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넘긴 완벽한 청춘…최고의 이야기꾼배짱으로 사는, 친절과 열정의 덩치 좋은 노신사자부심과 책임감의 소년, 이제 사회봉사의 삶으로

[성공의 조건] 이시형 박사
칠순 넘긴 완벽한 청춘…최고의 이야기꾼
배짱으로 사는, 친절과 열정의 덩치 좋은 노신사
자부심과 책임감의 소년, 이제 사회봉사의 삶으로


이시형 박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인기강사이다. 1982년 배짱으로 삽시다 라는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는 늘 우리 주위에 있었다. 20년 이상 그렇게 인기를 누리는 강사가 몇 사람이나 있을까? 그의 강의를 여러 번 들으면서 나는 그의 열성팬이 되었다. 나 또한 강의와 컨설팅을 업으로 하는 사람인지라 더욱 그랬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일상적인 일을 소재로 하는 강의는 정말 매력적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상에서 똑같이 보는 사물과 사건을 갖고 어쩌면 저렇게 재미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정신과 의사라고 하지만 저런 관찰력과 통찰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신출귀몰하다. 본업인 정신과 의사 외에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다. 왕따 청소년을 위한 활동, 가출청소년을 위한 캠프, 터키 관련 일도 한다.

동남의원에서 만나 뵌 이시형 선생님은 텔레비전에서 봤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다만 덩치가 좋고 에너지가 넘치고 무척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분 역시 7순이 넘은 나이지만 완벽한 청춘이었다. 2시간이 넘는 인터뷰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얘기했는데 내 뒤에도 약속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선생님 성장 배경을 얘기해 주세요.

지금은 대구비행장이 된 동촌이 제 고향입니다. 경주 이씨들이 사는 집성촌이지요. 할아버지(李善雨)는 퇴계서원 등에서 공부를 한 전형적인 유학자입니다. 단발령 때도 상투를 안 자를 정도로 고지식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李相淵) 역시 영천 낭산문중에서 공부를 하고 양현고(養賢庫)를 합격한 한학자입니다. 성균관에서 본격적으로 유학 공부를 한 후 지방의 서당과 향교를 관리하는 업무를 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문화재관리를 하는 지방공무원 비슷한 일을 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6살의 나이에 작은 집에 양자로 들어갑니다. 작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졸지에 혼자 남은 숙모를 위해 취해진 조치였습니다. 3년 후 석방이 되는 바람에 다시 컴백할 수는 있었지만 어린 제게 3년간의 양자생활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본가에서는 정을 못 붙이게 한다고 쌀쌀맞게 대하고, 숙모는 엄하게 저를 야단치고… 어린 나이에 참 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제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정신과 의사가 된 것은 아닙니다.

또 아버지란 존재는 제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아버님과 같이 식사한 적도, 얘기를 나눠본 적도, 불러본 적도 없습니다. 또 칭찬을 받아본 적도, 꾸중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늘 3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늘 “언젠가 걸리면 한 번 크게 혼난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그런 기회는 없었습니다.

근친간의 결혼을 방지하는 이유는 인위적으로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서이다. 갈등이 있어야 인간은 비로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양자의 경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대가족 안에서의 생활은 갈등을 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이 때문에 그는 많은 생각을 했고 그것이 지금의 이시형을 만들지 않았을까?


-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공무원 월급으로 13명의 식구가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집안이 어려웠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자부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고 1때부터 늘 천재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지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요. 장남인 형이 군대를 가자 차남인 제게 집안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교 시절은 거의 알바를 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교 동창 중에는 저를 모르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주로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 비행장 가이드를 했습니다. 당시 저는 공부보다는 운동하고 싸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100미터를 13초에 뛰었는데 당시 대구의 기록이었지요.

에너지는 성공의 필수조건이다. 나른한 사람과 성공은 어째 연관 짓기가 어렵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운동을 통해 열을 식히고, 또 에너지를 얻는다.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업을 하는 그의 아들 이재학씨 역시 운동에 능하다. 프로급 수준의 스키어인데 관련 책을 낼 정도이다. “숏턴과 액스퍼트 카빙으로 정복한다” (김영사)


- 그러면 언제 공부를 했나요?

저는 노트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노트 필기를 안 하는거지요. 대신 메모는 열심히 합니다. 보통 책에 합니다. 그래서 책을 빌리지 않습니다. 너무 더러워지거든요.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자와 대화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문이 적절치 않으면 더 적절한 예문을 옆에 써 놓습니다. 좀 반항적인 학생이지요. 보통 학생들은 순순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소화하여 자기의 것으로 했다고 하면 저는 왜 저럴까, 저것이 적절한 사례일까를 생각하면서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과 돈이 부족해서 만들어진 습관이긴 해도 제 방법 덕을 많이 봤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한다기 보다 효과적으로 집중적으로 하는 스타일이다. 이미지적 기억을 하고 있다. 물론 머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의 어머니는 101세인데 아직도 스냅사진 같은 정확한 기억력을 갖고 있다.


- 그런 환경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친 환경과 스트레스가 저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역경지수(역경을 이겨내는 힘)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 번도 널널한 환경에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풍요로웠던 적도 없었구요. 저는 지금도 시간이 쫓길 때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시간이 널널하면 아무 것도 안 할 것 같습니다.


- 성공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몸에 배였었지요. 덕분에 사람도 많이 만나고, 책도 많이 읽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 가장 큰 장점은 언어적인 능력인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얘기하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대통령입니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그것을 글로 쓰면서 더욱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또 저는 세미나나 워크숍에서 마무리 정리(Wrap-up)를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보고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하더군요.


- 콤플렉스는 없습니까?

아닙니다. 어려서 용모에 대한 열등감이 컸습니다. 얼굴이 검다고 깜둥이란 별명이 있었지요. 밀가루를 바르고 학교를 간 적도 있습니다. 쌍꺼풀과 곱슬머리가 심해 외국인 같다고 아이노꼬, 양코, 코주부 등이 제가 제일 싫어했던 별명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얼굴이 잘 나간다니 참 격세지감입니다.

그는 탁월한 스토리텔러이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얘기를 들려줌으로서 사람들에게 재미와 깨달음을 주고 자신 또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야기꾼만은 아니다. 그는 몇 년간 고려병원 원장을 하면서 좋은 성과를 낸 전문경영인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로 검진센터를 만들기도 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사회봉사 활동에 많은 힘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한국인은 너무 사색하지 않는다고 늘 주장하는 그는 이를 위해 홍천에 건강과 명상을 동시에 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시설을 준비 중에 있다.

가장 보수적인 동네에서 성장을 했지만 가장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 가장 많은 강의를 하지만 가장 많은 사색을 하는 사람, 가장 심각한 주제를 가장 재미있게 분석하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시형이다. 그를 만나고 오면서 “성공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력시간 : 2004-06-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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