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 뒷골목서 꽃피는 순수의 꿈을 보십시오"퍼포먼스 축제 '2004 충돌과 실험' 집행위원장

[한국 초대석] 행위예술가 이수
"마로니에 뒷골목서 꽃피는 순수의 꿈을 보십시오"
퍼포먼스 축제 '2004 충돌과 실험' 집행위원장


이수(57). 본명 이학수(李學洙). 그러나 오십줄 문턱에서, 그는 배울 학(學)자를 이름에서 떼 냈다. 1993년 운현궁의 뜰에서 ‘ 혼불’이라는 제하로 전시회를 할 때였다.

“ 그러잖아도 주변에서 이름 바꾸라는 권유를 들어 오던 차였었죠. 그 행사를 계기로 어릴 적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을 공식적으로 쓴 게 시작이었어요.” 막상 그렇게 해 보니 쉽게 기억될 뿐더러, 특히 외국 사람에게는 쉽게 불리니 일거양득이었다는 것. 오순에 이름을 바꾸는, 이수(Lee Soo)는 그런 사람이다.

이제는 나이살이 제법 붙은 데다, 배 한가운데에는 삶의 대가로 생긴 수술 자국이 세로로 선명하다. 그러나 일단 무대에 선 그의 눈에는 불이 난다. 퍼포먼서로서의 결행은 날렵하고 당당하다. 그의 삶에 배움(學)이란 ‘ 먹물’의 더께가 끼어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찌 이름뿐이랴. 비록 맨 처음에는 캔버스로부터 예술의 길에 진입했지만, 사각형의 평면은 그를 담아 두기에 너무 좁았다. 그는 2차원의 삶과 결별했다. 당시 궁궐 안에서 펼쳤던 행사가 평면 작업과 설치 미술이 혼합된, 새로운 차원의 ‘ 전시 행위’였고, 거듭남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대학로를 접수하러 왔다. 7월 19일 박승대홀에서 막을 올리는 ‘모루 아트 퍼포먼스 –충돌과 실험’의 집행위원장으로 서울 복판에 나타났다. 복제와 사이버가 인간의 감성과 상상력을 몰수해 버린 이 시대, 가장 직접적이고 원시적인 연희 양식을 전면에 내걸고 올 연말까지 대학로에서 이어 질 향연의 주재자로서.


- 무대 휘감는 영기, 번득이는 원시적 본능

생의 테마처럼 돼 버린 시리즈 ‘명상무곡’으로 대장정의 막을 올릴 자리다. 1991년 시작한 이래, 이번 무대가 아홉번째가 되는 작품이다. 사람의 두상, 상자 등 몇 개의 오브제를 들고 즉흥적으로 펼치는 육체 언어가 해프닝이 될 지, 무용이 될 지, 심지어는 옷을 벗고 할 지, 실제 무대 상황은 아무 것도 예정된 바 없다. 쉬는 틈틈이 여성 연희자 박미나(25ㆍ사물놀이패 ‘설악’ 단원)가 대금으로 능숙히 연주하는 산조 가락이 이번 무대의 색채를 언뜻 예감케 할 뿐. 신비스런 티벳 음악과 풍경 소리가 무대를 이상한 영기로 감쌌다.

이수는 원시적 본능과 직관으로 잿빛 도시의 감성을 전복해 온 사람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그의 캔버스는 늘 짙푸른 크레파스색(정확한 명칭으로는 ‘프러시안 블루’색)으로 넘실댔고 가끔씩 원색의 궤적이 섬광처럼 명멸한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 들면서 그는 전환을 모색한다.

“팔기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해 오던 작업에 심각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부터 전시장에서 해프닝을 본격 개입시키게 됐죠.”1991년을 기점으로 해 계속되고 있는 프러시안 블루 작업이다. 현재 갖가지 모양으로 변주를 거듭해 오며 수백여점을 헤아리는 일련의 작품을 도 그는 “명상의 결과”라 한다. 자기를 초월한 영적 세계에 닿아 있다는 것.

