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 올곧은 복원에 헌신규장각의 토대를 만들어낸 국사학자

[한국 초대석]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
잃어버린 역사 올곧은 복원에 헌신
규장각의 토대를 만들어낸 국사학자


5월 19일, 관악산 자락 서울대 캠퍼스의 초여름이 익어 가고 있었다. 한 때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던 아크로 폴리스에는 록 밴드의 굉음이 가득하고, 부침개 만들어 파는 학생들이 옆에서 캠퍼스 축제의 재미를 더했다. 전쟁이라도 치르듯 빽빽이 늘어 선 승용차마저 축제라는 깃발 아래 묘하게 어울려 탈(脫)일상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생명이 약동하는 그 분위기 때문일까, 규장각(奎章閣)을 찾는 국사학과 이태진(61) 교수의 발걸음도 한결 가뿐했다. 바로 제 2의 집이 아닌가.

현재 증축 공사가 한창인 이 곳은 그가 1988~92년까지 도서관리실장으로 있던 곳이다. 35만 여점에 달하는 귀한 고서적을 갈무리하고 내용을 연구하는 일, 즉 가장 핵심적인 업무를 총지휘한 것이다. 규장각의 토대를 세운 선생이 이 곳에 쏟아 붓는 애정과 관심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 임기가 끝나고 나자 한 번 더 맡아 주십사 하는 요청이 들어 왔으나, 미뤄둔 내 공부를 위해 고사했죠.” 규장각을 조선시대 당시의 모습대로, 창덕궁과 창경궁까지 포함한 600분의 1 크기로 정밀 복원한 미니어쳐 앞에서 선생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규장각이란 데는 1990년까지도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주연이나 갖던 하릴없는 곳으로 굳어질 뻔했다. “그래서 한국일보의 시론 ‘천자춘추’에다 그 기막힌 오해에 대해 썼더니, 관광공사에서 조치하겠다는 답을 했다더군요. 석달 뒤에 가보니 규장각더러 집현전이라고 하더군요.”

그 같은 정황은 창덕궁 후궁에 순종을 유폐시키고, 황실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격하한 일제의 후안무치에 비견될 만한 무지였다. 일제의 한국사 능멸 프로젝트는 규장각 집무소 일대를 아예 헐어 버리고 창덕궁 경찰소로 써 먹는 것으로 점입가경을 연출했다. 현판 글씨가 숙종의 어필로 일필휘지된 규장각이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은 박정희 정권때였다.

‘ 규장’이란 원래 역대 왕들의 필적을 뜻하는 말로, 거기에 집을 뜻하는 ‘ 각’이 붙어 현재의 명칭이 된 것이다.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서지 않는다)’라는 휘호가 쓰여진 족자는 조선의 도저한 인문주의적 전통을 증명해 준다. 그것은 나아가 민주적 시스템으로 이어진다. “소민(小民. 즉 서민계층)을 보호하는 게 곧 군주의 임무라는 가르침, 사대부의 붕당 정치를 인정하지 않은 신념 등을 주춧돌로 했던 굳건한 시스템이었죠. 그 대전제는 군주의 절대적 요건이었던 수기(修己)였어요.” 조선 500년을 가능케 한 리더십은 그 같은 연단 과정을 거쳐 배태된 바였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의 왕이란 절대 권력자 이전에 군사(君師), 즉 공맹의 가르침을 최고로 삼는 사회에서 의당 지(知)의 보루로서 행동해야 했던 것이다.

“자, 탄핵이 이뤄지기까지 과정을 살펴 봅시다. 감성 우위의 표본이라고나할까요?” 192명의 국회의원이 탄핵을 결의하는 과정이나, 그 전날 대통령이 기자 회견서 ‘내가 사과할 사안은 아니다’며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바람에 촉발된 감정적 대립이 바로 그 표본이라는 것. “ 촛불 시위나 월드컵 응원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뭐 있어요?”

그는 “현재의 상황이 크게 보아 그 때와 다르지 않다”며 주의를 요청했다. 정치 질서를 새롭게 구축해 나가는 변환기인 바, 여론이 절대 우위를 차지한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통ㆍ비정통 양반 계층의 역할을 지금은 여론이 대체했다는 것. “패러다임이 변화했죠. 여론이 중요한 건 사실이예요. 단 평등을 내세우며 대중에 영합하고 그들을 선동하는 ㅍ퓰리즘은 유의해야 한다는 점이예요. ” 결국 문제는 평등이란 것에 있다. 그렇다면 원로 국사학자에 의해 포착된 평등이란 무엇일까?

- "평준화란 개념엔 엄청난 모순 내재"

이 땅에서 평등이란 테마는 19세기 말엽 세도정치 당시 민란기에 맹아적 형태로 제기됐다, 1920~3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혁명의 논리로 격상된 것. 본디 평등이란 신분제적 차원의 문제로 제기됐다. 복지국가나 사회주의론 등과 밀접한 19세기적 관념이지만, 고도자본주의 사회인 지금은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로 분식되고 말았다. 현재 한국에서 평등이란 키워드에 내재된 혼선 상황은 현재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교육 문제에 오면 극에 달한다.

