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식민지로 전락하렵니까"한국사회 영어 몸살에 깊은 우려, 필요에 의해 비우는 언어 돼야

[한국 초대석] 한글지킴이 최경봉 교수
"영어 식민지로 전락하렵니까"
한국사회 영어 몸살에 깊은 우려, 필요에 의해 비우는 언어 돼야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 세영(9)이 투정 부리듯 하던 말이 안 그래도 꺼림칙했던 터였다. “반장 선거에서 한국말 서툰 역(逆) 이민 2세가 출마하더니 이겼다는 말이었죠. 사회에서 행세하려면 결국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한국의 현실에,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한글 지킴이 최경봉(40ㆍ원광대 한국어문학부) 교수가 필리핀 외유에 올랐던 것은 더위가 정수리까지 차 오르던 2003년 8월 중순이었다. 팔자 좋은 동남아 유람과는 한참 거리 먼 일이었다. 갈수록 기세를 더해가던 영어 공용화론에 맞서 2002년 동료 학자들과 함께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이라는 일종의 가상 소설을 집필했던 그가 내친 김에 정부에서 내놓은 ‘2003년 국어 정책 연구비 지원’ 사업에 응한 것이다. 그의 여행 가방 속에는 아들의 철없는 말도 챙겨져 있었을 터이다.


- 영어공용제는 경제력 지상주의의 산물

가기 전, 6개월동안 펼쳤던 사전 작업에 그 일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서울의 필리핀 문화원, 필리핀 교포, 인터넷 등을 통해 필리핀 인의 언어 생활 현장을 간접 취재하는 데 반년이 걸리더군요. 동서양의 문화가 이슬람 문화와 혼합된 문화 양상은 현재 한국의 복잡한 언어 생활 양상을 비춰 낼 거울이라는 믿음에서였죠.” 영어 공용화의 길을 선택한 47개국 중 필리핀이 걷고 있는 길은 우리의 반면교사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경제력만의 문제였을까?

마닐라의 호텔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그 도시에 산재한 학교를 둘러보고 교사 등과 면담하는 일이 체류 기간 1주일의 대부분이었다. 마닐라대 필리핀어학과에 들러 필리핀어의 위상에 대해 취재해본 결과는 자국어의 위상을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었다. “필리핀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필리핀 내에서는 특이한 족속으로 취급 받는다더군요.” 초등학교부터는 말과 문자가 모두 영어로만 이뤄진다니, 제 자식을 미국 사람 못 만들어 안달 난 요즘 한국 부모들이 차선책으로 아이들에게 필리핀 유학이라도 시켜보려는 게 과연 우격다짐은 아닐 것이다.

필리핀어는 가정에서만 쓰이는 말, 아니면 자국의 역사나 언어를 연구할 때나 쓰이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그는 말한다. “영어 공용화의 현실은 결국 영어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어요.” 그는 거기서, 이 시대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계급 척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영어가 만들어낼 디스토피아를 본 것이다. 필리핀에서 정말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소수 상류층에 국한돼 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국민이 쓰는 ‘영어’란 미국인들은 도통 못 알아 들을 변종 언어다. 당시 그의 경험은 최근 발행된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한국문화사 발행)에 잘 정리돼 있다.

“다(多)언어 국가인 필리핀이나 인도 등의 경우, 영어 공용화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혀 필요 없는 얘기죠.” 국가 경쟁력의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 영어 공용화론은 일제 시대에 한번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진 뒤 최근 불거진 주장이다. 지금은 태교도 영어로 해야 한다는 말까지 들리는 세상이다. 일반인들의 이런 맹신을 추인하기라도 하듯, 지금 한국은 공식적 차원으로 영어 몸살을 앓고 있다. 서울시의 영어 상용화 정책, 소설가 복거일씨 등의 영어 공용화론. 해방 이후 미군정이 편의상 처음으로 제기했던 영어 공용화론이 21세기용으로 ‘버전 업’한 것이다.

공무원과 시민을 대상으로 2006년까지 ‘영어 상용화 사업’을 완료, 국민의 7할이 영어로 의사 소통 가능한 싱가포르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야심(?)으로 거세게 불 붙은 사안이다. 이에 따르면 ‘영어 체험 마을’ ‘사이버 영어 마을’ 등이 오는 10월 건립을 목표로 추진중이다. 현재 서울 시내버스에 시행중인 색깔 표시(G, B, R, Y)와 택시 지붕의 글(‘ Hi, Seoul’) 등은 그 계획의 일부이다. 1998년 복거일씨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라는 저작에서 본격 제기했던 영어 공용화 주장이 현실화된 셈이다.

최 교수는 그 같은 현상의 근저에는 ‘경제력 지상주의’가 굳건히 버티고 獵鳴?갈파했다. “잘 살고 보자는 논리로 모든 것을 귀결시킨 개발독재 논리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어요.” 일제 강점기 당시 일어 상용화와 내선일체를 주장하던 춘원 이광수의 뒤를 충실히 잇고 있다는 지적이다. 평소 “나는 이론을 끝까지 밀고 가는 이론가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라는 논리로 자신의 주장에 보호막을 둘러온 복씨가 우리말에 대해 펼쳐 온 주장은 이렇다.

