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감성 봄볕같은 그녀외피속에 꼭꼭 숨겨진 열정의 연기자 TV서 낯설지만 깊이있는 색깔연기

[스타탐구] 이은주
달콤한 감성 봄볕같은 그녀
외피속에 꼭꼭 숨겨진 열정의 연기자 TV서 낯설지만 깊이있는 색깔연기


그녀를 보면 자꾸 인사동의 유명한 고갈비집이 생각난다. 약간은 어두운 형광등 불빛과 낙서로 가득한 낮은 천장 아래서 문성근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영화 <오! 수정>의 흑백 필름 이미지가 각인되서일까? 실제로도 그 집에 가면 그녀가 내숭과 솔직 사이를 오가며 열심히 고갈비를 뜯고 있을 것 같다. 요즘 배우답지 않은 진중한 태도로 차근차근 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영화배우 이은주. 느리게 겉돌아도 ‘작품’만을 찍고 싶다는 그녀의 이유있는 고집을 들어보자.

- 조신한 이미지, 별명도 '애늙은이'

나이가 묻어나는 목소리 탓일까? 그녀는 매 작품마다 실제 나이보다 열살 정도는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1980년에 태어났음에도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80년대를 살아가는 여대생을, <오! 수정>에서는 다방에서 선배 정보석과 몰래 키스를 나누는 스물 일곱살의 구성작가를 연기했다. 아주 예쁘기만 한 것도, 아주 이지적이기만 한 것도, 아주 차갑거나 아주 따뜻하기만 한 것도 아닌 그녀의 복고적인 이미지는 그렇게 실제보다 성숙한 인물들을 주문받게 했나 보다. 별명도 ‘애늙은이’다. 꾸미는 것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 액세서리나 화장품도 따로 구입하지 않는 편이다. 관심사라면 희귀 영화 테이프를 구해보는 정도. 재미없을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경험해보지 못한 연기는 자신이 없잖아요. 그래서 더 간접 체험을 많이 해보려고 노력해요. 책도 보고 비디오도 보면서 ‘그땐 저랬구나~’하면서 느끼는 부분이 많아요. 억울하지않냐구요? 전혀요. 요즘 신세대 연기하라고 하면 그게 더 어려울 것 같아요.”

-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천착

방송 데뷔는 고등학교 때 교복 모델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백야 3.98>에서 심은하의 어린 시절 역을 맡으며 얼굴을 알렸고, <카이스트>에서 연기한 당찬 고학생 구지원 역은 이은주라는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영화는 박종원 감독의 <송어>가 첫 데뷔작으로 영화의 맛을 가르쳐준 소중한 작품이다. “영화는 현장에서만큼은 상업적이지 않아요. 기다림을 반복하며 온갖 정성을 쏟아 붓죠. <송어> 찍을 때 왜 그토록 선배 연기자들이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지 알겠더라구요.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많구요.”

이은주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주로 ‘어른’들과 파트너로 많이 출연했다. <송어>를 함께 찍은 강수연, 설경구를 비롯해 <오! 수정>의 문성근과 정보석, <번지점프를 하다>의 이병헌 등 학창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어른들을 통해 일찌감치 영화가 주는 힘을 터득했다. 어떤 소재와 주제도 ‘재미와 감동’으로 용서되는 요즘 영화계에서 유난히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그녀만의 이유있는 고집도 바로 이런 대 선배들과의 호흡을 통해 산출된 결론이다. 그런 면에선 인복이 참 많다.

- 영화계의 단비같은 연기자

심은하, 고현정 등 은퇴한 여배우들의 귀환만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여배우 기근 상황에서 이은주는 분명 단비와 같은 인물이다. 혹자는 ‘국내 영화계의 보물’이라고 까지 칭찬하는데 그녀의 잠재력을 놓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맵고 짜고 달콤한 자극만을 분주히 길어올리는 팔색조 스타와는 달리 차분하게 자기 개성을 살리는 그녀만의 연기는 익숙치 않은 낯선 감동으로 슬그머니 관객들을 압도한다.

영화에서 매번 죽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 소설>, <하늘 정원>을 비롯해 최근 개봉작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마치 무슨 법칙인냥 죽는다. 간혹 친구들이라도 만나면 “이젠 그만 좀 죽으라”며 성화다. “씩씩하고 강한 사람들 이야기는 이상하게 안 끌려요.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 상황 때문에 고뇌하고 아파하는 인물들에 자꾸 눈이 가네요.” 특히 배급 쌀을 얻기 위해 이름도 모르는 단체에 가입했다가 우익 청년단체의 손에 죽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신 역은 지금까지의 캐릭터들과 그 맥락을 같이하며 수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여가 시간엔 주로 혼자 있는 걸 즐긴다. 여행도 혼자가는 게 좋다. “둘이 가면 가는 동안 계속 대화해야 하잖아요. 혼자가면서 생각하는 게 좋아요.” 피아노도 수준급이다. 모델 데뷔 전만해도 피아노로 대학진학을 할 계획이었다. <오! 수정>과 <카이스트>를 보면 실제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전보다는 앙드레 가뇽이나 유키 구라모토 같은 뉴에이지 계열의곡을 좋아한다.

- 맛있는 것 만들어 먹고, 땀 흘리며 운동하고…

군산에서 거주하다 대학 진학을 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자취 생활을 시작했으니 요리 실력도 만만치 않다. ‘간장 떡볶이’라는 요리하기 그리 만만치 않은 메뉴를 좋아하고 즐겨 해먹는다. 또 소문난 음식점은 다리품을 팔아서라도 꼭 찾아가 먹어본다고. 운동도 좋아한다. 역시 함께 하는 것보다는 헬스나 수영처럼 혼자 하는 게 좋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그간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듯 하다.

- 차가움과 뜨거움의 '이중모드'

반갑게도 한동안 스크린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를 이제 브라운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대장금> 후속으로 방송될 <불새>에서 이서진과 호흡을 맞추며 그간의 이미지를 훌훌 털어낸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세상물정 모르고 까불다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장세훈(이서진)을 만나 첫눈에 반하는 사고뭉치 아가씨 역으로 벌써부터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차갑고 단단한 외피 속에 감춰진 불화산 같은 열정으로 분주히 내달리고 있는 이은주. ‘연기자’라는 레테르가 어색하지 않은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해 중간 중간 좌절을 겪을 각오도, 짜릿한 희열을 만끽할 준비도 되어 있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이중 모드’를 안전하게 구사하고 있는 이 애늙은이 아가씨의 지구력에 기대를 걸어보자.

글 김미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3-25 14:03


글 김미영 자유기고가 minju@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