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삼백의 현실, 그 서글픔을 아십니까비현실적인 임금구조와 열악한 환경영화 열정 하나로 버텨내는 쟁이들

[한국 초대석] 조감독 박준현
연봉 삼백의 현실, 그 서글픔을 아십니까
비현실적인 임금구조와 열악한 환경
영화 열정 하나로 버텨내는 쟁이들


지금 한국 영화는 고공 행진중이다. 아무도 그 앞에 나서 딴죽 걸 수 없다. 만의 하나, 그랬다가는 미친 놈 소리 듣기 딱 좋다.

‘ 실미도’가 관객 100만 시대를 열더니, ‘태극기 휘날리며’는 칸의 무서운 아이가 돼 그야말로 세계를 상대로 태극기 휘날렸다. 근착 타임지는 아시아 영화의 돌풍에 대해 전하면서, 특히 최신작인 ‘내 여자 친구를 소개 합니다’를 따로 떼어 내, 주연 전지현을 현재 한국 영화의 얼굴로서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한국 영화판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신음처럼 스며 나온다. 고백의 말미는 다음 한 줄로 매듭지워 진다. ‘연봉 삼백에 뜬 구름 위를 나는 수 많은 스탭들을 위해 조용히 건배를 청한다.’ 곪고 곪은 상처는 불거지고야 만다.

대중 문화, 특히 영화란 게 본디 스타 시스템에 철저히 의지하는 것이긴 하다. 스타 모셔오기는 제작자의 능력으로, 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캐는 것은 연예 기자의 취재력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한 두 스타 밑에 있는 무수한 그들, 본 영화가 다 상영되고 난 뒤 우수마발로 쏟아져 나오는 이름의 대열에 끼이는 것 말고는 단 한 번도 주목 받지 못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카메라 조명 미술 소품 의상 분장 제작 연출 등과 관련돼 촬영 현장을 소리 없이 뛰어 다니거나, 편집 음악 CG 사운드 현상 등 후반 작업을 위해 자리를 지키는 그들은?


- 막 뒤의 배고픔, 누가 알아줄까

조용히 건배를 청하는 그의 술잔에 든 술이 아마도 독하고 쓰디 쓴 쓸개주일 것이리라. 연봉이 삼백만원….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비현실적, 아니 초현실적 숫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은 감상적인 평준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웃자람 아래에 가려진,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다.

“ 2월 초에 ‘ 아웃사이더’ 편집자가 전화를 걸어 원고 청탁을 하더군요. A4 용지로 다섯장에, 고료도 준다면서.”이것저것 생각해 볼 것도 없이 OK 하고는, 반나절 안에 다 썼다. 현찰까지 생긴다 잖는가. 더도 덜도 말고 자신의 이야기면 딱 되겠다 싶은 확신이 들었다. 그야말로 일필휘지한 뒤 친한 친구에게 보여주니 그 친구 왈, “니가 술 마시면 늘 하던 이야기 아냐?”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는 묘한 제목을 달아 놓은 그는 바로 연봉 삼백이 현재 자신의 가치라며 착잡하게 허두를 뗐다. 정부가 책정하는 최저 임금에도 미치지 못 하는 비현실적 임금 구조를 감내하고 오직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현실을 버텨내고 있는 ‘ 그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박준현(33). 영화판밖에서는 ‘영화인’이라는 그럴싸한 명칭으로, 영화판에서는 ‘조감독’이라는 모호한 호칭으로 불리는 그는 할 말이 무척 많았다.

연봉 삼백이란 것은 영화일을 한 지 4년째로 접어 든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의 총합이 1,200만원이니, 1년동안 번 돈으로 환산하면 그렇다는 말. 그가 조감독으로 참여해 개봉된 작품은 ‘ 스물넷’(임종재 감독)과 ‘ 서클’( 박승배 감독) 등 두 편이다. 실제 제작에 들어 가지 못 한, 영화판 변말로는 “ 엎어진” 작품들은 일단 논외로 한다면.