“평준화란 개념에는 엄청난 모순이 내재돼 있어요. 결국 엘리트주의에 지향점이 가 있는 무한 경쟁과, 평등을 지향하는 평준화라는 제도는 본질적으로 모순된 거죠.” 결국 정치적 득표를 위해 대중에 영합한 결과라는 비판이다. 전교조 등 운동품?그의 논리가 척(隻)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역사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자의적이고 논쟁적인 공간인가

.구한말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기존의 시각과 어긋난다. 여전히 일부에서 답습되고 있는 등식, ‘조선 = 은둔국’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도 그는 학문적 잣대로 그 허구성을 폭로한다. 1882년 윌리엄 그리피스라는 선교사가 써 9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모은 책, ‘한국, 그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가 생산해 낸 뒤 강고하게 이어져 온 통념도 그의 사정권을 벗어날 수 없다. “고종은 보부상단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왕실에 납부하게 함으로써, 결국 상업 자본을 축적한 거죠.” 황국협회, 대한제국 천일은행 등 자생적으로 원시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던 움직임을 도외시하는 오류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의 저서만 해도 ‘ 한국 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 고종 시대의 재조명’(이상 태학사刊)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그의 학문적 출발점이 바로 규장각이다. 고종 시대에 통용되던 관공서 문서 일체, 구체적으로는 법령ㆍ칙령ㆍ조칙 등을 영인해 나가는 조밀하고도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도록 한 공간이었다.

예를 들어 순종이 공문서의 말미에 첨가한 서명 ‘ 척(拓)’은 병합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폭로하는 물증이었다. 규장각에서 먼지만 쌓여 가고 있던 문서 더미를 파헤쳐 본 결과, 무려 그 서명이 무려 수십종에 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통감부가 왕의 결제 사인마저 위조해 마음대로 써먹었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귀결돼 나왔다. “한국 병합 조약까지 의심이 가더군요.”

그의 역저 ‘한국 병합…’은 바로 그 점을, 실증적으로 밝혀 낸 책이다. 역시 규장각을 뒤져 한일의정서 등 관련 문서들을 정밀 실사한 결과였다. 병합이란 문서상으로도 불확실하다는 파격적 주장이 일본의 ‘ 세카이(世界)’지에 그대로 번역됐고, 2001년 국내 출판된 것이다. 그의 규장각 탐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요즘도 서고를 돌아 다니며 계속 확인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 그의 규장각 탐사는 현재진행형

1991년 프랑스를 상대로 펼쳐졌던 외규장각 문서 관련 사건은 현재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떼제베(TGV) 기술 이전이라는 현안에 파묻혀 냉정한 현실 정치를 계산에 넣지 못 한 결과였죠. 상하로 나뉘어져 있던 자료 중 ‘ 한 질을 들고 와 보라’고 지시한 YS가 결과적으로 큰 실수를 한 셈이죠.” 사건은 예기치 못 한 일파만파를 낳았다. 못 내놓겠다며 울고 불고 하는 해프닝을 연출한 당시 담당 여직원을 두고 국내 언론들은 자기 직분에 충실한 외국인의 직업 윤리 운운하며 사건의 핵심을 오도하기까지 했다.

약탈문화재 반환에 관한 국제 자문회의를 한국 유네스코가 개최한 것이 2년전이고, 정부가 외규장각 도서 반환 관련 대책 회의를 소집한 것이 1달전이다. “시간이 걸릴 문제예요. 프랑스측의 입장을 고려해 소리 없이 해야죠. 문화적 선전도 필요하고요.” 양국간에 관련 학술 회의도 없는 상태다. 요즘 눈만 뜨면 이야기되는 영화쪽은 왜 이 문제를 몰라라 하는 지도 아쉽다. 또, 그 문제라면 일가견을 이룬 자신에게 정부측에서 상의 한 번 없었다는 사실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다.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한국어로 강의한 첫 한국 교수다. 서울대 인류학과 김광억 교수가 하버드대 강의를 자신보다 한 해 앞서 했지만. 영어였다. “영어가 시원찮다고 했더니 한국어로 하라고 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학과 교수로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작년 9월에서 올해 1월말까지 강의했죠.” 한국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통사’와 ‘조선시대사 연구’ 등 두 과목을 10여명의 수강생에게 강의했는데, 특이하게도 세계적 바이올린 주자 장한나가 두 과목 모두 수강했던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소수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이해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눈으로 보였어요. 9ㆍ11 이 안겨 준 충격의 여파로 이해돼요.”

사실 이날의 대담은 연구실로 걸려 온 기자 등의 전화 때문에 불연속적으로 진행돼야 했다. 5월 28~29일 서울대 문화관 중강당에서 열릴 ‘전국 역사학 대회’에 관한 질문에 그는 역사학회의 수장으로서 언론에 성실한 답변을 들려 주고, 주위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시도 내렸다. 올해로 47회째를 맞는 이번 주제는 ‘세계화 시대의 역사 분쟁’.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교과서 왜곡 등 자칫 감정적 대립으로 치닫는 문제들을 엄정한 잣대로 풀어 보는 자리다.

“하버드대에서는 무엇보다 그 방대한 자료가 눈에 선합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대의 장서량말이죠.” 도서관의 완벽한 검색시스템(홀리스), 만일에 대비해 복벌로 갖춰진 자료 덕분에 자꾸만 찾고 싶은 곳이었다. “학생들이 안정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취직 걱정 없이.” 기회의 다양성이 참으로 와 닿았다는 말이다. 졸업 이후를 더욱 걱정해야 하는 제자들이 늘 눈에 밟히는 스승이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5-26 20:22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