러서였다.

“처음에는 실수도 많았어요. 벽지나 패션 의류 등과 같이 유행을 타는 품목은 신청만 하면 심사없이 바로 등록해 주는, 선등록 무심사 대상이거든요. 그걸 모르고 의견제출 통지서를 보냈다가 나중에 실수를 안 적도 있어요.”

얼마 전 다른 심사관들과 회식 후 함께 청내로 들어서던 일행 중 유독 이 박사에게만 보안요원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 적이 있다. 아직 공무원 티가 나지 않는 탓이다. 그래도 그 요원이 정말 실수한 거다. 알고 보면 이 박사는 이미 바깥에서도 알게 모르게 심사관 티를 풀풀 풍기고 다니는 중이다. 어딜 가든 의장 등록이 되었나 여부부터 반사적으로 시선이 쫓고 있다. 아이디어가 좋아보일 땐 ‘의장 등록을 받아두면 좋을텐데…’ 혼자 안타까와 주인에게 한마디 권해보기까지 한다. 신청이 늘면 그렇찮아도 산 같은 일감이 더 늘어 종국엔 자신에게 또 돌아올텐데도 다 잊어버린다. 포부는 또 얼마나 야무진가. 모니터만큼이나 최상급이다.

“제가 가진 작은 지식이나마 우리나라 산업디자인계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제가 맡은 이 심사분야가 월드베스트가 될 수 있도록 일조하고 싶습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2-25 15:38


정영주 자유기고가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