動과 靜의 자연 속에서 소통의 의미 찾기자연과 예술의 순환은 그의 작품세계의 영원한 주제

[인물포커스] 서양화가 추인엽의 예술세계
動과 靜의 자연 속에서 소통의 의미 찾기
자연과 예술의 순환은 그의 작품세계의 영원한 주제


관악산이 마주 보이는 남태령 너머 야트막한 산자락.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을 오르면 추인엽(秋人燁ㆍ43)의 작업실이 있다. 잡초를 가리켜 “제압되지 않는 생명의 힘”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의 작업실을 오르노라면 도심의 한 복판인 것을 잠시 잊어 버릴 만큼 자연의 생기가 온 몸을 파고 든다.

처음 작업실을 만들었을 때는 넓은 마당을 연상시킬 만큼 넓어 보였으나, 지금은 사람이 다니기에 비좁을 만큼 그가 직접 짠 1층 높이의 그림 틀로 가득 차 있다. 그렇듯, 작품에 대한 추인엽의 열정이 작업실 곳곳에 배어 있다. 10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노암갤러리에서 작품전을 여는 주인공이다.

요즘 그의 작업은 풍경이 주를 이룬다. 그 중, ‘폭포’라는 테마가 가장 많다.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높은 것에서부터 한 뼘 크기의 폭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또 그 수도 많다. ‘폭포’는 오랜 동안 그가 중요하게 여겨 온 테마다. 그가 작가로 출발할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앞으로 먼 미래에 까지 이어질, 숨이 긴 모티브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함께 한 다른 풍경, 즉 나무나 숲과 함께 그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다. 물은 사물이 가지는 운동성의 표상으로서 아래로 움직이는 모든 기운을 뜻하는 사물해석 의 상징 코드라는 믿음때문이다. 그것은 화폭에서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 흐르는 강과 바다, 그 표면 위의 파도, 고요하고 잠잠한 수면 등으로 표상된다.

추인엽은 우리의 몸과 사물, 또는 자연과 예술 작품의 관계에서 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에 대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작가다. 이 커다란 도시에서 그의 에너지가 소진될 때 쯤 이면 그는 훌쩍 지리산과 동강으로 잠입, 며칠씩 홀로 지내기가 부지기수. 그 곳에서 자연과 직접적인 교감을 이루기 때문이다. 바로 그 교감을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고자 한다.

- 자연은 외형이 아닌 모든 것

그에게 자연은 외형이 아니라 그 전체다. 안과 겉을 통과해 소통하는 ‘순환’이다. 순환이란, 그가 선택해서 이름 붙인 그의 영원한 주제다. 그의 작가적 양심과 그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의 이면에는 아직 다 드러내지 못하는 미제(未濟)가 있다. 그는 참 마음에 따른 올바른 작가적 태도를 지켜가기 위해 애쓰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전 작품에서 형상과 색채를 다루는 조형 운용 방식을 통해 존재의 ‘동적 요소’와 ‘정적 요소’를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밧줄을 사용하여 만든 ‘폭포’(동적요소)와 시공의 이미지를 추구한 혼합 질료의 평면 작업 ‘지리산 장터목’(정적 요소) 등은 하나의 세계가 가지는 전체를 동(動)의 모습과 정(靜)이라는 양면적 모습으로 표출시켜 낸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추인엽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세우려 하거나, 새로운 하나의 전형을 의도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항상 전체다. 그 전체의 양측면(兩側面), 또는 다면(多面)에서 추구되는 노력은 고정되지 않는 다양한 표현 방식을 수반한다. 그 다른 표현 방식들이 연결되는 통로를 가지게 되므로, 그러한 점이 자연스럽게 추인엽의 작가적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추인엽이 그리고 있는 ‘풍경의 내면’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게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자연의 상징성이다. 그는 단순한 풍경으로서의 자연에 회귀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얻으려는 바는 자연과의 직접 부딪침을 통해, 보다 큰 열려진 세계로의 전환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연 질서의 발현으로서의 풍경’은 추인엽이 사물의 내면적인 생명 코드와 시각 조형으로 끄집어 내려고 하는 ‘소통’과 ‘순환’이라는 기적 작용(氣的 作用)에 의거한 조형 운용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인엽이 그리는 ‘풍경―산, 구름, 물, 나무, 숲’의 형상에 내포된 사실적 형상의 내면은 추인엽이 몸으로 느끼고 바라보는 바, 기적(氣的) 소통과 순환의 형상으로서의 자연인 것이다.

실타래처럼 얽힌 연필 구조의 ‘풍경’에서 그는 자연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풍경이 인간에게 자신의 외양을 보여주며 묘사케 하는 모델로서의 풍광이 아닌, 자연이 인간에 대면하여 자연 자신이 가지는 기적 체계를 보여주고 느끼게 하여 전이(轉移)시키려는 소통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물(폭포)은 하늘과 구름 또는 바위 등과 차별 없는 연결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 태백의 자연에서 싹튼 예술혼

추인엽은 태백에서 났다. 요즈음 그는 어린 시절 살던 집 뜰 앞,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서있는 소나무를 찾아 내어 그린다. 추인엽 내면의 태백은 순수한 자연의 모습과 탄광촌의 모습이 함께 있다. 자신이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자전적인 삶과, 유년 시절 함께 했던 그곳 사람들의 삶이 태백의 순연한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함께 있다. 태백의 탄광촌은 과거의 번영이 바로 현재의 폐허로 이어 지는 곳이다.

그곳은 삶의 한 모습이면서, 삶의 한 상징이다. 추인엽은 함백산의 맑은 하늘과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 추인엽은 태백에 대한 연민이 있다. 추인엽의 또 다른 풍경 작업인 디지털 풍경으로는 프린팅 과정을 거친 대형 사진 작업으로 태백을 주제로 한 ‘철암Ⅰ - Ⅱ - Ⅱ - Ⅳ’와 ‘북망’, ‘한강’, 그가 재직 중인 학교인 ‘예원’ 등이 있다.

추인엽의 디지털 풍경이란 꼴라쥬로 변형된 원형적 구조로서, 이것의 모티브는 삶과 하늘이다. 작가의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삶의 형상(태백의 철암, 아버지와 조모의 무덤, 자신의 화실 옆의 한강, 그리고 직장인 예원)들이 견고한 조형 구조로 다시 구축되어 한 울안에 모여 있다. 그 삶의 형상들은 중심부에 하늘을 이루고, 또 그 하늘을 지향한다.

추인엽의 디지털풍경의 메시지는 삶의 현재, 과거, 미래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같다. 삶의 현재 모습과 그것이 향해 보여주는 하늘의 모습. 현재를 이루어 온 과거가 함께 있다. 디지털 풍경을 한참 보고 있으면, 마치 그림이 나를 보는 것같다. 거대한 하늘의 눈에 비친 삶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추인엽의 디지털 풍경 연작은 삶과 세계의 전체를 들여다 보기 위한 통시적(通示的)구조를 갖고 있다. 그림을 보고 나면, 역으로 하늘이 나를 바라다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연으로부터 삶으로, 삶도 자연 질서 속에 감싸 안겨 순환의 메시지로서 통시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에 대한 통시적 인식, 그것은 추인엽의 힘이다. 삶과 자연 전체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려 하는 의지이자, 삶의 실상을 보고자 하는 의지이다. 추인엽 자신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함께 중요한 일이리라.



** 이놀움 화가

입력시간 : 2004-10-2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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