거의 매년에 한 번꼴로 펼쳐진 그의 ‘명상무곡(冥想舞曲)’ 시리즈는 지금까지 제주(‘이중섭 추모 거리 예술제’), 종로(‘3ㆍ1절 거리 예술제’), 보광정사(‘백팔배 축제’) 등 전국을 무대로 펼쳐져 왔다. 미선 – 효순양 사건 당시 종로에서 전위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반미 해프닝’ 역시 그에게는 또 다른 아틀리에일 다름이었다. “나는 줄곧 현장 예술을 추구해 왔어요. 집단즉흥성을 요체로 하는.”그것은 파괴적인 몸짓만이 그득하기 일쑤였던 기존의 해프닝이 ‘명상무곡’이라는 계기점을 만나, 하나의 퍼포먼스로 변환해 가고 있다는 새 징표이기도 했다.


- 조각가 부인 "남편의 무대가 도화지"

부창(夫唱)에 부수(婦隨)라 했던가. 지프차를 능숙히 몰며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부인 황찬록(43ㆍ조각가)씨를 보면 그 말이 절로 생각난다. 7월 14일 리허설장에서 조명 장치 등 주변 장치를 조작하며 무대를 만들어 가던 부인은 아예 스탭이었다. “남편의 무대를 도화지 삼아 10년 세월을 따라 다녔죠. 그이의 무대는 한편의 서정시예요. ”

특히 1996년 이래 연작 형식으로 발표해 오고 있는 ‘우화적 풍경’은 천진난만한 아기의 미소를 브론즈로 표현한 작품. 그의 말을 빌면 “심연에 》졔?듯 작업했다”고. 작품속 아이의 미소는 두 사람 사이의 딸 루리(7)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황씨는 199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상표를 등록시키고, 인테리어 소품ㆍ시계ㆍ조각ㆍ판화ㆍ도자기 등 자신의 생활 미술품을 부지런히 만들어 내고 있다.

철들기 전부터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루리는 퍼포먼스 애호가라고. “무세중씨의 공연을 보고 너무 재미 있게 봤다며 인사까지 하더라고요. 늦게 본 딸 자랑만은 아닌 듯. 그리고 이야기의 시공은 자연히 1995년 10월 어느날의 경기 파주군 광탄면 발랑리로 옮겨졌다.

“실은 제 작업실을 구하다 수소문해 찾아 간 곳이었죠.아카시아 나무가 빽빽히 우거진 곳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저 이를 만났어요.”보통은 잘 쓰이지 않는 프러시안 블루색으로 꽉 차 있던 기존작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 때를 돌이켰다. “작품이 너무나 강렬했어요. 내 인생 모두를 걸어도 좋을 것 같은 확신이 느껴졌고….”그것은 모성애였다고 한다. “늦게 만난 우리는 참 애틋했어요. 좋아 하는 일을 찾아 다니는 자체가 즐거움이었죠.”

두 사람을 맺어 준 것은 소리꾼 장사익씨. 1990년 들어 그를 비롯, 서유석 김대환 이광수 김광석 등 독보적으로 작업하고 있던 꾼들이 모여 만든 ‘예 모임’을 통해 각별해진 장씨가 결국 노총각 팔자를 고쳐 준 셈이다. 아웃사이더적 풍경은 그의 삶에서 낯선 바 아니다.

경북의 오지 점촌에서도 구석진 산촌 동네가 그의 고향이다. 그러나 그는 별 기억이 없다. “아버님이 공비 잡으러 다니는 경찰이었던 덕에 국민학교만 11곳을 다녔어요. 자연히 ‘왕따’였죠.” 그런데 그림 하나만은 압도적이었다. “나중 알고 보니 딱 고흐 스타일이더군요.” 중학부터는 객지의 삶이었다. 대구 경북예고에 다니던 그는 교사가 돈 많이 번다는 소리에 혹해 영남대 사범대를 1년 다니다 결국 제 길을 찾았다. 다시 예비고사를 쳐서 서울대 미대(68학번)로 적을 옮긴 그는 “쉬다 말다 하며” 6년만에 대학을 졸업했다(졸업 논문 제목이 ‘프러시안 블루에 관한 소고’였다). 사실주의적 화풍도, 엄격한 계보도 싫었던 그에게 대학 시절은 결국 모색을 위한 예술적 혼란기와 맞먹었다.