“IMF, 인터넷 등 초국가적 질서가 구축된 오늘날의 ‘지구 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실질적 국제어인 영어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그 ‘호의’에 대한 실천 방안으로서 그는 민족주의와 민족어는 버릴 것을 제안한다. 지금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 제국’ 시대이고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고 있는 때이므로 우리가 지구 제국의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 구사 능력이 관건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아예 처음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게 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실천론으로 귀결지워지는 논리다. 공평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약소국에게는 결국 이로운 선택이다.”

그 논리는 모국어를 포기한 채, 싱글리시(싱가포르식 영어)나 맹글리시(말레이지아식 영어) 같은 변이과 교잡 언어의 길을 선택하는 현실 세계를 잘 설명해주는 것으로도 받아들여질 법하다. 어차피 IMF 같은 국제기구들이 중앙정부 노릇을 하고 있고, 영어를 기본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의 세계에서 도구로서의 언어를 재빨리 우리것 화(化)할 때라며 국민을 잡죄는 주장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러나 최 교수는 단호하게, 그것이야말로 억약부강의 논리라고 압축한다. “결국 힘 센 자에 붙어야 산다는 얘기 아닙니까?”


- 새로운 계급전쟁, 문화역류의 풍경들

그것이 윤색을 거쳐 학계 일부에서도 주장되고 있는 바라고 최 교수는 말했다. “문화적으로는 의미 있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러나 문화는 바로 지금 살아 숨쉬며, 새 것을 창조해 나간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어요. 우리의 문화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모국어로 문화적 자산을 쌓아가야 합니다.” 옛 문화 자산을 세계 속에 알려야 한다, 한국을 세계에 홍보해야 한다는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까운 예로, 영어로 강의한다는 일부 대학을 한번 보세요.” 전체 강의의 30~50%를 영어로 한다는 몇몇 대학의 양상은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초점이 강의 내용을 심화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강의까지 영어 학습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발상이 문제 아닙니까?” 영어 강의를 위해 교수는 과외의 시간을 그 준비에 들여야 한다. 수업 중 학생들과의 질문ㆍ토론은 격감하거나 아예 사라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계속 고집하는 것은 ‘그래도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죠.”

영어 공용화 문제는 어쩌면 새로운 ‘계급 전쟁’일지도 모른다. “공용화론자들의 논리가 과연 누구의 이득을 대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영어를 일상화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시간을 들여 불편을 강요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위화감이 불거지면서, 결국 계급적 격차만 벌어지게 됩니다. 미국 교재, 할리우드 영화만 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논리 아래 벌어질 문화 역류의 풍경이다.

한국적 상황에는 또 하나의 중차대한 변수가 있다. 바로 분단 상황. “그렇잖아도 남북 격차가 심해 문제가 한 둘이 아닌데, 영어 공용화론자 측의 안중에는 북한이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네들 말대로라면, 통일 자체가 물 건너 갈 수도 있어요.” 이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만 불거져 왔지, 한 번도 구체적 미래상을 짚어보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북한 국어학자들과의 학문 교류는 우리 민족 문화의 미래를 위한 실천 방안이다. 현재 국어연구원과 언어정보학회가 주축이 돼 컴퓨터언어 문제 등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차원에서 국어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라고 전했다. “서로 다른 표준말을 정리하는 문제 등은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한국어 문법을 간략화해 국제화의 길을 앞당기는 데도 기여하리라 봅니다.”


- 한국어, 위기인 동시에 발전의 기회

그는 그러나 간단없이 이뤄지고 있는 여러 ‘한국어 흔들기’ 시도에 대해 우려했다. “영어 강의 등 현재 추세로 가다가는 한국어의 추락이 성큼 진행될 수도 있어요.” 우리말을 쓰는 게 한국인들에게 훨씬 풍부한 표현을 구사하는 길이라는 사실, 우리말이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풍토에 대한 지적이다.

그는 영어 공용화론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국가도 선택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왜 자꾸 불거질까? “현재 한국은 경쟁 지상주의의 사회이기 때문이죠.” 아직 미성숙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영어는 외국어 중 하나이고 ‘필요에 의해서’ 배운다는 것, 아이들에게 이 점을 깊이 인식시켜 줘야 합니다. 영어는 결코 제2의 모국어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최 교수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한국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발전의 기회라고 본다. 영어와의 관련 양상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인터넷 언어 등 매체에 따라 격변하고 있는 국어 현상을 총괄해 사전으로 펴낼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은 그 같은 확신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문세영의 ‘조선어 사전’(1938년)을 비롯, 남북한의 국어사전을 총괄하는 국어사전사(史) 집필은 그에게 큰 과제로 남아 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9-02 14:12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