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쿨한 자신감으로 빛난다어느덧 데뷔 25년, 연기와 인생에 눈뜬 원숙미로 왕성한 활동

[스타탐구] 금보라
보랏빛 쿨한 자신감으로 빛난다
어느덧 데뷔 25년, 연기와 인생에 눈뜬 원숙미로 왕성한 활동


왕년의 스타들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름만으로도 심장을 멎게 했던 눈부신 외양의 자리엔 세월과 함께 발효된 완숙미가 더해져 신뢰감이 느껴진다. 데뷔 25년을 맞은 금보라도 그 중 하나다. 1980~1990년대 톱스타로 인기를 누린 그는 2000년대 접어들면서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방송가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연기와 인생에 눈뜬 이 씩씩한 아줌마 배우와의 한바탕 수다.

“젊은 애들 놔두고 아줌마 인터뷰는 왜 한다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예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의 그는 천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지금은 괄괄한 아줌마의 모습으로 남자들에게 큰 소리를 ‘뻥뻥’ 치지만 과거엔 가련한 여인이었다. 검열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그는 주택 분양권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염전의 빈민이었고, <장사의 꿈>에서의 그는 먹고 살려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여공과 스트립 걸로 전전해야 했던 어촌 처녀였다. 최고 미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모 화장품 회사 광고 모델이었으니 당시 그의 인기는 알 만하다. 그를 잘 아는 중견 연출가는 “그녀가 지나갈 때는 금가루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만큼 화려했다. 지금이야 개성있는 얼굴들이 오히려 대중들에게 어필하지만 당시엔 정말 예뻐야 방송에 나올 수 있었고 연기자라고 불렀다”라고 말한다.

- 영부인을 꿈 꾸던 예쁜 여고생

학창 시절 꿈은 영부인이었다. 이 소문을 어찌 들었는지 인근 남자고등학교에서는 육군사관학교에 가겠다고 나서는 학생들이 대거 속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차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금보라의 꿈은 바뀐다. 죽지 않고도 영부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딩동댕. 연기자.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안양예술고등학교 1학년인 1978년, 영화진흥공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시한 남녀 주연 배우 공모에 지원해 강석우와 나란히 뽑힌다. 어린 나이에 일찍이 충무로 리듬을 몸에 익힌 그는 1980년 <물보라>라는 영화에 출연, 그 해 대종상 신인상까지 수상한다. 금보라라는 지금의 이름도 당시 김수용 감독이 지어준 것으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편의 의심을 견디다 못해 바다로 뛰어드는 어부의 어린 아내 연기는 신인답지 않은 안정감을 보여줬다. “그땐 아무 것도 겁날 게 없었죠. 추운 바닷가에서 몇 달씩 고생하며 찍은 건데 그래도 마냥 즐거웠으니까요.”

변해서 아름다운 것이 배우만의 특권이라더니, 결혼 후 아이 셋을 낳고 주부가 되어 돌아온 그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으면서도 좀 살아본 여자같은 넉넉함과 푸근함이 느껴진다. 두 이복 자매의 갈등이 기본 축으로 전개된 아침 드라마 <황금마차>에서는 두 자매의 고모로 출연해 친정집에 더부살이하지만 입바른 소리 잘 하는 푼수기있는 캐릭터를 보여줬고, 주말연속극 <여우와 솜사탕>에서는 조카 사위 친구인 김영호와 연상연하 커플의 닭살 로맨스를 재미나게 펼치기도 했다. “건방진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젠 어떤 연기든 다 자신 있어요. 아이 셋 키운 아줌마가 뭘 못하겠어요? 생활에 부대끼다 보니 목소리도 커지고 연기에도 눈을 뜬 것 같네요. 이젠 진짜 사람냄새 나는 역할 한번 해보고 싶어요.”

- 순발력과 흡인력으로 제2 전성기

그 바람을 방송사에서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대장금>에서 술도가를 운영하는 강덕구(임현식 분)의 처 나주댁으로 나와 억척스럽고 능글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5년 그의 연기 인생을 총망라해놓은 듯 편안하다. 중견 연기자들만이 내뿜는 특유의 순발력과 흡인력이 묻어난다. 2년째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 <토크쇼, 임성훈과 함께> 역시 그의 인생 경험이 묻어나는 프로그램이다. 가끔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들로 제작진들을 깜짝깜짝 놀래기도 하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가식없이 풀어놓는 그에게 누구도 얼굴을 찡그리지는 않는다.

간혹 사람들이 드라마 속 배역과 자신을 일치시키려 한다는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는 ‘편안한 연기자’로 대중들 사이에 인식되고 있는 것에 흡족함을 느낀다. 청산유수 같은 하이톤의 말솜씨지만 그 말속엔 담백한 진실이 있다. “여배우로서 나이 먹는다는 것? 장점은 깊이가 생긴다는 것, 단점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이겠죠. 나이 먹는다고 무조건 연기가 좋아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죠.”

예전이 돌멩이 하나에도 큰 물결을 만드는 작은 연못이었다면 이제는 드넓은 가슴으로 브라운관을 품는 푸른 바다다. 인생의 경험이 축적된 만큼 연기의 진폭도 넓어졌다. 힘들다면 힘든 ‘연예계’라는 곳에 속해 있지만 금보라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씩씩하다. 속이 빤히 보이는 엄살이, 이유없는 유약함이 없어 좋다. 불혹을 막 넘은 아줌마 배우, 금보라가 내뿜는 이 쿨한 자신감이 그의 가장 큰 매력이자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금보라식 연기로 중견 연기자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는 그가 있어 한국 드라마의 표정은 점점 더 다양해지는 것 같다.

김미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3-04 13:41


김미영 자유기고가 minju@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