- 프러시안 블루로 신세기 열다

연탄난로 회사의 디자인 파트에서 2년을 보낸 그는 무허가 미술학원을 차려 궁핍의 시간을 감내했다. 국전의 단골 입선 작가로, 추상도, 구상도 아닌,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던 그에게 신세계의 문을 따주었던 것이 바로 프러시안 블루라는 색이었다. 딴 색과 잘 섞이지 않아 작가는 물론, 교사부터가 쓰지 못 하게 하는 색이었다. 그러나 그 색에 숨어 있는 초월의 세계를 감지한 그는 주변의 철저한 무관심에, 지독한 집착으로 답했다. 면의 길이가 10m를 넘는,1,500호 작품에도 도전했다. 저항했던 것은 평단의 나눠먹기 관행이었고, 도달한 것은 새로운 질서의 세계였다. 바로 이벤트와 설치가 합쳐진 탈(脫) 캔버스의 세계, ‘명상무곡’이다.

그의 예술관은 예를 들어, 오는 9월이면 제 5회를 맞는 ‘발랑예술제’로 양식화돼 온 바다. 풍광 좋은 그의 집 마당, 400평 잔디밭에 무대를 마련해 펼쳐지는 축제다. 매년 자비 1,500여만원을 들여 펼쳐 온 이 행사는 탈서울, 탈중심의 예술이 빚어낸 찬란한 반격이다. 1회에 300여명의 관객들이 생생한 예술을 목도하고, 출연자들의 신명에 이승을 잠시 잊는다. 작년에는 신명 오른 장사익씨가 앵콜에서 무려 15곡을 불러 제껴, 문자그대로 관객들을 뒤집어 놓았다.

부부는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아니, 올릴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을 너무도 잘 아는 장사익씨는 “지금이라도 결혼식을 올리라”며 보채지만, 일손을 잠시도 놓지 않는 부인 때문에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안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7월 19일 대학로 박승대홀에서 막을 올린 행사는 연말까지 출연진을 바꿔 가며 계속 펼쳐진다. 또 9월 22일부터는 국립극장 야외 무대에서 펼쳐질 강만홍의 무대 ‘두타’에 특별 출연할 예정이다.

그의 생애에는 5년의 공백기가 있다. 바로 부인 황씨를 만나기 직전의 시간이? “그림 안 그리겠다고 다짐 한 지 5년이 된 시점에 애기 엄마가 제 삶에 나타났던 거죠. 굶어 죽다 살아난 순간이기도 했지요.” 미학적ㆍ사회적 의미를 띠고 자신을 강박해 들어 오던 캔버스 작업에서 손을 뗀 그는 어떻게 그 시간을 버텼을까? “노가다가 주(主)였고, 퍼포먼스가 부(副)였어요.”

세월의 침식을 견뎌낸 그는 이렇게 부인의 지프차를 타고 서울 복판에 나타난 것이다. 이외수, 황병기, 홍신자 등 그와 교분이 닿은 스타들과 함께. ‘즐거운 사라’로 빚어진 일련의 소란끝에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해 온 마광수 교수도 이 무대에 참가키로 언질을 던져, 귀추에 더욱 還??모아진다.

“대학로 뒷골목에서 순수의 꿈을 피우고 싶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가 화룡점정했다. 행사 기간 중인 11월 17일에는 인사동 가나아트 센터에서 평면 작업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그 꿈의 연장일 터이다. ‘현장성’이라는 횃불 아래서, 거대 도시의 여름이 익어 간다. 연꽃은 그렇게 피어 오르는 것.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7-21 11:43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