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세계적 브랜드 파워뚝심과 발품으로 건져올린 아라리 가락, 사설 464수 CD에 채록

[한국 초대석] 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
'아리랑'은 세계적 브랜드 파워
뚝심과 발품으로 건져올린 아라리 가락, 사설 464수 CD에 채록


누가 아우라지를 안다 하는가?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 5리, 낙동강이 막 용틀임 하기 시작하는 고즈넉한 산골 마을 앞, 뽀얗게 부서지는 계류를 하염없이 보고 서 있는 아우라지 처녀의 그 애절한 사연을? 그리하여 마침내, ‘정선아리랑’을 그 선율에 평생을 건 한 사람을?

하기사 지난 8월에는 인근 구절리까지 레일 바이크(관광 열차)가 운행을 시작했고, 9월 22일부터는 운행 노선을 정선군까지 늘인 관광 열차까지 합세해 외지인들의 옷자락을 부여 잡으려 애쓰고 있으니 한 번은 귀에 스치고 갔음 직한 이름이다. 퇴락 일로에 접어 들기 시작한 탄광 산업을 만회하기 위해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조성했던 내국인 출입 허용 카지노 ‘강원 랜드’로 더 낯익다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입 확대의 논리에 내몰린 변형의 모습들일 뿐. 어디에도 진짜 아우라지는 없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 뱃사공도, 여염집 아낙도, 고을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 소절 구성지게 뽑아 올리는 ‘정선아리랑’이다. 세파와 시속에 밀려 모습이 달라져 가고 있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민초의 생명력으로 꿋꿋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가락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선아리랑’이란 한껏 분을 발라 쇼케이스에다 내 놓은 관광 상품이기 십상이다. 김영임류의 농염한 가락 아니면, 경기제 민요로 분식된 가락이다. 그렇다면 현지 주민에게는 낯선 ‘정선아리랑’만이 행세할 바에야, 아무도 아우라지를 모른다는 역설이 제격 아닌가.


- 망실의 위기에서 아리랑을 구하다

그러나 산골 마을을 헤매 다닌 사람의 뚝심과 발품으로, 망실의 위기에 놓여 있던 ‘정선아리랑’은 구원을 받았다. 현지에서 파릇파릇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그 신선도가 100% 보존돼,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형태로. ‘정선아리랑’이라는 틀로 빚어진 사설 464수를 모두 8개의 CD로 구워 하나로 담아 낸 ‘정선아리랑’이 국악 음반사의 새 장을 연 것이다(신나라레코드). 단일 사설로서는 ‘춘향전’ 전 바탕(CD 7장)의 기록을 젖힌 방대한 분량이다.

“정선아리랑의 본산지로서 10년째 관심을 가져 온 영월, 평창, 정선, 태백 등 강원도내 깊은 산악 지대 4곳을 대상으로 해, 음반 제작을 염두에 두고 답사에 들어 갔어요. 현지에서는 ‘아라리’라고들 하죠.”해가 유달리 짧은 심심산골, ‘아리랑’만이 긴 밤의 동무가 돼 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1971년 강원도가 ‘정선아리랑’으로 덜컥 이름 붙이고 강원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했지만, 학문적ㆍ기록적으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 했던 무형의 자산이 처음으로 정리될 기회와 맞닥뜨린 것이다.

“3년 전 배운 컴퓨터로 3권을 탈고했어요.” 아리랑 관련 서적만 모두 9권 발표한 김씨가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한민족 아리랑 연합회’ 사무실에서 독수리 타법을 열심히 구사하며 뭔가를 쓰고 있었다. 취재진이 온다는 소리에 구레나룻은 후딱 깎았지만, 5년째 기르고 있는 수염은 풍찬노숙의 시간들을 증거해 주고 있다. 한완상 교수가 교육부 장관으로 부름을 받아 나간 이래 회장직은 3년째 궐석이고, 그는 만년 상임이사다. 이 사단법인과 인연을 맺은 지 22년째.


- 아리랑에 바친 열정의 세월

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이사 김연갑(51)씨가 인류학 탐사팀의 현장 연구와 맞먹는 작업 과정을 돌이켰다. 무엇보다 아리랑에 바?그의 열정이 없었던들 현실화시킬 엄두를 못 냈을 일이다. 또 ‘한국의 소리’라는 대기획을 내걸고 국악 음반 제작에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신나라레코드측의 노 하우와 그를 뒷받침하는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신나라측과의 사전 조사에서 현재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9가족으로 대상을 한정한 그는 신나라의 이태규 상무와 그들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 그 결과 김연수(71)씨 가족 3대를 따라 갈 사람이 없었다. 특히 큰 딸 김순녀(46)씨는 산골을 헤매고 다닌 노고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여러 노래자랑을 휩쓴 주인공답게 ‘정선 아라리’는 물론 ‘경기제 정선 아라리’‘한오백년’‘엮음 아라리’ 등 관련 작품들을 두루 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그를 매료시킨 대목은 3대 가족 10명이 주고 받는 ‘사설 치레’ 부분이었다. 이들 가족이 주고 받는 ‘정선아리랑’ 사설은 방송용 박제품이 아니라, 현장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입증하고 있었다.

