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열정에서 비켜나 연극도 관객도 보듬고 싶었다"파라다이스 예술대상 첫 수상자, 새작품 발표

[한국 초대석] 극작가 김명화
"비판과 열정에서 비켜나 연극도 관객도 보듬고 싶었다"
파라다이스 예술대상 첫 수상자, 새작품 <카페 신파> 발표


“셰익스피어 대사를 누가 그렇게 치냐? 리얼리즘이야? 임마, 대사가 바닥에 주루루 다 떨어지잖아. 위로 꽂아야지!”제멋에 겨워 ‘리어왕’의 한 대사를 흉내 내고 있던 웨이터를 보다 못 한 연출가가 쏘아 붙이는 말이다. 연극 동네에서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살(肉)냄새가 자욱한 말이다.

“야! 이 기집애야. 어떻게 사람들이 다 주인공만 하냐. 주인공이 있으면 조연도 있고, 엑스트라도 있는거지. 중요한 건 연극이잖아. 무대 위에 주인공만 있으면 연극이 굴러간대? 그거 징그러워서 누가 보냐?” 스타 못 돼 안달 난 여배우에게 동료 배우가 쏘아 주는 말이다.

같이 만들어 간다는 생각, 배우든 스탭이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징그럽지 않은’ 작품이 비로소 탄생한다는 법칙이 현장성 있게 묘사돼 있다. 저 말에 따르면 모두가 스타가 못 돼 안달하는 요즘 같은 시대는 결국 ‘징그러운’ 시대다. 그러나 통찰은 짐짓 거친 외향으로 뭉뚱그려져 있어 사람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한다.

- 비평으로 입문, 극작가로의 성공적 변실

극단 산울림이 공연중인 ‘카페 신파’에는 2년 반만에 새 작품을 발표하는 극작가 김명화(39)씨가 바라 본 세상 풍경이 엮여져 있다. 비평으로 연극계에 입문(1994년)해 극작가로 변신에 성공(1997년)한 독특한 경력이 말해 주듯, 그의 작품에는 어디에서건 허술한 구석이 발견되지 않는다. ‘돐날’, ‘첼로와 케첩’ 등 한 번 작품을 상연시켰다 하면 화제를 흩뿌렸다.

나이 든 사람 따로, 젊은 사람 따로, 주제 따로, 감각 따로이기 일쑤인 연극 동네에서 모든 세대를 초월한 신작이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는 것은 신선한 감동마저 불러 일으킨다. 최고참으로 이 연극에 기꺼이 동참한 전무송(64)씨를 비롯, 김기연ㆍ안성헌 등 풋풋한 신진까지 모두 12명의 배우들이 이뤄내는 동작과 말의 앙상블은 극장 안을 빼곡 채우기 족하다. 국립극단 고참으로서 모처럼 ‘남산’에서 내려 온 정상철을 비롯해 전국환 이혜경 등 중견 배우들까지 소극장 무대에 모이니, 극장 안이 차고 넘칠 지경이다. 이런 풍성한 느낌을 갖고 작품을 해 본 게 실로 얼마만 이었던가.

최근 임 씨가 파라다이스 그룹이 제정한 예술 대상인 ‘ 파라다이스 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돼 3,000여만원의 ‘엄청난’ 상금을 받았던 게 상연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다. 임 씨는 늘 해 오던대로 그 돈을 연극 만들기 자금으로 쾌척했던 것. “수상 기념으로 펴내는 책 ‘임영웅 선생님에 대하여’에 제가 쓴 글 한 꼭지를 올리는 것으로 감사함에 대신했어요. 맨 처음 세 주 동안에는 무서워 죽을 뻔 했지만요.” 호랑이로 소문 난 임 씨와 그렇게 지근 거리에서 작업한 그는 이 작품이 바로 하나의 통과의례 같기만 하다.

그것은 결국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임 씨의 지론이 현실화돼 가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 본 기회였다. 거의 매일 연습장에 가서 살았다. 특히나, 제작비에 쪼들려 젊은 배우들만 기용하는 우리의 연극 관행에서 출연진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에 달한다는 사실만해도 얼마나 큰 축복인 줄 잘 안다. 배우 선정이나 오디션 등 모든 과정을 함께 한 것도 복이었다. “일처리 방식, 인간 관계는 물론이고 작품 해석에까지 어른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됐죠.”

‘카페 신파’는 현재 한국 연극판의 축도다. 그 카페에 모여 연출가, 기획자, 제작자가 내뱉는 말은 이 시대 연극이 가난 속에서도 제 갈 길을 헛짚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연극이 가장 귀 기울이는 것은 배우들의 목소리다. 만년 조연만 하는 늙은 여배우가 있고, 어느 날부터 자꾸 대사를 ‘ 씹어대는’ 중견 배우가 있다. 21세기는 그들의 절망마저 익숙하게 밖으로 밀쳐 내 버린다.

저 같은 정황만이 계속 이어졌다면 이 연극은 말마따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로 그쳤을 지 모른다. 그러나 심상찮은 도입부에서부터 관객은 약간은 당황하고 조금은 긴장하게 돼 있다. 깜깜한 극장, 뒷켠에서부터 한 영감이 띄엄띄엄 느릿느릿한 말투로 길을 찾는다. 모처럼 마음 먹고 딸과 함께 대학로를 찾은 사람이다. 방금 본 연극보다도 구봉서가 나오는 영화나 코끼리가 나오는 서커스가 더 재미 있었다는 그 영감은 이 시대 갑남을녀의 모습을 은유한다.