애초 그는 박철수 감독의 ‘ 301/302’를 보고 매료돼 박철수 필름 아카데미로 들어감으로써 영화 동네로 발을 들였다. 거기서 연출ㆍ촬영ㆍ편집 등 영화의 실재에 대한 전반적 지식을 1년 동안 수료했다. 가장 먼저 참여했던 것은 ‘봉자’(서갑숙 주연). 소품을 정리ㆍ관리하면서 시나리오 작업 관련 토론도 함께 했다.


- 스물 넷 조감독의 쓰라린 기억들

막내 일을 하던 그가 영화에 대한 실력을 처음으?발휘할 기회가 온 것은 박 감독의 눈에 들어 조감독 일이 맡겨지면서였다. 시체 처리반 이야기를 다룬 ‘ ID1092’라는 작품이었다. 석달 동안 신이 나 준비 작업에 매달리고 보니, 돌아온 것은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통고뿐이었다. 모두 허탕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스물넷’조감독에 곧 발탁돼 이것저것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 명계남ㆍ방은진 등 중견급이 조연을, 김현성ㆍ변은정ㆍ김민성 등 신인들이 주연을 맡은 청춘멜로물이었죠.”

그 조감독 1호작은 전국을 통틀어 10개 극장에서만 개봉되더니, 닷새만에 막 내려야 했던 불운의 영화였다. “ 흥분도 기대도 많았던 제 입뽕(데뷔)작이었지만, 동시에 그때까지의 사고를 전환하게 한 계기이기도 했어요. 뭣보다, 배급망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절감한 거죠.” 그는 우리 영화의 현실속으로 성큼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이른바 예술 영화 하겠다는 생각이 허물어졌어요. 결국 자위 행위에 불과하다는….”(원래의 표현은 보다 직설적이었다)

볕도 쬐어 보지 못 한 작품에 대한 사연이 더 많다. ‘개밥그릇’은 6개월을 허송케 했던 작품. 인기가 한창 오르고 있던 어떤 배우 캐스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 가고 말았다. “ 저는 그래도 좋은 편이었죠. 감독은 그 작품이 입뽕이라 1년을 고스란히 날렸으니. 부인과 엄청 싸웠다데요. 지금도 그 때 충격에서 허우적댄다 더군요.”

다음 실패의 기억은 ‘ 떨림’. 주인공의 내면적 의식에 집중한, 굳이 나누자면 이른바 예술 영화였다. 1달여 동안 감독의 집에서 기획ㆍ각색ㆍ시나리오팀등과 합숙하며 실제 제작을 가늠해 봤지만, 주연 캐스팅은 커녕 현실적으로 영화화해 낼 수 없다는 결론에 봉착했다. “문제는 어떻게 투자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어요. 의식의 흐름에 집중한 예술 영화에 누가 돈을 대겠느냐는 거였죠.”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 영화판에서 실패의 기억은 성공의 밑거름이 되지 못 했다. “나는 올인했으나, 실제 영화화되지 못 한 일이 계속돼 갔어요. 아, ‘안나푸르나’도 있군요.” 네팔의 산에 오르려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를 위해 주요 관련자들은 이미례 감독의 집에 모여 함께 시나리오 작업 등을 하고 있었다. 네팔까지 가서 헌팅(촬영지 물색)과 배우 섭외까지 마쳤는데, 당시 제작을 약속했던 회사가 상업성이 없다며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구두상으로만 진행됐던 터라, 깨져도 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청소년들의 인터넷 포르노 문제를 소재로 사회 병리를 고발한 ‘ 선데이 서울’이란 영화 역시 비슷한 이유로 빛을 보지 못 했다. “참 힘들었어요. 다만 영화에 대한 애정만으로 버틴 세월이었다고나 할까요….” 바로 연봉 삼백의 세월이다.


- 결혼 말리는 결혼한 선배들

“이제 장가 가라는 어른들의 성화에는 아예 냉정하게 결혼은 싫다고 해 버리죠. 사실 나이가 드니 함부로 사람 만나기가 꺼려져요.” 본인의 생각뿐일까. “결혼한 선배 감독들 대부분이 결혼을 말리는데,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죠. 한 작품 준비하는 데 1년은 보통인데, 흥행이 부진하면 적어도 2년 동안은 부인의 눈치밥을 먹어야 하니까요.”

