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연예술의 빈 라덴"'문화지구에서 내쫓기는 문화인들' 안타까운 현실에 경종울리기

[한국 초대석] 행위예술가 심철종
"나는 공연예술의 빈 라덴"
'문화지구에서 내쫓기는 문화인들' 안타까운 현실에 경종울리기


뉴욕에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가 있다면, 서울에는 ‘씨어터 제로(Theater Zero)’가 있다. ‘그라운드 제로’는 9ㆍ11 테러가 남긴 폐허와 증오를 밑거름으로 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수행하고 있는 헤게모니전의 상징일 것이다. 그러나 홍익대 앞에 있는 또 하나의 영점(零點), ‘씨어터 제로’는 소비와 향락을 중심 코드로 하여 재편되고 있는 21세기 한국 청년 문화에 대해 날리는 즐거운 선전 포고의 광장이다.

행위예술가 심철종(44)은 그 중심에 있다. 언제나 적수공권이었지만, 그런 것은 그에게 전혀 구애가 되지 않았다. 그의 예술과 인간성을 신뢰하는 인(人)의 장막속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 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막 밖의 사람들은 그에게 ‘또라이’라는 별명을 하나 붙여 두고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떼지 못 한다. 좋은 의미에서 그는 아방가르드이자, 통속적 의미에서는 시쳇말로 엽기이다.

3월22일 오후 3시 씨어터 제로 앞마당. 이번에는 ‘우리는 다 벗고 거리로 나간다!’라는 제목의 누드 퍼포먼스였다. “극장 살리기란 명분보다는, 이 기회에 국민에게 재미 있는 이야기 하자는 마음이었죠.” 극장 홍보를 목적으로 한 이벤트는 아니었다는 말. 그러나 내외신에 e-메일로 미리 알리고 했을 만큼, 단단히 마음 먹은 일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풍경이었을까?

- 위선의 끄나풀을 향한 백주의 도발

극장 앞마당에서 ‘8ㆍ15 밴드’라는 인디 밴드가 사물놀이의 타악속에서 ‘애국가’를 록 버전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행사는 시작했다. 경찰 300여명이 예상밖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행위예술가 김백기 등 그와 교분을 나누고 있던 인근의 젊은 예술인 20여명이 “씨어터 제로를 살리자”는 등의 구호를 하나씩 외치고는 차례 차례 옷을 벗었다. 물론 그 역시.

그는 끊임없이 뭔가를 획책한다. 또 매우 그럴싸하게 도발한다. 그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그룹은 아슬아슬하게 작동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 도사린 위선의 끄나풀들을 백주 대낮에 우리 코앞에 바싹 들이댄다. 그의 별난 행위들은 “자, 이래도 계속 의뭉만 떨거요?”라며 통념과 무반성의 나날을 질책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팬티까지 벗었지만 성기는 스카프 등으로 미리 가려져 있었다. “마포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했더니, ‘국부를 가리면 된다’고 해서 택했던 길이었죠.”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알고 있던 충남 예산 수덕사측에 연락해 급히 빌린 상여를 후배 예술가들과 함께 메고 극장 앞마당에서 홍익대 정문까지 1㎞를 왕복 행진했다.

그렇게 판은 벌어졌다. 장정들이 벌건 대낮에 팬티만 입은 채 상여를 메고 가는데, 관심을 못 끌 리 없었다. 마침 당시는 탄핵 시국. “알고 지내던 후배 기자는 ‘탄핵 반대’라는 문구를 넣어 시선을 끌라고 하더군요. 나체 행진 소식을 들은 NHK 방송은 ‘탄핵 관련이라면 취재하겠다’며 은근히 부추기더군요.”

그러나 그는 이번 퍼포먼스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당면 과제는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자기 예술과 극장의 존폐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정이야 어쨌건 벌건 대낮의 일탈에 주민들은 즐거워 했다. 경찰과 행진대측을 왔다 갔다 한 심씨의 노력 덕에 충돌은 없었다. 막걸리집에서 가졌던 세 시간의 뒷풀이에서 개그맨 전유성 등 뒤늦게 합세한 선배들은 “설사 구속된다 하더라도 벗고 가야 한다”며 격려했다.

그들은 왜 벗어야 했던가? 홍대앞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당국의 조치 때문에 터줏대감이어야 할 문화ㆍ예술인들이 쫓겨 나가야 하는 기막힌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문화 지구라는 명목이 하나 더 붙자, 결국 땅값과 건물 임대료만 올라 가고 말았던 때문이다. 주머니 얇은 예술가들은 다름아닌 자신들의 터전에서 밀리고 밀려, 짐을 쌀 수 밖에 없게 된 현실에 한 번 조의라도 표하자고 뜻을 모았던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 명언을 그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이야. 그 장송 행진을 집徨?제주(祭主)가 바로 홍대 앞의 터줏대감 심철종이었다.