- 좌절한 386세대 그린 '돐날'로 주목

연극의 운명을 통해 우리 시대를 잔잔히 돌아 보는 ‘카페 신파’의 작자 김명화는 원래 이렇듯 얌전한 작가가 아니었다. 산울림소극장의 임 씨가 이 작가를 본격적으로 예의주시하게 한 극단 작은 신화의 작품 ‘돐날’을 보자. 2001년 11월 최용훈 씨가 연출을 맡았던 이 직품은 좌절한 386 세대의 이야기다. 돌잔치날 친구들을 불러 놀던 부부가 아이의 유산 사건을 빌미로 해 말다툼을 벌이다 잔칫상을 뒤엎는 바람에 난장판을 만들도 만다는 내용.

1990년대 이후 사회적ㆍ이념적으로 불안정한 과도기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를 건너 가고 있는 386의 복잡한 내면을 연극적 활기로 형상화해 낸 이 작품은 동아연극상, 비평가협회상, 대산문학상 등을 두루 석권한 화제작이었다.

동성애 문제까지 다룬 작품의 압권은 난장판 대목. 전을 부친다, 고기를 굽는다는 둥 객석앞에서 잔치를 준비하던 등장 인물들 사이에 격렬한 말다툼이 벌어져 일이 난 것이다. 한 번 끝나면 모든 스탭들은 흩뿌려진 음식을 청소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극도의 소란속에서 객석은 산씻김 한 판을 치른 듯 했다.

불과 두 달 전, 독특한 2인극 ‘첼로와 케첩’에서 사랑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던 그 작가가 과연 맞나 하는 의심이 절로 들 정도로 무진서의 극치였다. “나의 작품은 볼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연극으로 가능한 여러 길을 모색하고플 뿐”이라고 말했다. ‘첼로와 케첩’은 비일상적이 언어를 적극 도입하는 등 실험적이고 철학적이라는 중평이었다.

한편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기념, 일본의 신국립극장에서 위촉했던 ‘강건너 저편에’에서는 그의 작품 코드에는 대중적 정서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통로들을 여럿 마련해 두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해 보였다. 나아가 한일 문화 교류의 앞줄에 서서 바람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다. “ 임영웅 선생님께서 현재 국내 활동중인 젊은 극작가들의 리스트를 쭉 뽑아 놓고는 저를 지목하셨대요.”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이 쌓여야 했던가. 산울림소극장 앞길, 소담스레 쌓인 낙엽 덤불 같은 날들이.

그는 김천에서 연탄 공장을 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1남6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을 학수고대했던 부친은 그의 탄생에 대해 가출로 답했다. “ 또 딸이냐”며. 학창 시절 모범생과 농땡이를 왕복하던 그는 1984년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에 적을 얹어 두고는 교내 연극반에서 열심으로 활동했다. 졸업 후 TV의 방송 스크립터로 일하던 그는 연극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앙대 연극학과 대학원에 들어 가, 대학로 등지에서 작업을 병행하다 3년반만에 졸업했다.

그러다 1992년 가을, 이대극회의 의뢰로 ‘허생의 처’를 올려 주목을 받게 된다. “허생을 페미니즘적으로 뒤집고 비판한 패러디물이었어요. ‘심각한 코미디’였다고나 할까요?”두 해 뒤, 그는 객석예음상의 비평상 부문에서 젊은 세대의 연극계를 주제로 한 ‘현실속의 미래 진단’이 입선돼 연극 평론가로 정식 등단했다.

- '역사'를 오늘의 시각으로 그려보고 싶어

그러나 작가로서의 등단은 만만치 않았다. “연극의 안(內)으로 더욱 진입하고 싶었던” 그는 신춘문예를 비롯 희곡으로 부지런히 출품했으나, 번번이 실족했다고 한다. 사실 ‘돌날’과 ‘첼로’ 등 근간에 호평 받았던 작품들이 모두 당시에 쓴 것들. 그러나 당시 4년여 동안의 그를 객관적으로 보자면 언니집에 얹혀, 부모가 부쳐 주는 돈으로 사는 고달픈 백수에 다름 아니었다. “견디는 법을 가르쳐 준 시기였죠. 미친 듯 써 대던 당시 작품들 덕에 지금까지 버텨왔어요.”

비우호적이었던 세월들을 이겨낸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연극은, 진짜 연극은, 되바라지게 나서지 않는다. 그런 것이라면 대형 뮤지컬, 벗기기 연극만으로도 족하다 …. ‘카페 신파’는 연극으로 말하는 연극론, 일종의 메타 연극이다.

작가로서 그는 이 시대를 “기대했던 데 대한 배반감이 자욱한 쓸쓸함으로 가득 찼다”며 “총체적 부도덕의 시기”라고 했다. “그런 기분을 순하게 표현해 본 게 ‘카페 신파’죠. ‘돐날’이 강하게 나타냈던 작품이라면요.”

앞으로 그는 자기 작품의 포섭 대상을 보다 확산시킬 작정이다. 인간의 내면적 실체를 그리는 작품을 서너편 더 한 뒤, 역사로 눈을 돌릴 계획이다. 이광수와 허난설헌이 그 계획표의 선두에 있다. “비틀린 시간속, 인간성의 본질을 주제로 한 작품이 가능할 것 같아요.” 식민유산을 극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 반민특위에 대한 작품도 그 표 안에 들어 있다.

김명화는 말한다. “ 비판과 열정에서 한 걸음 벗어나, 연극도 관객도 껴안고 싶었다”고. “여지껏 작가로서 독하다, 지긋지긋하다는 평 많이 들었어요. 이 작품은 그냥 연극과 인생에 대한 것이죠. 소박하면서도 다정한 위로 같은….” 11월 28일까지 산울림소극장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11-10 16:11


장병욱 차장 aje@hk.co.kr