역마살이라도 끼었나. 전남 나주산인 그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광주(光州)로 올라 와 자취를 시작했다. 영화 좋아 하는 것은 모친으로부터 물려 받았다. “어머니는 광주 올 때면 다섯 살 바기였던 저의 손을 붙잡고 무등극장 같은 데 가셨죠. 공포 영화광이셨거든요.” 중학교에 가 보니 학교 바로 옆이 극장이었다. “주말이면 거기서 살았죠. ‘ET’, ‘보디 히트’, ‘미스터 굿 바를 찾아서’ 같은 성인 영화를 보며 촌놈의 외로움을 달랬죠.” 헐리우드 키드가 따로 없다. 반에서 10등안은 늘 유지했다.

진흥고 시절, 그는 고만고만 공부 잘 하는 축이었다. ‘영웅본색’이나 ‘천녀유혼’ 등 한창 유행하던 홍콩 느와르에 주말을 몽땅 투여하는 게 좀 달랐다. 1991년 고려대 독문학과에 입학한 뒤로는 본색을 들어냈다. 그 무렵 막 생기기 시작한 비디오방에 살다시피 하며 ‘천장지구’, ‘죽은 시인의 사회’ 등등을 뗐다. 1학년부터 사귀어 오던 여자 친구는 그런 그를 보더니 4학년 들어 헤어졌고, 그는 그 참에 입대해서 DMZ 수색대에서 근무했다. “밤에 위장 크림을 칠하고 부하들과 함께 경계 임무를 서는데, 소대장인 저만 덜덜 떨었죠. 고생 무지무지 했죠.”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계기이기도 했다. 북으로부터 흐르는 맑은 강물(역곡천), 꿈 같은 풍광속에서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게 한 시간들이 속속 떠올랐다. 제대 말년, 그?무엇을 하면 즐겁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다. 입에 풀칠하기 좋겠다 싶어 택한 일이 방송국 PD. 그러다 MBC 아카데미 12기생으로 등록했으나, 원래의 꿈에 보다 충실하려는 생각으로 영화진흥 아카데미에서 승부를 걸려 했다. 그 무렵 박철수 아카데미와 연이 닿은 것.

‘아홉살 인생’의 윤인호 감독에게 물어 보앗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감독이 되셨냐”고. 윤 감독의 말, “이 세상 살며 나한테 올수 있는 모든 운이 다 오면, 그 때 되는 게 감독”이라 했다고. “그만큼 힘들다는 거겠죠. 감독이 되려면 ‘ 절대 시간’이란 게 필요한 거 같아요.” 그는 오락 영화, 예술 영화가 따로 있다는 식으로 구분 짓기는 하지 말아주길 바랬다.


- 관객이 힘이고 돈인 시대

“ 앞으로 조감독 일을 한 두어편 더 하고 싶죠. 영화, 영화판, 사람을 더 알고 싶어요. 지금 저는 인맥을 넓혀가는 과정이예요.”어디든 연락이 오면 달려 간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한 평가란 게 몇 편의 대표작에 한정된 것일 지라도, 전체적으로 상승 하는 데 기여한다”고 했다. 한국 영화 붐 속에 영화판의 하부 구조를 살리자는 움직임은 없지만,한국 영화의 붐이 “내 일처럼 기쁘다”고 그는 말했다.

“ ‘ 사마리아’는 예술, ‘ 조폭 마누라’는 오락…. 이런 식으로 단정짓지 말았으면 해요. 이제 한국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를 지향하는 시점이라 봐요. 결국 관객이 힘이고 돈이죠.” 영화판의 진실이란 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아리송한 답이다. 참고로, ‘ 아웃사이더’에서 받은 원고료 19만7,000원은 술 마시는 일에 썼다고. 영화 생각만 하면 기분 좋아 한 잔,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암담해서 또 한 잔….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6-08 15:59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