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난타한 문화 CEO퍼포먼스 로 문화산업의 새로

[리더탐구 성공의 조건] PMC 대표 송승환
세계를 난타한 문화 CEO
퍼포먼스 <난타>로 문화산업의 새로


1999년 영국 에딘버러 어셈블리홀, 무대 위에는 도마 네 개, 양배추, 오이 같은 채소들이 쌓여있다. 갑자기 등장한 배우들이 프라이팬과 냄비를 흥겹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하는 신나는 두들김이다. 공연이 끝나자 300석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내고, 관객석에 있던 한 남자는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난타의 제작자이자 PMC의 대표, 송승환이다. ‘세계를 난타한 남자’, ‘문화CEO’, 한국을 넘어 세계를 두드리고 있는 난타는 그에게 이런 근사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 국내 최장기 공연 등 독보적 기록 수립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가장 큰 힘은 난타의 성공이다. 국내 최장기 공연, 국내최다 관객동원, 전용관이 있는 유일한 퍼포먼스, 에딘버러 페스티벌 최고의 화제작 등 난타가 이룬 성공은 독보적이다. 난타의 성공으로 문화마케팅, 문화CEO등 문화의 산업화 논의로 붐이 일기 시작했다. 난타는 단순한 한편의 연극을 넘어 한 시대의 코드로 자리잡았고, 연극의 산업화와 수출화에 불을 댕긴 사건이었다. 또한 배우 송승환에서 공연기획자이자 문화 CEO로 바꾸었다.

그는 아역 탤런트 출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과는 조금 다른 학창시절을 보냈고 화려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 관련 일을 했는데 뇌막염으로 쓰러지자 가세는 더욱 기울어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소년가장 출신이다. 얼마 되지 않는 그의 출연료로 집안 살림을 꾸려 갔던 것이다. 그의 이런 어려움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MC로, 배우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을 때에는 부모님의 또 다른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당시 그가 다녔던 유치원에서는 동화구연을 자주 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늘 송승환에게 동화를 들려주곤 했다. 덕분에 그는 선생님을 대신해 애들 앞에서 토끼와 거북이 같은 동화를 단골로 소개하는 기회를 가졌고 그런 끼가 결국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하나뿐인 여동생도 이벤트 관련 사업을 하는 것을 보면 끼가 있는 집안이다.


- 연예인 같지 않은 연예인

그는 연예인 같지 않은 연예인이다. 보통 연예인들은 연기 활동 때문에 학교생활은 대충 하지만 그는 달랐다. 교사 출신인 엄격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학교생활에 충실했고 휘문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아나운서 손석희, 10월의 마지막 날을 부른 가수 이용이 그의 동기이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은 딴따라라 해서 별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그런 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다. 또 순수예술의 가치는 높이 평가하고, 대중예술은 허접한 것으로 취급하는 국어 선생님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세레피아 (신경안정제의 일종, 그만큼 졸리게 강의를 한다)란 별명을 가진 그 선생님은 당시 최고의 인기 가수인 남진과 나훈아를 아주 경멸했는데 심지어 “그들이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민을 가 주는 것”이란 얘기까지 했다. 그러니 어찌 그가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덕분에 평소에도 사복을 입지 않고 교복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

연기생활을 천직이 아닌 취미 정도로 생각했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연기생활을 접는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당시 중동 붐 때문에 인기였던 외국어대 아랍어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무대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중퇴하고 배우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1976년도부터 소극장에서 본격적인 연기생활을 하는 한편 최고의 인기프로그램 젊음의 행진 MC등을 보면서 화려한 생활을 다시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


- 절정의 인기 뒤로하고 홀연 유학

인생에는 여러 번의 갈림길이 있다. 이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한 순간에 변한다. 그에게 최대의 갈림길은 인기가 최고였던 1985년 찾아왔다. 65년도부터 쉬지 않고 일을 해 지치기도 했고, 한국에서는 볼만한 연극이나 영화가 없다는 사실에 문화적으로 늘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유학을 결심한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스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유학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인기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놓아야 한다.”면서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돈보다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싶은 것을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이 허무하게 날아가자,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유학 길에 오른다. 아마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타도 송승환도 없을 것이다. 버리면 얻는 것이다.