- 아방가르드와 엽기 사이에서

통념과 불화하며, 세상의 의표를 찌르고, 통념을 비웃고, 상상을 뛰어 넘으며, 대안의 길을 충격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는 아방가르드다. 1999년 극장 앞마당에서의 ‘스트레스 굿’ 역시 그에 의해 저질러 졌다. 인디 록을 배경으?폐차장에서 갖고 온 차를 마구 부수던 그 광경은 TV에서 생생히 방영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가장 또라이적, 혁신적인 공연을 할 수 있다”며 그는 당시 비디오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는 “현대는 예술가들이 너무나 소외돼 있는 시대”라며 “예술가적 삶을 스스로가 등한시한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모든 행위들이 혼돈과 착종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메시지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때로 세상일이 예술보다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다. 상식과 일상의 허를 마구 마구 찔러 들어 온다. 그럴 때,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는 말했다. “탄핵안 통과의 난장판을 보니, 국회에 똥물을 퍼 부은 김두한 같은 사람이 절로 그리워지더라”며 “지나치게 공허해진 국민들이 탄핵이라는 계기를 만나 열광하는 형국”이라며 행위예술가적인 시평(時評)을 곁들였다. 이어 그는 “그렇다면 우리 예술가들이 한국 사회 최대의 문제인 정치를 변화시킬 차례”라며 남겨진 숙제 하나에 대해 이야기 했다.

예술과 정치라는 주제에 관한 한, 그는 분명 이야기 할 자격이 있다. 2003년 초, 그는 마포구 구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결심, 그 문턱에까지 갔기 때문이다. 넉넉찮은 주머니 사정에 공탁금 200만원까지 걸어 후보 등록까지 마쳤다. 예술인들은 언제나처럼 든든한 보루였다. 30여명이 이를 테면 가두 유세를 펼친 셈이다. 그런데 당시 그들은 아무 구호도 외치지 않고, 그저 자전거에 ‘나는 홍대앞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등의 대형 플래카드를 펼친 채 하루 종일 돌아 다녔다.

2003년 그가 썼던 책, ‘나는 날마다 혁명을 한다’에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책소리刊). ‘18! 그 따위 문화, 그 따위, 개나 물어 가라!’고. 홍대 정문-지하철역-피카소 거리를 포괄하는 수만평의 땅을 세계적인 예술 지대로 만들려던 애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갈 위기에 처한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마치 한 판 누드 퍼포먼스처럼 일체의 가감없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당국이 고시한 예정대로라면 극장은 4월이면 문을 닫아야 한다. 건물 용적률을 위반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지금의 썰렁한 분위기대로라면, 한 달에 보통 20여일은 늘 공연이 올라 갔던 일이 까마득한 과거 같다. 더불어, 1998년11월 22일 동료 예술인들과 함께 꾸민 장대한 개관식 또한 비디오 테이프에서나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의욕에 부풀어 있다. 벗고 나서기까지 했으나, 사실 3년전의 암울한 상황에 비하자면 아직 최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적자가 쌓이고 쌓여 1억을 육박하고 있었다. “거의 자살 직전이었어요.”그 당시도 두터운 인(人)의 장막 덕에 타개할 수 있었다.

온갖 아이디어들로 가득 찬 시어터 제로의 벽에서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배치된 두 개의 표어가 보인다. ‘우리는 매일 혁명을 한다’, ‘생각하는 즉시 행동으로 옮기자’. 행위 자체를 예술로 직결시키는 그의 금과옥조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전위의 끝에 선 사람이 내뱉는 고립감의 단말마적 표현이라고도 비쳐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 인사이드로의 전향인가

그 혁명가, 심철종은 “한 2년 뒤에는 대통령 출마 퍼포먼스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현실적이고 구체적 전제 조건을 달았다. “단, 공탁금 2억 스폰서만 들어 온다면.” 하기사 “억, 억” 거리며 차떼기가 횡행하는 세상 아닌가. 그의 ‘2억론’은 괜히 나온, 해프닝 같은 말은 아니다. 이제 자신은 계속 아웃사이더이기만을 고집할 수 없는 위치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미완의 해프닝으로 끝난 이번 누드 행진에 앞서 밝힌 글 ‘우리는 왜 벗어야 했는가?’에서 그는 자신의 희구와 함께 현실 입지를 어느 정도 암시했다. “경제가 안정돼 진정한 문화 세계로 나아가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모두 다 같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 이제 인사이더로서의 고민을 끌어 안자는 전향적 거취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대로는 극장을 꾸려 나갈 수 없고, 이제는 후배들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된 거죠.”

벗고 나서는 행위예술가로서보다는 후배들을 빛나게 할 기획자나 연사로서, 자신의 입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연사로 나서겠다는 대목은 좀 뜻밖이다.“나는 한때 마을 버스값 300원도 없어 애를 먹었어요. 이제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주제로 두 시간 정도의 강연을 준비중이예요. 마을회관이나 기업연수장, 아니면 노숙자들을 상대로 저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요.”

그 모든 행위들을 추동하고 계속성을 부여하는 원천은 무엇인지, 물었다. “한국에 사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환경을 만들자는 거죠.” 뒤집어 본다면, ‘한국에 사는 게 행복한가?’하는 질문처럼 들렸다. 확실한 것은, 그는 질문 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 “예술가적 삶 살겠다”

그는 다짐했다. “나는 공연의 빈 라덴이 되겠다”고. 또 “정말로, 퍼포먼스적 테러를 하겠다”고. 그리고 “예술가적 삶을 정확하게 지키며 살겠다”고 곱씹듯 말했다. “씨어터 제로는 제가 목숨 걸고 지킬 의무가 있어요. ‘오프 오프’의 근원으로서 살아 남을 겁니다.” 전위 공연 본거지인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의 한국 버전을 기필코 실현시키겠다는 의지가 뚝뚝 배어 난다.

수원대 연극영화과에 출강, ‘고급 연기론’을 강의중이기도 하다. 절망의 20살때 접한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을 가장 좋아 한다. 최근 들어서는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즐겨 듣는다고. “인간의 솔직한 호흡을 느끼거든요.”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4-04-07 21:10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