지난 1월, 마이크 4대, DAT, 컴퓨터를 사용해 즉석에서 구워 낸 CD는 전통의 흐름 속에서 현재와 긴밀히 조응하는 풀뿌리 예술만의 정취가 그득하다. 물박 장단의 신묘한 타악음을 배경으로 해 주고 받는 가락과 사설에서 옛 이야기 나누듯 하는 전승담까지 오롯이 담겨 있다. 또 6차례에 걸쳐 만나고 의견을 나누며 쌓아 올린 친밀함 덕에 는 등 문화인류학적 기록성까지 동시에 획득한 보기 드문 예를 남겼다. 충주, 성남 등 외지로 시집 간 바람에 매기고 받는 힘이 딸리는 두 딸이 부르는 노래 부분도 독특한 맛을 준다.

특히 김씨에게는 이번 작업이 1986년부터 손을 잡고 꾸준히 음반 작업을 해 온 신나라뮤직사와 이뤄낸 쾌거라는 사실도 그를 기쁘게 한다. 첫 결실이 ‘SP 음반 복각판 아리랑’으로, 바로 그의 저서 ‘아리랑’을 보고 연락한 신나라측과 의기가 투합한 것. 이후 ‘북한 아리랑’, ‘일본으로 간 아리랑’, ‘세계 속으로 간 아리랑’ 등 일련의 작품들이 나오다, 이번에 제 6호 작품이 빛을 본 것. 상업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제작에서 배포까지 모든 과정을 도맡아 한 신나라측의 의지가 없었던들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며 그는 감사한다. 학계에서 반응이 나온 것은 1988년이었다. 강원대 박민일 교수를 필두로 해 지금까지 모두 15명의 석ㆍ박사가 잇고 있다.


- '세계 속 아리랑' 음반 준비

그의 아리랑 살리기는 신나라레코드와의 긴밀한 협력 아래 계속될 예정이다. 특히 외국을 다니며 6년째 해 오고 있는 ‘세계 속 아리랑’ 음반 준비 작업은 아리랑의 보편성을 밝혀 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아리랑은 수두룩해요. 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재즈화한 아리랑, ‘아디동 블루스’가 나오더니 1년 뒤에는 포크 가요의 거장 피트 시거가 최초의 반전 가요로 아리랑을 지목하는 일이 있었죠.” 한국의 브랜드 파워로서 아리랑만한 게 없다는 말이다.

아리랑은 그의 평생 일감이다. 계시는 군대 시절 왔다. “대면방송(휴전선 내에서 북한군과 2㎞ 거리를 스피커를 통해 벌이는 신경전)때 북측이 보낸 선율이 바로 아리랑이었죠.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며’라며….” 건국대 국문과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청년의 직관을 자극한 사건이었다. 복학 후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정선이었다.

사북사태 이후라 침잠한 분위기 가운데 그 곳 사람들은 끊임없는 개사로 아리랑을 놀라우리만치 현재화시키고 있었다. “‘남양군도 검둥이는 얼굴 손만 검지만/우리네 탄쟁이는 얼굴 손 가슴까지 검다네’라면서요.” 그는 당장 도시락 챙겨 들고 6년 동안 채록 작업에 들어 갔다. 그 결과가 한국 최초의 아리랑 가사 연구 단행본인 ‘8도 아리랑 사설집’(현대문학사刊)이다. 이후 ‘북한 아리랑 연구’(2002년)까지, 그의 아리랑학은 모두 9권의 단행본으로 정리돼 있다.

그 중 1896~1926년까지 한국ㆍ미국ㆍ일본에서 나온 아리랑 악보를 추적, ‘정선 아리랑’의 선율이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주제곡으로 쓰이기까지의 내력을 정밀하게 규명한 대목은 한 번도 제기되지 못 했던 바다. 또 고려시대의 문장가 목은 이색의 시(이번 앨범의 표지에 전문 수록)와 ‘청산별곡’의 내용이 정선아리랑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그의 주장 역시 학계가 생각지 못 한 대목이다.

미결 상태로 남은 것은 이론적 부분만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자기 때문에 예기치 않게 바깥으로 나오게 된 김연수씨 일가의 향후 문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이들은 9월 23일 KBS1 TV의 한 지명도 높은 프로에 출연해 주십사 하는 요청도 거절했다. 고추 농사 때문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 씨는 이들이 세상 바람을 타는 것이, 마치 자기 탓 양 싶어 가끔씩 마음이 개운찮다. “생활이 앞서는 이들에게 얼마 줄 테니 노래 한 번 불러 달라는 식으로 무대 강요하는 일만은 정말이지 없어야 해요. 순박하게 산골서 살다 매스컴 한 번 타는 바람에 결딴난 어느 부녀처럼 될까 몹시 조심스럽습니다.”


- 노래 듣는 정례모임 구상중

20여년 답사 경험이 있는 그는 바깥 세상의 무자비함을 똑똑히 보았다. 민속학자들에게 유무형의 자료를 제공해 줬는데, 목적만 이루면 약속이나 한 듯 나 몰라라 식을 한 두 번 당한 게 아니다. 그는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김씨 일가를 ‘아리랑 가족 1호’로 선정, 연구자들과 매달 1~2회 정도로 정기적 만남의 장을 갖도록 하는 방안 등을 생각중이다.

“무대도 마이크도 없이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그들의 노래를 듣도록 하는 정례 모임도 구상중이에요. 강원도측과도 협의를 거쳐야 할 부분이죠.”

현지 답사와 음반 작업의 와중에도 붓을 놓지 않은 그는 최근 ‘정선아리랑 시원설 연구’, ‘본조 아리랑 연구’ 등 2권을 탈고했다. 11월중으로 두 권이 나오면 그는 아리랑을 키워드로 해 모두 11권의 책을 펴내게 된다. www.arirang365.com으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 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9-15 14:14


장병욱 차장 ah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