그는 비범한 사람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면에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무모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배우를 하겠다고 대학을 그만둔 일도 그렇고, 인기스타 자리를 버리고 유학을 결심한 것도 그렇다. 난타라는 대사 없는 퍼포먼스를 기획한 것도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인다. 또 이를 외국에 수출하겠다는 발상도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일이다. 결정적인 것은 난타 전용관 건설 계획이다. 주변 사람들은 한 공연으로 365일을 끌어간다는 것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은 정말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는데 만약 그들에게 난타가 한국 관광의 필수코스로 인식되기만 한다면 전용관을 운영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란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 예상은 멋지게 적중했고 그에게 고정적인 수익을 가져오고 있다. 언제나 상식이 다 옳지는 않다고.

그는 CEO로서 경험은 없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많은 경험이 있고 훈련된 사람이다.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제작자의 역할은 CEO와 비슷하다. 돈을 끌어오기 위해 기획을 하고 자본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을 결정하고 스태핑을 하는 것도 그렇다. 감독, 주연, 조연을 결정하고 이들을 도와줄 조명, 분장, 의상도 결정해야 한다. 또 이들이 팀?p을 이루어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해야 한다.


- 의연하고 낙천적인 성격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낙천적이란 점인데 그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증세가 심한 낙천주의자이다. “과정에 있어서는 꼼꼼하게 따지고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지만, 벌어진 결과에 있어서는 의연하고, 낙천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그의 얘기이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곤혹스러워한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결코 쉬운 삶을 살지 않았다. 소년 가장으로서의 부담, 부모님의 반복된 사업실패, 어렵게 들어간 대학의 자퇴, 뉴욕에서의 새로운 출발, 의욕적으로 만든 연극의 부진… 하지만 그는 태연하다. “설마, 송승환이가 깡통이야 차겠습니까? 망하면 밤무대를 뛰면서라도 일어서면 되는 것 아닌가요.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아서인지 별로 힘들었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대단한 낙천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문화산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대인관계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한편의 연극을 올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대인관계의 원칙은 솔직함과 진실함이다. 기술적으로 무슨 의도를 갖고 사람을 다루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는 동료나 직원들에게 늘 진실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잘 되고 있거나, 안 되고 있거나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한다. 그런 진솔함은 인터뷰 과정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96년 회사 설립 이래 이광호 사장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데 8년간 조화롭게 회사를 운영하는 데는 이런 솔직함이 한 몫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조화를 이루는 것은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이 없다. 대신 그에게는 늘 그를 지지하는 든든한 아내가 있다. 그의 가정관리 비결은 주기적인 별거이다. 그와 아내는 일년에 두 번 별거를 한다. 그의 표현은 방학이다. 아내의 친정이 미국에 있는데 친정나들이도 할 겸 봄과 가을 두 차례 한 달씩 방학을 준다는 것이다. 계속 붙어 지내는 것보다는 가끔씩 떨어져 있어야 서로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인간이다. 또 아내의 입장에서는 주기적으로 멀리 있는 가족을 만나니 좋고.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 예술가인 동시에 기업가

그는 예술가인 동시에 기업가이다. 돈이 안 된다고 하는 연극을 산업으로 만들고 수출을 해서 이익을 냈다. 전용극장을 만들어 지속적인 매출을 올리고 고용도 창출하고 있다. 또 끊임없이 신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보통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꿈만 먹고 살지만 그는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서있다. 그는 연극을 하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싶어한다. 배우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갈채에 익숙한 직업이다. 그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에딘버러에서의 성공으로 그는 제작자로 새롭게 태어났다. 또 돈도 벌었다. 그로 인해 연극이 배고프고 힘든 길만이 아니라 연극을 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를 보면 질투심이 생긴다. 동시에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한 번도 일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단다. 늘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런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성공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학습, 날카로운 감수성, 시대를 읽기 위한 노력, 무엇보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그를 만든 것이다. 즐겁게 노는 것처럼 열정을 갖고 일을 하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성공의 법칙은 의외로 단순하다는 것이 그를 인터뷰하고 나오면서 든 생각이다.

한근태 서울과학종합대 교수


입력시간 : 2004-09-08 17:07


한근태 서울과학종합대 교수 kthan@ass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